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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쉘 뒤샹. 도전과 존중

염정우 기자 | bind1206@naver.com | 2019-02-11 (월) 09:45


마르셀 뒤샹, '샘 Fountain' 1917년
 
 
아주 오래된 불편함과 다시 마주쳤다. 화면의 가운데를 불친절하고 견고하게 버티고 있는 정물. 냄새의 느낌과 함께 <샘>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시험을 위해 ‘개념미술의 선구자’로 암기 됐던 교과서 사진 속의 예술품. 마르셀 뒤상의 거짓 사인이 적혀 있는 남자 소변기 <샘>. 현대 미술은 이해하기 어렵고, 어쩌면 무책임하기까지 한 작가들의 철면피적 도발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추종하고, 예술 경매가의 신기록을 경신해 나가는 현대 미술. 도대체 이 기괴하고 불편한 작업들은 우리의 삶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이제 이 불편함을 청산해야겠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2019년 4월 7일까지 ‘마르셀 뒤샹’展이 열리고 있다. 필라델피아 미술관 소장품을 중심으로 150여 점의 작품으로 구성됐다. 특히 <샘>등 ‘레디 메이드’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고, <큰 유리>와 뒤샹 최후의 작품으로 알려진 <에탕 도네>가 디지털로 재현되고 있다.
 
 
벽면을 길게 장식한 뒤샹의 연보를 지나 초기 작품들을 지나면, 체스를 두고 있는 두 사람이 노란 추상으로 걸려있다. 프로 체스 선수이기도 한 뒤샹은 체스 두기를 ‘영혼의 풍경’이라고 불렀다. 조형적 상상력에 몰두해 있는 ‘영혼의 풍경’을 지나면, 양철 깡통 같은 기하학적 추상이 미끄러지듯 계단을 연속적으로 내려오고 있다.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 2>. 뒤샹은 한 사진작가의 연속 필름에서 영감을 받은 이 작품을 파리의 연례 현대미술 전시회인 ‘살롱 데 쟁데팡당’전에 출품했으나, 작품의 부분 수정 요청을 받고 그림을 거둬들인다. 이 작품은 이듬해 미국의 ‘뉴욕 아모리 쇼’에서 성공을 거두며 그는 뉴욕의 유명인사가 된다.
 

에드워드 무이브리지의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와 뒤샹의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2'
에드워드 제임스 마이브리지(1830~1904) 영국의 사진가. 동물의 움직임에 대한 획기적인 연구와, 영화를 만들 때 사용하는 필름을 앞서는 기계 주프락시스코프를 개발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 사건이 나로 하여금 개인적인 과거에서 완전히 벗어나도록 해주었다. 난 나 자신에게 '자 이게 그들이 원하는 거라면, 어떤 그룹에도 낄 이유가 없군, 나 스스로에게만 의지하고 혼자가 되는 거야’라고 말했다.”
 
회화영역을 지나면 ‘예술적이지 않은 작품을 만들 수 없을까?’라는 뒤샹의 독백이 디지털 공간으로 안내한다.
 

마르셀 뒤샹, '그녀의 독신남들에 의해 발가벗겨진 신부, 조차도 The Bride Stripped Bare by Her Bachelors, Even' 1915-1923
 
 
디지털 화면으로 작품의 그림자들이 흘러가고 있다. <그녀의 독신남들에 의해 발가벗겨진 신부, 조차도>, 일명 <큰 유리>다. 마르쉘 뒤샹이 ‘열정적으로 미완성’으로 남겨 두 길 원했던 8년에 걸친 작업. 이 작품은 금속 틀에 고정된 두 장의 포개어진 유리 사이에 지연된(뒤샹은 ‘그림이라고 하는 대신 ‘지연’이란 말을 사용한다. 그것이 그림이냐 하는 질문 자체를 더 이상 생각하지 않고 그저 진행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여러 개의 그림들로 이루어져 있다. 유리는 우연히 위아래로 균형적으로 파손되어 있다.
 
“난 무의식적으로 그것을 ‘완성’하지 않으려고 했다. ‘완성’이란 말은 전통적인 방법을 받아들인다는 뜻이며 또 전통주의에 따른 모든 장치를 수용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스피커에서는 작품 속의 각 부분의 명칭과 위치, 그 상징성과 상관관계 등을 설명하고 있다.

신부의 영역.​
신부의 영역인 유리판의 왼쪽에 납으로 만들어져 곤충처럼 보이는 것이 신부이다.
신부 오른쪽으로 보이는 구름 같은 것은 신부가 품고 있는 성적 욕망, 욕정의 분산을 표현한 것이다.
 

