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도겸
dogyeom.ha@gmail.com 2016-03-15 (화) 14:30[하도겸의 맑고 밝은 이야기] 46 - 타인을 통해 자신을 보며 나아가야
풍수는 풍수학을 공부해서 볼 수 있는 것인가? 책에 적힌 대로 명당은 존재하고 정말 발복해서 부자가 되며 귀인이 되는가? 부자가 되고 귀인이 되는 땅은 존재하는가?
안타깝게도 존재한다. 하지만 어떤 땅도 그냥 은혜를 베풀지는 않는다. 풍수란 바람과 물의 흐름을 읽을 줄 알아야 한다. 바람은 그냥 불어오는 그런 바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시시각각변하는 그런 바람이 전부가 아니다. 물은 흘러내리는 물이 전부가 아니다.
바람은 일정하게 큰 흐름을 유지하는 기둥과 같은 것이다. 물은 용맥, 아니 금맥이라는 표현처럼 땅위나 땅속에 흐르는 기운의 흐름이다. 그건 공부로 아는 것이 아니라 그런 흐름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걸 보지 못한다면 풍수학자일 따름이지, 풍수가는 아니다. 땅속의 지기를 읽지 못하면서 풍수가로 활동하는 것은 연기법, 즉 인과응보라는 인연의 과보를 경시하는 것은 아닐까? 풍수가란 무릇 그냥 바람과 물의 흐름을 볼 줄 알면 된다. 바람이 불어오고 나가는 곳에서 신명나게 춤출 수 있으면 된다.
용맥(龍脈)의 기운이 흘러내리는 작은 시냇물 같은 곳을 찾아서 발을 담그고 물장난을 칠 수 있으면 된다. 어쩌면 그런 순수함이 있어야 자연과 물아일체(物我一體)를 이룰 수 있고 그때서야 비로소 풍수를 제대로 볼 수 있게 되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자연이라는 생명의 피가 흐르고 기운이 풍치는 곳이 혈이고 그 혈은 항상 변화하는 것이다. 변하지 않는 명당이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정말 풍수가라면 풍수학을 알려고 하지 말고 그 시간에 수행을 하면 어떨까?
강원도 평창군 눈꽃마을에서 바라본 하늘
품사론(品詞論)
그냥 소위 수행자들을 바라보면서 느낀 게 있다. 어쭙잖게 몇 단계로 나눠서 분류해 보는 쏠쏠한 재미도 있다. 일부로 굳이 정하려고 한 것은 아니지만, 재미로 해버리고 나니 대충 맞는 것도 있어서 우스꽝스럽지만 참고삼아 한 번 옮겨 본다.
첫째, 굳이 하근기라고 부르기는 뭐하지만, 그 자리에는 부사를 많이 쓰는 이들을 배치해 본다. '그냥', '딱히', '매우' 등등……. 아직 세상을 제대로 분간 못하고 개념도 못 잡는 단계다. 잘 모르기에 말수가 매우 적다. 거꾸로 침묵은 금이라고 해서 실제 계제보다 높은 사람으로 오인받기도 한다.
둘째, 굳이 중근기라고 하는 이들로 명사를 많이 쓰는 사람들이다. 뭐든지 보이는 족족 규정하고 고정화시키며 시비를 분별한다. 몇 개 단어를 안다고 범주를 이야기하고 세계를 다 아는 양 떠들어 된다. 입만 보살이어서 소위 깨쳤다고 떠드는 이들이 이에 속한다. 말이 많은 대신 겸손하지 못해 오히려 하근기로 오인 받기도 한다.
셋째, 굳이 상근기라고 할 수 있는데, 동사를 많이 쓰며, 가끔 운동성, 방향성 등의 흐름이나 경향을 말하곤 하는 이들이다. 세상이 변화하고 스스로도 변화하기에 항상 가능성이라는 여지를 두고 말하고 행동한다. 명실상부한 수행자로 적어도 한 소식은 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수행이 다 끝난 것은 아닌데 본인은 그것 모르는 경향이 있다.
넷째, 품사를 여의고 손짓, 눈과 표정으로 나아가 마음으로 말하는 사람들이다. 소위 이심전심이나 영화미소를 활용하는 단계로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의미'를 전달한다. 어쩌면 매우 무례하게 느낄 수 있는 부분도 있으며, 수행과는 거리가 먼 평범한 사람들로 오인받기도 한다. 하지만 말과 행동으로 구속하지 못하는 자유인이어서 매우 유치하다.
강원도 평창군 눈꽃마을 부근 산록에서 찾은 하트형의 돌멩이.
제자라는 이름의 도반(1) : 교학상장
지적 받을 때는 매우 황당하다. 때로는 주변의 사람들도 많이 황당해 한다. 하지만, 그건 자만심의 발로일 따름이다. 참된 지적이라면 그 점이나 부분, 면 등을 고치면 된다. 그렇게 참회하고 개행(改行)하면 참으로 많은 것이 달라진다. 선행을 통해 선업을 쌓고 좋은 과보도 덤으로 얻게 된다. 그렇게 점점 맑고 밝은 곳을 향해 나아간다.
우린 그렇게 교육을 받았고 반대로 시키기도 해야 한다. 때로는 그 역할을 거꾸로 하면서 교학상장을 한다. 세월이 지나 어느덧 지적을 많이 받았던 이들이 성장하는 것을 본다. 하지만 그들만 성장한 것이 아니다. 나도 따라서 더 성장하게 된다. 그렇게 난 그들을 통해서 나를 본다. 그리고 배운다. 또 나아간다. 나무시아본사 석가모니불
제자라는 이름의 도반(2) : 제자라고 쓰고 도반이라고 읽는다
한 제자가 있다. 가만히 두면 방황하다가 한 생을 보낼 것이다. 아직은 함량 미달이지만 잘만 키우면 재목이 될 것 같다. 잘 가르쳐서 세상을 밝게 할 동량들로 만들고 싶다. 그래서 데려와 가르치며 제자로 삼는다. 하지만 그게 쉽지 않다. 딱 거기까지만 가능하다. 더 가르칠 능력이 없기에 결국 제자들을 도반으로 만든다. 그래서 다른 스승이나 모임에 소개하기도 한다. 그 후는 우리 책임은 작아져만 가고 오직 제자라는 이름의 도반이 할 나름이다.
잘 가르치지도 못하면서 제자가 찾아오게 하게끔 잘 홍보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결국 스스로도 제자도 도는 얻지 못하고 돈을 뺏고 빼앗으면서 한 생을 소비해 버린다. 제자는 가게를 찾아오는 손님이나 거래처가 아니다. 그래서 수행자들은 제자로 데려와서 도반으로 만들어야 한다. 언젠가 같이 깨쳐서 '도'도 얻고 그 길에서 함께 행복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어차피 외롭고 쓸쓸한 세상인데 그래도 싫은 표정을 하지 않고 '도'를 얘기할 수 있는 도반이 있으니 그게 행복이 아닐까? 조문도석사가의(朝聞道夕死可矣: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와 유붕이 자원방래면 불역낙호아(有朋이 自遠方來면 不亦樂乎아: 멀리서 친구가 찾아오면 또한 기쁘지 않은가!)라고 말씀하신 공자님 뜻이 여기에 있는 듯하다. 사실 우린 제자가 필요한 게 아니라 도반이 필요하다. 아니 스승이면 더 좋다. 하지만 빈 수레들은 어쭙잖은 이야기를 전하기 위해 제자만 애써 구하려고 한다. 안타까운 일일 따름이다. 그래서 수행자는 제자라고 쓰고 도반이라고 읽어야 한다. 나무시아본사 석가모니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