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종 시인의 당진편지 21- 설조스님의 단식
교단정화 위해 목숨 건 노스님 절규 외면 말아야

“석가모니가 열어놓은 종교는 ‘청정’을 으뜸으로 삼고 염오(染汚)를 멀리하고 탐욕을 끊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 사원에서는 나날이 부역을 기피한 무리들이 승려를 자칭하면서 살고, 또 사원은 세속적 재물을 불림으로써 생계를 경영하고 축산을 생업으로 삼고 장사하는 일이 풍습으로 굳어버렸다. 그리하여 계율의 법칙을 어길뿐더러 사원에는 청정한 가풍이 없어졌다. 가사의 앞섶은 술항아리를 감추는 데 쓰이고, 불경을 읽는 장소는 마늘과 파를 심는 밭이랑으로 깎이어 나가고, 장사치들과 매매하고 손님과 어울려서 술에 취하여 즐기고 있다. 사원은 어지러워지고 불사(佛事)에는 더러운 냄새가 풍긴다.”

32년 전, 동국대 인도철학과 교수로 재직하던 중 윤화로 세상을 뜬 고 서경수 교수의 유고집 <세속의 길 열반의 길>을 서가(書架)에서 꺼내 한 부분을 찾아 읽었다. 현 조계종단의 실상을 지켜보면서 오랜 전 읽었던 서경수 교수의 비수 같았던 글이 다시금 궁금해진 까닭이다.

 
이 내용은 불심 깊었고, 고려 황금기를 이끈, 그리하여 ‘고려의 세종’으로 일컬어지는 문종(文宗)이 ‘왕명으로 비행 승려를 처분하겠다’며 공표한 글이다. 구구절절 1000년 지난 오늘의 불교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내용이니 그저 놀라울 뿐이다.

문종이 누구인가. 그는 초조대장경을 조성한 고려 현종의 아들이며, 고려의 대표적 고승인 대각국사 의천의 아버지로 어떤 왕보다도 불교에 깊은 애정을 가진 왕이다. 당시는 불교가 국교였으니 왕의 불심은 당연한 것일 수도 있으나, 고려의 사상계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대각국사를 낳고, 교육하고, 출가시킨 왕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문종의 글에서 보듯, 고려의 승려들이 두른 가사에 묻은 때는 고려의 찬란한 정신, 문화, 구제사업 등에 혁혁한 공을 세운 고려불교의 빛을 가리는데 추호의 모자람이 없었다. 또한 당시의 교단 부패상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가사의 때를 씻어낼 원력도 능력도 모두 상실한 참담한 지경이었다. 세속적 권력과 물질적 풍부에 도취한 고려불교는 종교로서 본연의 자세를 잃었고, 짠 맛을 잃은 소금처럼 종교적 기능을 망각한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오죽하면 지극한 불심을 가진 문종의 입에서 이런 글이 나왔겠는가.

 
타락과 부패를 거듭하던 고려불교는 고려 말에 이르러서는 종교적 사명을 잃어버렸고, 방향감각마저 둔해진 화석이 되었으며, 가사에는 검은 때가 너무 많이 묻어서 원래 색을 분별할 수 없는 정도였다. 문득 서경수 교수의 글을 떠올린 이유는 오늘날의 한국불교 상황이 고려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는 상황인식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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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 조계사 옆 우정총국 뒤편에서 교단 정화를 촉구하며 목숨을 건 단식에 들어간 설조스님을 친견하고 돌아왔다. 스님은 조계사 경내에서 단식에 들어가고자 하였으나 명리승(名利僧)들에 의해 내쫓김을 당하고, 부득이하게 우정총국 뒤 느티나무 그늘 아래에 자리를 잡아야 했다. 평소 존경하는 스님이기에 그 숭고한 뜻을 받들어 마땅히 그곳에서 함께 해야 하겠으나, 산골로 이사해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는 처지여서, 몇 시간 머문 뒤 발길을 되돌려야 했다.