구혼자들의 영역​
.뒤샹이 '구혼자 기계'라 부른 유리판 왼쪽의 9개 주형은 갈색으로 구혼자들의 생식기처럼 보인다.
여기에서 생성된 욕망은 삼각형의 깔때기를 지나 초콜릿 분쇄기에 분쇄되어 쌓인다.
 
 
이 작품은 공학 논문을 들여다보듯이 감상해야 하는 불편함을 준다. 작품과 마주하는 심미적인 교감보다는, 눈에 보이는 부분 형태의 의미를 뽑아내야 하고, 보이지 않는 부분을 상상하여 개연성을 연결해야 한다. 전통에 저항하고 형식에 자유스럽고 싶었던 그 답지 않게 개념적 형식을 강요하고 있다.
 

마르셀 뒤샹, '에탕 도네' 1946~1966
 
 
뒤샹이 죽을 때까지 23년간 제작했다는 <에탕 도네>. 벽돌로 둘러싸인 스페인식 문 위에 두 개의 구멍이 나있다. 구멍을 들여다본 눈앞에는, 마른 잡목의 가지 위에 다리를 벌리고 누워있는 여자의 나체가 있다. 그녀의 왼손에 들려있는 가스램프 뒤로 왼쪽으론 숲이 보이고 오른쪽의 골짝기로는 폭포가 떨어지고 있다.
 
눈을 대는 순간 ‘구멍’의 시점에서 안과 밖으로 나뉜다. <큰 유리>의 신부의 영역과 구혼자들의 영역과 닮았다. 여성의 신비로운 성적 에너지를 갈망하는 수컷들의 욕망과 관음이다.
 

뒤샹 부부가 스페인 여행중 시골 농가에서 발견하고 가져온 에땅 도네의 비밀스런 문
 
 
예술이 모두 아름다울 필요도 없고, 모두가 다 좋다고 하는 것만이 예술일 필요도 없다. 하지만 많은 현대미술의 작품들에게서 정서적인 감동을 받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예술로 불리며, 관객을 예술을 겉도는 주변인으로 느끼게 하는 불쾌감을 준다. 넓은 의미의 예술의 포용성이 있겠지만, 일반인들이 받아들이고 있는 예술의 쓰임새는 일단 정신적인 감동이고, 그로 인한 정신적인 향상이지 않을까? 그들은 왜 굳이 예술이라는 장르에 머물고 싶어 하는 것일까?
 
위의 두 작품이 어떤 은유를 가지고 있으며, 몇 차원의 이야기를 하던 그것을 다 이해할 수 없으며, 다 이해해야 할 이유도 없다. 단지 그것은 자신을 표현하려는 수단일 뿐이다. 몇 가지의 힌트를 가지고 오래 들여다보고 나름대로 이해하면 그뿐이다. 그것이 오해이던 오역이던 개념은 개념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누가 타인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문의 구멍으로 들여다 본 이미지

 
“나는 미학적 거울에 나 자신을 비추어 보는 일에 결코 관심이 없습니다. 나의 의도는 비록 내가 나 자신을 이용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지만 늘 나 자신으로부터 달아나는 것입니다. 그것을 ‘나’와 ‘나 자신’ 사이의 작은 게임이라고 불러야 할 것입니다.”
 
가끔 어떤 거장의 작품도 작가의 업적과 명성을 제외하면 그리 큰 의미를 찾을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어떤 대상과 섹스를 하고 싶은 욕망과 두려움 사이에서 펼쳐지는 일련의 사건들... 그 게임은 완성될 수 없으리라’ 정도로 정리하고 넘어간다.
 

마르셀 뒤샹, 자전거 바퀴. 1.3m x 64㎝ x 42㎝. 1913년
 
 
디지털 공간을 지나 계단을 내려오면 마침내 불편함의 공간이 펼쳐진다. 등받이 없는 의자 위에 기다란 목을 뽑고 있는 <자전거 바퀴>, 가시 돋은 페티코트를 닮은 금속 <병 걸이>, 유리상자 속에 앉아 있는 도전적인 복제품 변기 <샘> 등등이 전시돼 있다.
 

병걸이 아연제품으로 와인병을 거꾸로 꽂아 말라는 제품으로 파리의 한 백화점에서 구입하여 작품화 되었다.
 
