林端窈渺路逶遲  숲속은 그윽하고 길은 아득한데
境僻寧敎俗士知  땅이 구석지니 어찌 속세 선비가 알겠나?
唯有雪衣松上鶴  오직 하얀 옷을 입은 소나무 위의 학만이
見公初到結廬時  그대가 처음 와서 이 절 짓는 걸 보았겠구나.
-김극기(金克己)의 <미륵암에서 노스님에게 드리다<贈彌勒住老)>

詭狀苦難名  형상이 기이하여 이름 짓기 정녕 어려운데
登臨萬象平  올라와 바라보니 삼라만상이 눈 아래일세.
石形裁錦出  돌 모양은 비단을 말라 빚은 듯하고
峰勢琢圭成  산 형세는 옥을 쪼아 이룬 것 같구나.
勝踐屛塵迹  좋은 땅에 밟으니 먼지 세상의 자취가 끊기고
幽棲添道情  그윽이 사니 득도의 정이 더해가네.
何當抛世網  어떻게 해야 세상의 그물을 던져버리고
扶坐學無生  가부좌로 무생의 이치를 배울 수 있으려나.
-김극기의 <규봉사에서(圭峯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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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극기(?-?)는 고려 명종(明宗, 1170-1197 재위) 연간에 활동한 시인이다. 본관은 광주(廣州)고, 호는 노봉(老峰)이다. 일찍이 과거에 급제했지만 관직에 오르지 못해 전국을 떠돌다가 무신의 난이 일어나고 명종이 등극한 뒤에야 벼슬길에 올랐다. 용만(龍灣, 지금의 義州)의 좌장(佐將)을 거쳐 한림(翰林)을 지냈는데, 문장과 외교 능력을 인정받아 금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하였다.

그는 뛰어난 시인이자 문장가로, 젊은 시절 불우하게 떠돌면서 당시 핍박받는 농민들의 모습을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었다. 그의 시에는 이런 농민들의 삶에 대한 심리적 유대감이 잘 드러나 있을 뿐만 아니라 무신의 난 이후 수탈에 허덕이던 농민들의 고통을 시를 통해 보여주기도 했다. 그런 면에서 그는 양심적인 지식인이었다고 평할 수 있겠다.

그는 평생 대단히 많은 시문을 남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려 말엽에 간행된 <삼한시구감(三韓詩龜鑑)>에 따르면 <김거사집(金居士集)>으로 불린 그의 문집은 그 권수가 무려 135권 또는 150권이나 되었다고 적혀 있다. 당시 문인들이 그의 시를 두고 “문장의 표현이 맑고 드넓으며 말이 많아질수록 내용도 풍부해진다.”고 평했는데, 시인으로서 뛰어난 묘사력을 갖추었을 뿐더러 웅장하고 활달한 풍모가 시문에 넘쳤던 것을 짐작하게 한다. 그러나 그의 작품들은 불우한 그의 삶을 닮아 모두 없어지고 지금은 <동문선(東文選)>이나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일부 전하고 있다.

문집 이름에 ‘거사’란 말이 들어간 것으로도 알 수 있듯이 현전하는 그의 시에도 불교와 관련된 작품이 적지 않다. 워낙 방랑의 시인이라 자연 전국에 산재한 사찰 출입이 잦았을 것이고, 그곳에서 빈번하게 승려들과 교분을 나눴을 것이다. 이런 경험들이 그대로 그의 시에 녹아들었다. 그 가운데 두 편의 시를 감상해보자.

첫 번째 7언절구는 시인의 재치와 해학을 엿볼 수 있는 경쾌한 작품이다. 미륵암은 깊은 산속 구석진 곳에 자리한 작은 암자였을 듯하다. 궁벽한 곳에 있는 암자기에 떠돌이 나그네에게는 더 고마운 존재였을 것이다. 산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발견한 작은 암자. 허기진 배와 노곤한 몸을 잠시 쉬어가게 하는 넉넉한 인심까지 있으니, 시인으로서는 그저 고마울 수밖에 없다. 만수무강하시면서 큰 절 지으란 덕담은 물욕에 절은 인간에게나 하는 말이다. 이 암자 엮을 때 학이 보았으리란 말에는 노스님을 신선의 경지로 띄워 올리는 격찬과 존경의 신심이 배여 있다. 진정한 구도자의 모습을 시인은 노스님의 행각에서 읽고 있는 것이다.

이어지는 5언율시는 전남 화순군 무등산 산기슭에 있는 사찰을 노래한 것이다. 설명에 따르면 은신대(隱身臺)라는 큰 바위가 있는데, 도선(道詵) 선사가 이곳에 앉아서 송광산(松廣山)의 산세를 보고 이 절을 지었다고 한다. 시인 역시 그 은신대에 올라 감회를 시로 남긴 듯하다. 높은 바위 위에서 세간을 내려다보니 그야말로 개미들이 개미굴을 오가는 것처럼 부산한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자신 역시 그 개미굴에서 아옹다옹하면 살았다고 생각하니 민망함으로 얼굴이 붉어진다. 그저 가부좌를 틀고 열반의 경지에 드는 수행의 길로 가고 싶은 마음이 불끈 솟아오른다. 그림자 같은 ‘나’를 벗어던짐으로서 진정한 ‘나’를 찾을 수 있는 길을 시인은 산사에 올라 찾게 된 것이다. 시를 읽게 되면 읽는 이의 마음도 덩달아 시원해진다. 이렇게 산간에 숨은 절간을 찾아 진아(眞我)의 실체를 성찰하는 것도 좋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