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도겸의 맑고 밝은 이야기] 64 – 불자로서 주변과의 관계성 잊지 말아야
 

작년 5월 초 대지진 즈음에 출국 일자가 겹쳐서 우연히 네팔에서 구호활동을 하고 돌아온 적이 있다. 그 이후에 외국에 나간 적이 없었나 보다. 나갔다고 해도 전혀 기억이 없었고 사실 아무 생각 없이 하루하루 바쁜 일상을 보냈다고 하면 맞을 듯싶다.

며칠 전 점심시간에 핸드폰에 들어온 메일 제목이 유독 눈에 띄었다. 유명 여행사에서 대만 타이베이로 가는 20만 원 정도의 저가항공권을 내놨다는 제목이었다. 앞뒤도 안 재고 그냥 덜컥 예약부터 했다. 결재까지 몇 시간이 있기에, 그 사이에 연가도 냈다. 다행히 결재를 받고 '그런 싼 표'가 나오면 같이 가자고 차 마시며 구두로 약속했던 지인들에게 '카톡'으로 연락했다. 점심시간이 끝나기도 전에 여러 명이 함께 가기로 하고 무사히 결재까지 마쳤다.

한숨을 돌리고 나서 생각해 보니, 여권이 어디 있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귀가해서 집 전체를 샅샅이 흩으며 뒤졌다. 회원증, 카드 또는 열쇠를 넣어 두는 서랍 속에도 없었고 문방구 등을 넣어 두는 사물함에도 없었다. 귀신이 몰래 숨긴 것인지 물건들의 위치가 좀 묘해져서 진법이나 결계에 가려진 것인지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결국 차 마시러 온 도반들의 도움까지 받았으나, 역시였다.

친구들도 돌아간 다음 홀로 가만히 앉아서 명상 비스름히 '관(觀)'을 했다. 문득 헝겊으로 만들어진 주머니가 떠올랐다. 얼마 안 가 서재 책꽂이 맨 위에 있는 주머니를 찾아서 열어보았다. 그 속에는 비닐 주머니에 담긴 수영복과 함께 여권지갑이 묵언수행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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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타이베이 국립고궁박물원 지선원

생각해 보니, 해외에 가서 쓸 물건들을 따로 담아놓을 가방이 없어서 이 주머니에 넣어 둔 것 같다. 왜 찾을 때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최근에 들어와서 이렇게 물건을 오랫동안 찾은 적이 없었는데, 요즘 선업을 쌓지 않은 탓이리라.

국내에서는 뚱뚱한 몸매가 그리 자랑스럽지 않은 이유도 있고, 전혀 낼 수 없는 시간 스케줄 탓에 수영장에 간 기억이 없다. 가끔 단체관광이나 해외여행을 가게 되어 운 좋게 비싼 호텔을 싸게 숙박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 경우를 대비해서 해외에 갈 때는 항상 버릇처럼 '수영복과 물안경'을 챙긴다. 그렇게 챙겨가도, 기껏해야 한 다섯 번 가면 한 번 정도 수영을 했던 것 같다. 그래도 얼마나 수영이 하고 싶었으면 해외여행용 가방 안에는 언제나 터줏대감처럼 수영복이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얼마 전 외화가 필요해서 환전을 하려고 은행에 간 기억이 났다. 여권을 잘 쓰고는 다음 여행 때 잊지 않으려고 수영복을 넣어 놓은 주머니에 일부러 넣었다. 십여 년 전에 여권 없이 공항 갔다고 고생한 기억하기 싫은 상처와 아픔이 있어서 잘 둔다고 둔 것이 사단이 난 것이다. 이런 일들을 까맣게 망각하고 아무 생각 없이 살았기에 여권을 쉽게 찾을 수 없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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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타이베이 국립고궁박물원 지선원에 활짝 핀 꽃들

다시 뒤돌아보면서 잘 회상해보니, '여권'이 어디 있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은 것이 더욱 수상했다. 내가 놓친 것은 뭘까? 내가 이번 '상실'에서 얻어야 할 교훈은 무엇일까? 기억상실이나 치매가 아니라면 지금에서는 뚜렷이 회상되는 그 기억이 왜 그때는 쉽게 나오지 않았을까?

혹시 여권만 생각했기 때문은 아닐까? 여권이 필요한 것은 출국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내게 있어서 해외여행은 '수영'을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외여행이라는 연관어도 잊은 채 오직 여권에만 집착하고 그걸 찾는데 몰두했다.

불자로서 세상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가르침을 듣고 말하고 가르치며 살아왔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것은 그렇게 관계를 지으며 변화한다고 한 것은 그건 오직 내게 말뿐이었나 보다. 머리로만 이해했지, 행동이나 실천이라는 측면에서는 말짱 도루묵, 즉 '꽝'이었다. 여권이라는 '명사' 하나에만 집착한 것이 오늘 참사의 주된 원인이었다.

연관과 관계 지음이라는 '동사'로서 여권을 찾으려고 했다면 정말 짧은 시간에 어디 있는지 알아냈을 것 같다. 이런 일은 나한테만 일어난 것일까? 이 해결방법이 정말 맞은 것일까? 세상에는 뭔가 먼저인지 잘 모르는 일들이 참으로 많이 일어난다. 그러나 그 이유를 곰곰이 들여다보면 의외의 장소에서 이유를 발견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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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타이베이 국립고궁박물원 지선원에 활짝 핀 꽃들

'여권'을 수영복 주머니에 함께 보관한 것까지의 흐름에는 '관계성'이 이해가 된다. 그런데 여권을 찾을 때는 '관계성'을 잊을 채, 애초의 목적인 '해외여행'이라는 단어조차 잊은 채 여권에만 집착했다. 아니 수영복을 먼저 찾기만 했어도 여권은 함께 쉽게 찾았을 것 같다.

남들처럼 여권을 중요한 서류보관함이나 서랍에 두었다면 아무 일도 없었을 것이다. 남들도 하지 않은 고생을 혼자서 사서 하는 나는 오늘도 이렇게 남들 깨친 것을 늦게나마 혼자서 깨치며 행복하기만 하다. 모두가 주변 분들의 은혜가 있었기에 가능하다. 그게 인연이며 그런 인연에 항상 깊이 감사할 따름이다.

나무 마하반야바라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