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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부터 시작된 봄눈이 온종일 그칠 줄 모른다. 날씨도 제법 쌀쌀하다. 춘설(春雪)에 꽃샘추위가 겹쳐서 찾아왔다. 예전 같았으면 눈 내리는 순간을 옆집 강아지처럼 좋아했겠지만 오늘은 영 마음이 싱숭생숭하다. 열흘 전쯤 겨우내 마늘밭을 덮고 있던 비닐을 거둬주었더니, 좋아라 아우성치며 한껏 기지개를 펴던 마늘 싹들의 환호가 눈에 선하다. 저 여린 싹의 정수리를 차디찬 춘설이 고문처럼 때리고 있다. 며칠 전 심은 감자는, 생떼 같은 매화는 또 어떤가. 어제는 막 꽃망울을 터트리려 파르르 떨고 있었는데, 설마 괜찮겠지? 그래 괜찮을 거야.
‘뭐든 돼야 되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사업하는 사람들, 영업하는 사람들, 무엇인가 일을 추진하는 사람들에게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말이다. 계약은 도장을 찍어야 성사되는 것이고, 돈은 통장에 입금이 돼야 번 것이며, 일은 끝나봐야 아는 것이라는 이야기들이다.
과거의 경험을 떠올려보면 이런 말들은 사실에 가깝다. 그런데 부딪쳐보니 농사도 다르지 않다. 유난히 혹독했던 겨울 추위를 잘 견딘 마늘이 파릇파릇 그 새싹을 드러냈을 때, ‘이 맛에 농사꾼들이 농사를 짓는가 보다, 이제 잘 크는 일만 남았다’며 즐거워했는데, 며칠 사이에 ‘혹시 얼어 죽기라도 하면 어쩌나’하는 불안함으로 바뀌었으니 말이다. ‘돼야 되는 것’이라는 말은 살림살이 어디든 적용되는 진리처럼 보인다.
기온이 오른 낮부터는 눈이 진눈깨비로 변했다. 아침나절 쌓였던 눈은 어느 순간 녹아버렸다. 눈발은 끊임없이 내리는데 땅에 쌓이지는 않는다. 지표면에 닿자마자 녹아내리는 것이다. 저녁이 되어 다시 기온이 내려가면 저 땅들은 다시 눈발을 온전히 받아 쌓을 것이다.
저녁나절, 마늘 밭을 둘러보았다. 파릇한 싹의 끝이 얼어붙지나 않았을까 자세히 살펴보았지만 그 상태를 제대로 알 수는 없다. 싹의 끝이 노르스름한 빛깔을 띠는 게 걱정스럽다. 부디 잘 견뎌내라고 마음속으로 격려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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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화나무 가지들도 한껏 몸을 움츠렸다. 이내 터질 것만 같았던 꽃망울들은 갑작스런 눈발에 놀란 듯 개화를 멈추고, 물방울을 매단 채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엊그제 남도(南道)로 탐매행(探梅行)을 다녀왔는데도 내손으로 심고 가꾼 매화여서 그런지 더 마음이 쓰인다. 이렇게 젖은 채로 밤을 맞으면 동해(凍害)를 입지나 않을까 염려스럽다. 부처님께서는 무엇이든 간절하게 집착하면 곧 괴로움이 따른다고 경계하셨는데, 부지불식간 지나치게 마음을 준 모양이다. 불전(佛典)에 지나친 집착을 경계하는 가르침이 많은데, 그 중 하나를 소개하면 이렇다.

부처님께서 기원정사에 계실 때 손녀를 잃고 큰 슬픔에 잠긴 위사카라는 여인이 있었다. 슬픔에서 헤어나지 못한 위사카는 결국 기원정사를 찾았다. 이때 부처님께서는 위사카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위사카여, 그대는 사왓티에서 매일 같이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가? 만약 그대가 사왓티에서 죽어가는 모든 사람들을 그대의 손녀로, 혹은 아들로, 손자로 생각한다면 그대는 끊임없이 눈물을 흘리며 슬퍼해야 할 것이며, 따라서 잠시라도 마음은 편안치 않을 것이다. 위사카여, 한 어린아이의 죽음 때문에 건강을 크게 해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무릇 슬픔과 두려움은 지극한 애정 때문에 일어나느니라.”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다음 게송을 읊으셨다.
“귀여워함 때문에 슬픔이 일어나고/ 귀여워함 때문에 두려움이 일어난다./ 귀여워함으로부터 해탈한 사람에게는/ 슬픔이 없거니, 어찌 두려움이 있으랴.”  <법구경 게송 213 위사카 이야기>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지나치게 마음을 쓰지 않기로 마음먹었는데도 자꾸만 눈길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나 보다. 그래서 눈길은 주되, 또 염려는 하되 그것을 마음속에 쌓아 두지는 않기로 마음먹으니, 가슴이 조금은 편해진다. 한 바퀴 집과 밭 주변을 돌아보았다. 한동안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던 시상(詩想)이 뇌리를 스친다.

춘분날
아침창밖이 유난히 밝아서
화들짝 문 여니 찬 기운 와락
부지런도하여라, 밤새
온 세상이 하얘졌다.

어쩌나
겨우내 덮었던 비닐 벗겨주자
기지개 펴며 아우성치던 마늘 싹,
봄비에 흠뻑 젖어
꽃망울 파르르 터트리려던 매화.

혹여
생떼 같은 내 새끼들 얼까,
쌓이는 봄눈이 정겹지만은 않네.
아가들아, 굳건히 버텨다오
햇빛 한 줌이면 사라질 것이니…

입춘 우수 다 지났는데
어째 이리 투정을 부리시나
쉬이 그칠 것 같지가 않네,
스윽 슥~ 봄 오는 소리
산골 정적을 깨뜨리고 있는데.

                 -2018. 3. 21. 춘분날 쓴 졸시 ‘춘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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