 
25세이던 뒤샹은 작업실에 두고 가끔씩 놀이 삼아 돌리던 자전거 바퀴를 레디메이드(ready made) 작품으로 내놓는다. 이후 뒤샹은 자신이 이사로 있던 미국 뉴욕독립예술가협회가 ‘민주주의와 수용성’이라는 가치를 얼마나 수호하는지 시험해보고 싶어진다. 협회의 첫 전시에 평범한 기성품인 남성용 소변기를 소포로 보낸다. 출품자 이름으로 ‘리처드 머트(R Mutt)’라는 가명을 썼고 작품에 <샘(Fountain)>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전시회 감독들은 <샘>을 놓고 격론을 벌인 끝에 ‘예술품이 아니다’란 결론을 내렸다. 뒤샹은 이에 항의해 이사직을 사임했다.
 
"내가 이미 만들어진 물건을 사용하는 것은 전통 미학을 낙담시키기 위해서였다. 나는 미학자들의 얼굴에 하나의 도전으로 변기를 던졌다."
 
이름하여 ‘개념예술’의 탄생이다. 감각적 작업이 시도되는 순간, 모든 표현은 개념의 과정 없이 이루어지지 않기에 개념 자체를 예술이라고 서슴없이 던진다. 개념을 재료로 하는 예술. 예술가의 의지가 개입하여 하나의 사물을 선택하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그 사물은 본래의 의미는 소멸되고 다른 의미를 갖는 창작이 된다. 예술은 물질적인 시각의 현상에서 자아를 표현하는 정신적 현상으로 들어간다. 변기의 아래쪽에 ‘R. MUTT 1917’이라는 익명의 서명을 한다. 작가는 의지는 예술가의 존재를 허구로 내세워 예술과 비예술의 경계를 지워 버린다. 자아표현의 무한한 확장성만을 남겨 놓고, 끊임없이 근원에 대한 물음과 답변을 스스로 해야 하는 고독과 직면한다. 영혼만 남아버린 예술. 이제 작가는 그것의 불멸성과 상관없이 자신의 삶을 살면 그뿐이다.
 
후기
 
현대미술과 마주치는 불편함을 청산하기 위해 만나본 뒤샹은 그리 어렵거나 기괴한 존재는 아니었다. 그는 기존의 형식을 거부하고 ‘개념’이라는 도구로 세상을 바라봤으며, 자신의 성적 억압을 밖으로 표출하려는 예술가였다.
뒤샹을 현대미술의 위대한 선구자로 만든 것은, 새로운 시각의 겁먹지 않은 ‘도전 의지’와 그 의지에 대한 대중의 ‘존중’이었다. 그것은 현대미술의 무한한 가능성을 열었다.
도전은 현실의 불합리와 그 부정 속에서 나온다. 눈에 보이는 현실적인 실상을 부정하는 것은 불교적으로 그리 새로운 개념은 아니다. 불교의 긍정은 현실의 처절한 경험의 부정에서부터 나온다. 괴로움!
가끔 한국불교의 한문 문화 중에서 현대미술의 불편함 같은 것을 본다. 이어지고 있는 삶이 고통의 답보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면, 그 삶의 언어를 계속 유지해야 할 이유는 없다. 영어로 불교를 공부하면 한결 배움이 쉽다는 말들을 많이 듣는다. 한문이 갖고 있는 인문학적인 풍부한 상상력은 버릴 수 없는 우리의 자산이다. 그러나 한자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확신으로부터 오는 삶의 낭비는 어찌해야 하는가.
명백하면서도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새로운 언어의 출현과 존중을 우리는 언제쯤 만날 수 있을까?
 

ⓒ 장명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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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이불재 2019-02-12 14:58:12
답변  
불편하게 하기, 비틀기, 낯설게 하기, 뒤집어보기 등으로 일상적 타성과 고정관념을 탈피하여 창발적이고 역동적인 언행과 사고를 유도해 내는 옛 선사들의 선적인 정신이 마르쉘 뒤샹의 작품들 배후로 스치는 것 같습니다. 기자의 의도도 그런 것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경담 2019-02-12 15:52:38
답변  
바로 그렇습니다. 이미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들이고, 그 보다 더욱 뛰어난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새롭게 창발하지 못하고 머물러 있습니다. 그러면서 외국에서 들어온 것들에 대해 놀라워하고 두려워하는 모습이 아쉬웠습니다.

재주와 공부가 모자라 가진 생각을 다 표현하지 못했습니다.
항시 이렇게 힘을 주시니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 미디어붓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