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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스님의 역사 속의 불교여행 26

석현장 | | 2018-08-28 (화) 17:49

최초의 한글불서 원각선종석보 이야기
 
1999년 열반에 드신 일타 큰스님은 한국불교중흥에 남다른 서원을 갖고 계셨다. 태백산 토굴에서 금욕 고행하신 끝에 당신의 모든 것을 불법을 위해 헌신하는 뜻으로 오른손가락 다섯 마디를 촛불에 태워 연비하셨다.
 
청산유수와 같은 설법과 인과법문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불법의 믿음으로 인도하셨다. 일타 큰스님께서는 나이가 들면서 자주 말씀하셨다. “나는 내세에는 미국의 신자 가정에 태어나서 하바드대학 졸업하고 한국에 와서 출가할 것이다.금생에 못다이룬 불법의 중흥을 내세에는 이루겠다. 내가 죽으면 미국에서 화장해 다오.” 스님은 하와이에서 돌아가셨지만 제자들은 스승의 뜻을 져버리고 은해사로 모셔 와서 장례를 모셨다.
 
일타큰스님께서 중국여행 중 고서점에서 희귀불서를 한 점 구해오셨다. 훈민정음 언해본으로 이루어진 한글불서였다. 간행년도를 보니 명나라 정통3년 천불사 간행이었다. 제1권을 복사하여 경상대 려중동 교수에게 연구자료로 기증하여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책 제목은 원각선종석보 제 1권이다. 정통 3년 천불사 간행본이다.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반포일이 정통 11년 9월이다. 그런데 반포된 해보다 8년 전에 훈민정음 언해본이 출간된 것이다.
 

원각선종석보 제 1권(사진. 현장 스님 제공)
 
 
훈민정음 반포 8년 전에 이미 한글 언해본 책을 만들어 간행한 사람은 바로 신미대사이다. 그러면 한글은 정말 누가 만들었을까? 모든 사람들은 세종대왕이 집현전 학자들과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1443년 12월 세종이 한글을 창제하여 반포할 때 까지 집현전 학자들은 그 사실을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세종의 한글 창제 2개월 후에 부제학 최만리와 김문. 정찬손 .하위지등이 올린상소를 보면 그 같은 정황을 알 수 있다. ᆢ이것은 풍속을 바꾸는 큰일이므로 재상으로 부터 백관에 이르기 까지 함께 의논하여 의혹됨이 없는 연후에야 시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당시 유학자들은 모화사상이 깊을 때라 미리 알리고 했다면 반대에 부딪혀 시작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같은 상황 속에서 세종의 한글프로젝트는 극비리에 추진된 비밀사업이었다. 즉 세종 혼자서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당시 몸이 아팠던 세종은 정사를 돌보기도 힘든 때였다. 그러면 비밀리에 세종을 도운 사람들을 생각해야 한다. 가능성이 높은 사람들은 문종과 수양대군. 안평대군 그리고 정의 공주이다. 그리고 또 한사람 바로 신미대사이다.
 
복천암 사적기에, ‘세종은 복천암에 주석하던 신미에게 범어의 자음과 모음을 설명하게 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또 영산김씨 족보에는, 수성(신미대사)은 집현전 학사를 지냈는데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 고 적혀 있다. 범어에 능통한 신미대사가 문종과 수양대군. 안평대군. 정의공주 등에게 범어의 음운학에 대해서 가르쳤으며 훈민정음 반포 8년 전에 완성된 한글을 세종의 특명을 받아 법주사 복천암에서 마지막 정리를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세종실록을 보면 ‘옛 전자를 모방했다’는 내용이 있다. 조선전기 유학자인 성현은 훈민정음 반포 30년 후에 용재총화에서 ‘그 글은 범자에 의해 만들어 졌다’고 하였다. 조선중기 명신인 이수광도 자신의 저서 지봉유설에서 ‘우리나라 언서는 전적으로 범자를 본떴다’고 하였다. 이렇게 볼 때 실록에서 언급한 전자는 범자의 한자식 표현일 가능성이 높다.
 
‘수양대군 이유와 안평대군 이용이 심히 믿고 좋아하여 신미를 높은 자리에 앉게 하고 무릎 끓어 앞에서 절하며 예절을 다하여 공양하였다.ᆢ’ 세종실록이 전하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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