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 | 2015-10-23 (금) 21:21
어느 유명작가가 있습니다. 질문자가 “어느 경전을 가장 좋아 합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작가는 ‘반야심경’이라고 했습니다. 그 장면을 보고 약간 실망했습니다. 절에서 태어났고 불교적 분위기에서 자랐고 불교를 종교로 하는 대하소설 작가의 소의경전이라 하는 것이 누구나 알고 있는 예불문이라는 것에 실망한 것 입니다.
반야심경을 제대로 이해하면 ‘아제 아제 바라아제’로 시작 되는 주문을 낭송할 때 감격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대부분 불자들은 뜻도 모른 채 ‘색즉시공 공즉시색’ 하는 정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의미도 모른 채 “나모라 다라다나~”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절에 십 년, 이십 년, 평생을 다녀도 ‘아상(我相)’만 높아진다는 말입니다. 금강경에서 그렇게 무아상을 이야기하였건만 정반대로 간다면 불교공부 헛공부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최근 뉴스에서 김영사 전(前) 사장과 소유주간에 볼썽사나운 다툼 이야기를 접하면서 그런 심증을 더 갖게 만듭니다.
절에 오래 다닐수록 아상만 높아지고 자아의식만 높아진다면 가르침과는 정반대의 길입니다. 이는 길을 모르기 때문 입니다. 그렇다면 불자들은 어떤 길로 가야 할까요? 두 말 할 필요도 없이 ‘팔정도’ 입니다. 하지만 우리나라 불자들은 팔정도의 의미를 제대로 모릅니다. 아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설령 알았다고 하더라도 실천 할 수 있는 사람은 또 얼마나 될까요?
동국대 캠퍼스의 중심 '팔정도'. 사진=동국대홈페이지에에서 캡쳐
부처님은 팔정도를 설하였습니다. 처음 설법도 팔정도였고 마지막 설법도 팔정도였습니다. 초전법륜경(S56.11)과 대반열반경(D16)을 말합니다. 유명작가의 입에서 이런 경을 기대 했던 것 입니다.
부처님은 마지막 열반에 들 때 팔정도 외에 다른 길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팔정도가 없으면 불교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팔정도가 사라진 한국불교에서 과연 불교가 있다고 볼 수 있을까요?
한국불교에서 팔정도를 접할 수 없습니다. 부처님이 그렇게 중요성을 강조 했건만 팔정도의 가르침대로 실천하는 사람들은 극히 드물다고 봅니다. 반야심경을 외고 금강경을 독송해도 팔정도가 들어 있는 초전법륜경을 낭송하는 불자들은 지극히 드물다고 봅니다. 그런 초전법륜경의 의미를 제대로 알고 낭송한다면 반야심경 못지않은 희열과 환희를 느낄 수 있는데 과연 얼마나 될까요?
팔장도에 정어(正語)가 있습니다. 바른 언어 사용에 대한 것 입니다. 그 중에 ‘잡담(samphappalāpā)을 하지 말라’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가르침 이외에는 정치이야기나 가십 등 쓸 데 없는 이야기를 하지 말라는 것 입니다. 그런 말을 하려거든 차라리 침묵하는 것이 더 나을 것 입니다. 정어에서 또 하나의 예를 든다면 ‘이간질(pisunāya)’ 입니다.
이간질은 상대방을 무너뜨리기 위한 중상모략, 권모술수, 마타도어 등을 말 합니다. 세치 혀를 이용하여 마치 도끼를 든 것처럼 상대방을 난자 하는 비열한 행위를 말합니다. 이간질의 폐해는 심각합니다. 특히 조직이나 단체에서는 치명적 입니다. 분열적으로 작용하여 깨지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 입니다.
불자들이 흔히 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저 사람 있어서 절에 안갑니다.”라는 말입니다. 이는 정어가 실천 되지 않았기 때문이라 봅니다. 담마(法) 이외에는 침묵해야 하나 잡담으로 생긴 결과입니다. 잡담을 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뒷이야기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없는 곳에서 남의 말을 하는 것을 말 합니다. 그것이 바로 이간질 입니다.
거짓말하지 않는 것만이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정어에서는 거짓말뿐만 아니라 잡담과 이간질도 금지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이간질을 할까요? 이는 ‘폭력’과 관계가 있습니다. 상대방을 깎아 내리려 한다거나 뒷말 하는 것은 마음속에 폭력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팔정도 정사유에서 ‘폭력을 여읜 사유(avihiṃsāsaṅkappo)’를 말씀하셨습니다.
폭력을 여읜 사유에 대하여 ‘해코지 않는 사유’라고도 합니다. 상대방에 대하여 해치려는 의도가 아예 일어나지 않게 하려는 생각을 말 합니다. 폭력을 여읜 사유를 하면 불살생뿐만 아니라 비폭력, 불상해도 자연스럽게 실천됩니다.
불자들은 법회 할 때마다 반야심경을 낭송합니다. 신심 있는 불자들은 조석으로 “나모라 다라다나...”하며 주문을 욉니다. 어떤 이는 매일 금강경을 독송합니다. 그럼에도 아상만 높아지고 자의식만 강화 된다면 헛공부를 한 것이 됩니다. 더구나 뒤에서 남 말이나 하며 이간질한다면 더 이상 불자라 볼 수 없습니다.
팔정도의 가르침이 실종된 한국불교에서 불자들의 행태를 보면 일반사람들의 도덕적 평균치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절에 오래 다니면 다닐수록 아상과 자의식만 더욱 더 심화됩니다. 가장 심각한 것은 이간질입니다. 뒤에서 남 말하는 것 입니다. 조직이나 단체가 깨지는 주요 요인이 됩니다.
할 말이 있을 때는 당사자에게 말해야 합니다. 뒤에서 남 말하는 것은 매우 비열한 행위입니다. 마치 등 뒤에서 칼을 꼽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여럿이 있을 때는 그 사람의 장점에 대해서 칭찬해야 합니다.
뒤에서 험담하거나 칭찬하거나 모두 당사자의 귀에 들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사실을 모른다면 그는 매우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현명한자는 뒤에서 남말 하지 않습니다. 없는 곳에서는 칭찬하고 있는 곳에서는 지적해 줍니다.
“뒤에서 남 말하는 당신, 정말로 비열하고 어리석은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