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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떠나야 한다면 한 번 잘 살아봤으면

하도겸 | dogyeom.ha@gmail.com | 2016-09-12 (월) 15:42

[하도겸의 맑고 밝은 이야기] 71 – 상실에 대하여Ⅱ



상실에 대하여 5


누군가 떠나간다고 한다.
어쩌면……. 죽는 것이 아니면 괜찮다.
여행을 가든 유학을 가든 해외취업을 하든 상관없다.
죽지 않으면 왠지 안도감이 든다.
그래서 행복하다.


누군가 떠나간다고 하면 붙잡는다.
심지어는 ‘누구랑 가냐?’고 묻는 이도 있다.
하지만 혼자 간다.
심지어 몇 명이 함께 가기도 하지만 언제나 혼자였다.
그래서 혼자 간다고 한다.


때로는 ‘가지마’라고 하는 이도 있다.
참으로 힘들다.


떠나는 이유도 모르면서 자기 옆에 붙잡아 두려고 한다.
하지만 회자정리라는 어려운 말을 할 필요도 없이
우린 언젠가 서로를 떠나야 한다.
다만, 죽음이 아니라면 좋겠다.


떠나가는 이에게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축원한다.
이별이 아쉽지만 죽음이 아니기에 떠나는 용기를 축복한다.
그렇게 난 주변사람들의 ‘lost’를 다행스럽게 여긴다.


하지만 정말 사랑한다면 ‘같이 떠나지 못함’을 한스럽게 생각한다.
정말 함께 하고 싶다면 같이 떠나라!
상대가 받아준다면 말이다.


다만 ‘죽음’만은 억지로 함께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왜냐하면 산다는 것은 묘한 매력이 있기 때문이다.


자살 충동을 극복한 분이 죽기 3달 전에 평생의 반쪽을 만난 것을 본 적이 있기 때문인가?
반쪽 때문이 아니라 그냥 삶은 그런 아이러니한 인연의 엉켜진 실타래다.
남은 삶이 어떨지는 정말 모르는 일이다.


죽을 때까지 한 번 잘 살아봤으면 좋겠다.
어차피 죽으려고 하지 않아도 죽으니 말이다.
우리 함께 이생에서 죽을 때까지 그냥 잘 살아보지 않을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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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 장마철 TV 시청과 손전화 충전을 위해 나마스떼코리아 드림센터로 모여든 네팔 안나푸르나 산골오지 땅띵 마을 사람들(사진=하도겸)

 

 

상실에 대하여 6


언젠가부터 행복이 뭔지 모르고 산다.
나는 행복한가?
가끔 행복했던 기억을 떠 올리려고 하면 전혀 생각이 안 난다.
과거의 사진들을 다 잃어버렸다.
이사 가려고 모아놨는데 유독 그것만 사라졌다.


옛 친구나 선후배들이 보내주는 사진을 본다.
불과 몇 년 전에 서너 명이서 찍은 사진을 보는데도
같이 찍은 사람들이 누군지 전혀 기억이 안 난다.
기억상실증 수준이다.


언젠가부터 기억할 필요가 없는 ‘추억들’이 정리해고되었다.
그런데 기억하고 싶지 않은 ‘memory’들은 여전히 남아 있다.


정말 기억할 필요가 없는 것이 그것임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수행이란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고통들’을 정리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렇게 난 ‘그것들’을 잃어버리거나 잊고 싶다.
당신은 어떠신가요?

 


상실에 대하여 7


난 지독한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다.
잘 살아야 한다.
착하게 살아야 한다.
하지만 난 남에게 피해를 줄 따름이다.
언제나 주변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고통을 준다.


안 주고 싶다고 생각은 하지만
지식의 유희일 따름이다.
언제나 내 주변에서 상처받는 이들을 무감정으로 바라본다.
난 사이보그인가?


가끔 동양화의 여백처럼
내 삶의 ‘여유’를 도입해 본다.
최근 아니 근래는 일부러 유치해보려고 최선을 다한다.
악동일기를 쓸 정도로 고의로 노력한다.


아직은 싫증이 안 났으며,
가끔 내가 사이보그가 아니라는 것도 느끼곤 한다.
참 못됐다.


언젠가 내가 신이 되면 그건 ‘선신’은 아닐 것 같다.
여유를 잃은 내가 찾은 것은 뭘까?
여백은 정말 필요한 걸까?

조금 모자라게 산다고 할 때의 ‘모자람’이야말로 더 가증스러운 이유는 뭘까?
우린 정말 사람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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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마스떼코리아 드림센터에서 만난 네팔 안나푸르나 땅띵 마을의 어린이 (사진=하도겸)

 


상실에 대하여 8


친구는 ‘Honest’란 노래를 좋아한다.
그러나 나는 이 노래를 들으면 기분이 불쾌해진다.
내가 정직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리 정직하다고 떠들고 다녀도
난 무의식으로 엄청 찔린다.
난 전혀 정직하지 않다.


그래서 그 노래를 들으면 마음이 아프다.
듣기 싫다.


하지만 정직하지 않기에 웃으며 듣는다.
정직과 정직하지 못함 사이에서
난 대체 어디에 서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여하튼 난 ‘정직’을 잃어버렸거나 잊은 것은 맞는 듯하다.
언제나 난 정직하고 싶지만
언제나 난 정직하지 못했다.
그런데도 언제나 고통이나 행복을 운운한다.
정직하지도 못하면서 말이다.


창피함을 잃은 나는
정말 잃어서는 안 될 것을
아니 잊어서는 안 될 것을
상실했다.


난 허위 위에 서 있을 따름이다.
미안하다.
우린 정말 언제 참회하고 다신 안 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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