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라지는 우리나라 어디서나 볼 수 있지만 그 이야기가 태어난 금강산의 백도라지는 예로부터 참으로 유명하였다. 금강산의 백도라지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옛날 금강산 옥류동 골짜기에 화전을 일구어 어렵게 살아가는 도씨노인네 집이 있었다. 노인은 예쁘게 생기고 효성이 지극한 귀여운 외동딸을 데리고 살았는데 딸의 이름은 라지라고 불렀다.

 

노인은 딸을 고생 시키지 않으려고 새벽이면 이슬을 맞으며 밭에 나갔고 저녁에는 달빛을 맞으며 집에 돌아왔다. 라지는 한창 꽃나이였으며 부지런히 일했다. 품도 팔아 아버지의 일손을 도와 드리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이들 두 부녀는 이렇듯 부지런히 일했으나 살림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리려는 처녀의 마음도 딸을 즐겁게 해주려는 도씨노인의 소원도 좀처럼 풀려가지 않았다. 그것은 3년 전 처녀의 어머니가 돌아갔을 때 장례비용으로 고개 넘어 부자놈에게 빌려쓴 변돈 때문이었다. 이 부자놈은 워낙 돈밖에 모르는 수전노인인데다가 앵두처럼 익어가는 라지에 대하여 딴마음을 품고 있었다. 불이 난김에 도적질한다고 라지의 어머니가 죽자 선심이나 쓰듯이 변돈을 내어주고 해마다 가을이 되면 빚을 갚으라고 성화를 부렸다. 도씨 부녀는 뼈가 휘도록 일을 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일해도 변돈을 마련할 수가 없었다.

 

 

어려운 도씨부녀의 살림에 대하여 마을 사람들은 매우 걱정해주었다. 그 가운데서도 뒤 집에 사는 어진 나무군 총각이 각별하였다. 그는 라지와 소꿉동무였으나 커가면서 차츰 라지를 사랑하게 되었다. 이런 사이가 되고 보니 도씨집안 일이 남의 일 같지 않았고 그래서 총각은 한푼 두푼 나무판 돈을 모으기 시작하였다.

 

이런 기미를 알아차린 부자놈은 선손을 썼다. 어느 날 도씨노인을 불러다 놓고 라지어머니의 3년 상 되는 날까지 빚을 갚지 못하면 라지를 자기 첩으로 끌어가겠다는 새 계약서에 손도장을 누르게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어이하라. 근근히 모은 돈으로 3년 상은 치르었으나 빛을 갚을 돈이 없었다. 빛을 못갚으면 사랑하는 딸을 부자놈 집에 보내야 하는 것이다. 도씨노인은 그날부터 앓아누웠다. 아버지가 앓는 것이 이상하게 생각되어 라지는 어버지에게 그 사연을 물었다. 그러나 한숨만 내쉴 뿐 아버지는 통 말이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 소문은 온 동네에 퍼졌고 라지도 그 사연을 알게 되었다.

 

처녀는 아버지의 머리맡에 끓어 앉아 조용히 말하였다. “아버지 저의 근심은 마십시오. 이 딸의 평생 소원은 아버님에게 기쁨을 드리는 것이옵니다. 그런데 저 때문에 아버님이 이렇게 앓아 누우셨으니 저의 불효 죄는 용서받을 수 없는 줄 아옵니다. 저는 부잣집에 들어가는 것으로 이 죄를 씻으려 하오니 아버님께서 저를 사랑하시거든 제발 저의 이 소원을 들어주옵소서.”

 

아버지는 설레설레 머리를 저었으나 라지는 부자놈 집에 가서 계약대로 하겠노라 다짐하고 아버지가 손도장을 누른 그 가증스런 계약문서를 되찾아왔다. 다음 날 도씨네 집 뜨락에는 한 채의 큰 가마가 와 닿았다. 처녀는 부잣집 여종들이 입혀주는 대로 칠보단장을 하고난 다음 누워있는 아버지에게 큰 절을 올리고 전날에 찾아온 집문서를 갈기갈기 찢어 버리었다.

 

 

 

“아버님 이제는 이 원한 많던 빛 문서도 없어졌으니 이 불효막심한 딸의 죄 씻는가봅니다. 아버님, 안심하시고 부디 옥체건강 하옵소서.” 라지는 눈물에 젖은 목소리로 아버지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밖에 나왔다.
“이 애야, 못 간다. 나를 두고 어디 간단 말이냐?” 아버지는 기여 나와 가마에 매달렸으나 가마군들은 사정없이 라지를 메고 가버렸다.

 

가마가 고갯마루에 이르렀을 때이다. 라지는 가마를 멈추게 하고 밖에 나섰다. 그런데 그이 몸에는 어느새 갈아입은 것인지 소복이 걸쳐 있었다. 라지는 지나온 길을 돌아서 고개 너머 계시는 아버지에게 다시 한 번 인사를 드린 다음 길옆에 있는 어머님의 산소에 다소곳이 엎드려 절을 하였다. 그의 눈에서는 구슬 같은 눈물이 하염없이 흘려 내렸다. 이윽고 일어선 라지는 하늘을 쳐다보며 “어머니”하고 크게 부르더니 낭떠러지로 몸을 던졌다. 처녀가 그토록 애절하게 부른 “어머니!” 하는 소리가 메아리쳐 아직 골짜기에서 사라지기도 전에 라지의 가날픈 목숨은 끊어졌다.

 

얼마 후 처녀가 그렇게도 슬피 부르던 어머니의 무덤 옆에 새로 작은 봉분이 봉긋이 솟아났다. 뒤늦게 알게 된 나무꾼총각이 달려왔을 때 라지의 무덤에는 하얀 꽃 한 송이가 곱게 피어났다. 저승에 간 처녀가 자기의 사랑하는 총각에게 얼굴을 내민 것이리라!

 

이때부터 마을사람들은 그 하얀 꽃에 처녀의 성과 이름을 붙여 “도라지”라고 이름 지었고 다음해부터는 온 금강산에 그 꽃씨를 뿌렸다. 금강산의 백도라지는 이렇게 생겨났으며 그 때문에 유별나게 아름답고 강인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