설조스님은 미국에서 막 귀국했을 때, 공양을 함께한 자리에서 교단 정화를 위해 당신이 할 수 있는 마지막 수단을 결행할 뜻을 밝혔다. 그날 스님은 종도로서 불조와 종단에 진 빚(교단이 부패하는데 일조한 죄)을 갚아야 하겠는데, 가진 게 몸뚱이밖에 없으니, 목숨을 걸 수밖에 없다며 좀처럼 장탄식을 멈추지 못했다.

 
지금으로부터 22년 전인 1996년, 불국사 주지 소임을 맡고 있었던 설조스님은 경주 도심을 통과하도록 계획되어 있던 고속철도 노선을, 불교계 내부인사들까지 포함된 다수 기득권자들의 빗발친 비난과 압박에도 불구하고 혈혈단신 단식으로 막아내었던 적이 있었다. 올바른 일이라면 조건을 따지지 않고 떨쳐나서는 스님의 희생 덕에 천년고도 경주는 최악의 파괴를 피할 수 있었다. 이런 단호한 성정(性情)의 소유자이시니, 고령에 단식은 위험하다며 만류하는 나의 간곡한 요청은 일언지하에 폐기되고 말았다.

위법망구(爲法忘軀)! 6월 20일 단식을 시작하던 날, 설조스님은 이 4자성어로, 교단정화를 위해 당신의 심신을 부처님 전에 바치겠다는 결기를 나타냈다. 온갖 험한 꼴을 당하더라도, 끝내 목숨이 끊어지더라도 목숨 건 단식을 멈추는 일은 결단코 없다고 단언했다. 혹여 단식 중에 쓰러지더라도 절대 병원으로 이송하지 말라는 강력한 뜻도 주위에 단단히 부탁했다.

이날 설조스님은 단식 예정 장소인 조계사로 출발하기 직전에 인사동의 한 찻집에서 당신의 뜻을 따르는 10여 분의 스님들에게 이런 말씀을 남겼다.

“법주사에서 서울로 올라오기 전, 제 권속(상좌)들을 불러 당부했습니다. 내 목숨이 다하면 장례는 최대한 간소하게 치르라고요. 그러고 나서 법주사 경내의 모든 전각을 찾아 불보살님들께 마지막 인사를 하고 올라왔습니다. 나를 비롯하여 오래 산 사람들이 잘못 살아서 교단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고,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망가진 교단을 젊은 스님들에게 넘겨주게 되었으니 그 죄가 작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저부터 책임을 져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가진 게 이 몸뚱이밖에 없고, 단식밖에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니, 제 목숨을 바쳐서라도 교단이 정상화되는 작은 계기라도 만들어지기를 바랄 뿐입니다.”

설조스님의 단식은 이렇게 시작됐다. 보도에 따르면, 단식 열흘을 넘기면서 스님의 건강에 이상신호가 오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설조스님은 29일 열린 촛불법회에 참석한 사부대중을 향해 거듭 당신의 결연한 뜻을 밝혔다.

“종단을 바로잡기 위해 애쓰는 여러분들의 희망이 이루어지도록 저는 이 목숨을 걸고 단식하겠습니다. 교단 정화의 불을 지피는 데 제 몸뚱이를 심지로 쓰겠습니다.”

 
세수 90을 눈앞에 둔 설조스님의 절규는 보는 이의 가슴을 미어지게 한다. 고령이어서 단식을 견뎌낼 시간도 그리 길지 않을 것이다. 시간이 많이 남아있지 않다. 노스님도 살리고 종단도 살려야 한다. 사부대중이 다 나서야 한다. 특히 그 맨 앞에 교단운영을 사실상 독점하고 있는 비구들이 서야 한다. 타락한 교단을 스스로 정화하지 못함으로써 500년 넘게 척불(斥佛)의 과보를 받았던 불교사의 비극을 되풀이할 수는 없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