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고익진 박사(전 동국대학교 불교대학 교수)의 저서 『현대한국불교의 방향』을 요약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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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자비

전쟁이 벌어지려는 삼엄한 싸움터에서 왕자 ‘아르주나’는 양 진영이 모두 동족임을 발견하고 심한 번민에 빠진다. “무엇 때문에 동족을 죽여야 하는가. 승리도 왕국도 쾌락도 나는 바라고 싶지 않다. 저들에 내가 죽을지언정 나는 저들을 죽일 수가 없다. 동족끼리 죽인다는 것은 어떤 이유로도 합리화될 수가 없다”

아르주나는 마침내 칼을 집어 던지고 주저앉고 만다. 그의 몸은 번민에 싸여 부들부들 떨고 있다. 이때 마부로 종군하고 있는 스승 ‘크리슈나’는 그를 다음과 같이 깨우치고 있다.

“무사족(武士族)으로 태어난 왕자에게 나약한 자비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만일 죽는 것이 있다고 하면 언젠가는 죽어야 할 존재들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무사족으로 태어난 그 의무입니다. 의무를 다하는 것보다도 더 신성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인도의 세계적인 고전문학 ‘바가바드 기타’에 나오는 장면이다. 후삼국을 통일하여 고려조를 연 왕건 태조도 동족상잔의 과정에 아르주나와 비슷한 정신적 갈등을 겪고 있다. 중국에서 이엄(利嚴)선사가 새로운 선풍(禪風)을 전해 왔을 때 그는 다음과 같이 묻고 있다.

“이웃 적들이 번갈아 쳐들어와 초 한(楚漢)이 맞서 싸우던 때와 같소. 아무리 생명을 아끼려고 해도 점점 서로 죽이기를 심하게 할 뿐. 과인은 일찍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 속으로 자심(慈心)을 내고 있지만 그것이 오히려 적에게 무력해져 자신의 위험을 초래할 원인이 될까 두렵소. 대사는 부디 이에 대한 답을 해 주십시오.”

불교의 자비와 살생과의 어쩔 수 없는 갈등을 묻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이엄 선사는 어떤 답을 하고 있을까.
“제왕는 필부(匹夫)와 닦은 바가 서로 다르니, 군려(軍旅)의 때에도 항상 백성을 불쌍히 여기셔야 합니다. 왜 그러냐면 왕자는 사해(四海)로써 집을 삼고 만민(萬民)으로써 자식을 삼아 죄 없는 무리를 죽이지 않으니, 이에 죄 있는 무리를 벌하는 것이옵니다.”

놀라운 가르침이라 하겠다. 죄 없는 무리를 죽이지 않기에 죄 있는 무리를 벌한다는 것은 ‘바가바드 기타’의 자비 보다도 한층 더 놓은 정신적 차원을 보여주고 있다. 후삼국을 통일한 정신적 바탕은 바로 이러한 대승 불교적 자비였던가. 남북대결 속에 있는 우리들이 깊이 음미해 볼만한 말이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