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어느 금요일 오후였다. 수석 졸업 예정자인 고교 졸업반 리앤(가명)이 나타나서 시간 괜찮으냐고 물었다. 의외였다. 그녀는 소파에 앉자마자 눈물을 쏟았다. 평소에 리앤은 학업성적도 뛰어날 뿐 아니라 자타가 공인하는 학교의 리더 학생회장이기도 했다. 그녀는 큰 걱정거리가 있었으나, 그 동안 아무에게도 이야기 할 수 없었다고 했다. 리앤을 괴롭히는 문제는 오래 전부터 가끔씩 손목에 자해하는 환각증세에 시달려왔고, 그런 악몽도 꾼다는 것이었다. 정신 건강의 문제가 기록에 남으면 장래 진로에 영향을 미칠까 염려되어서 도움을 청할 생각은 전혀 할 수 없었다. 심지어 부모님께도 말할 수 없었다.

리앤의 엄마는 열아홉 살에 남미에서 단신으로 미국으로 이민 왔다. 어렵게 미 육군에 입대해 직업 군인의 길에 들어섰다. 그녀는 군대에서는 진급을 계속 해온 유능한 군인이지만, 집에서는 늘 “Nobody likes me!” (아무도 날 좋아하지 않아!)라고 힘들어 하며 리앤에게 걱정거리를 털어놓곤 했다.

다행히 새 아빠는 엄마보다 말이 잘 통했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그녀는 누구한테도 기대지 않았으며 사람들한테 늘 완벽한 모습을 보이려 노력했다. 특히 매사에 늘 근심걱정 투성이인 엄마를 위해서 리앤은 항상 최고가 되려고 노력했고 항상 훌륭한 어른 같은 아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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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피에타> 포스터.

처음으로 자신의 비밀을 이야기하면서 그녀는 매우 혼란스러워 하였다. 몇 년째 주기적으로 계속되었다는 환각과 악몽이 아무래도 좀 걱정스러워 신경정신과로 의뢰하고 싶었다. 졸업반이니 당연히 더욱 걱정거리가 많을 테니 상담치료만으로 충분한 도움이 될 지 염려스러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리앤은 부모님께 이야기하는 것도 신경정신과 진료도 절대로 받을 수 없다고 완강히 고개를 저었다. 그나마 희망적인 것은 바쁜 엄마를 대신하여 함께 살며 키워주신 할머니한테는 마음을 조금 터놓을 수도 있을 것 같다고 하였다. 그녀는 할 수 있는 만큼 하겠다는 것에 동의하고 며칠 후에 다시 방문을 약속하였다.

다음 주에 나타난 리앤은 미국에 사는 친아빠 이야기를 하였다.  3년 가까이 못 봤는데 봄방학 때 다녀올까 한다고 했다. 리앤의 부모는 그녀가 세 살 때 이혼하였다. 그 후 전 세계로 전근 다니는 직업군인인 엄마와 사느라 리앤은 친아빠를 자주 못 보고 자랐다. 그녀의 기억에 아빠와 있을 때는 아무 걱정도 안 하고 편하게 지냈다고 한다. 친아빠는 느긋한 성격이었고 자주 못 보는 딸이 함께 있을 때 행복해 했을 것이다.

2주 후에 다시 리앤이 왔다. 아빠와 새엄마와 있는 동안에는 환각 증세도 악몽도 없었다. 리앤은 그냥 아빠 집에 눌러앉고 싶었다. 그러나 졸업을 두 달 남기고 전학하는 것은 무모하다는 아빠의 충고에 따라 할 수 없이 돌아 왔다. 리앤은 또 한 번 눈물을 쏟으며 엄마 밑에서 자라는 것이 그간 얼마나 힘겨웠는지를 말했다. 엄마는 끊임없이 리앤에게 자신의 불안함과 불행함을 이야기하면서 위로 받기를 원했다. 그런 엄마가 가여워서 리앤은 어린 나이에도 엄마보다 더 의연한 모습으로 엄마 몫까지 하려 했던 듯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리앤은 엄마가 원망스러웠다. 자신의 삶에 대한 근심거리를 감당하지 못하는 엄마를 바라보며 어린 딸 역시 늘 불안했다.

그 동안은 쉽게 상처받는 엄마가 걱정되어 마음속에 자라난 엄마를 향한 분노조차 확실히 자각하지 못했다. 몇 년 만에 아빠한테 가고 나서야 자신의 마음이 잘 보였다. 리앤은 펑펑 울면서, “I am so angry at my mom. I hate her!” (이제 엄마가 너무 너무 미워요! 화가 나요!) 리앤은 그 이 후로 몇 번 더 찾아왔다. 올 때마다 리앤은 울었다. 그 많은 눈물이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녀는 그렇게 청소년기와 작별하였다. 그녀는 많은 청소년들이 몇 년에 걸려서 치르는 ‘질풍노도’의 성장통을 두 달여 만에 속성으로 치렀다.

리앤이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 그녀의 엄마를 한번 만나게 되었다. 리앤의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엄마는 아무래도 불안증이나 우울증이 심각해 도움이 필요할 듯 했다. 가능하다면 돕고 싶다며 리앤을 설득했다. 직업 군인으로서 성공한 리앤 엄마 자신도 유년기 때 친엄마(할머니)한테 받은 상처와 불안감을 이야기했다 스스로의 엄마에 대한 문제도 여전히 해결이 안 되고 있었다. 게다가 딸이 자신의 빈자리를 채워줬단 할머니를 엄마로 느끼고 자라왔다는 것을 괴로워했다. 리앤의 엄마는 딸이 할머니를 더 따른다는 것에 질투와 원망을 했다. 얼마 후 리앤 엄마는 결국 승진을 위한 트레이닝 받으러 리앤의 졸업식도 못보고 먼저 미국으로 떠났다.  
 
정신분석학자 Margaret Mahler의 ‘object constancy’(대상항상성)은 어린아이가 만 두 살과 세 살 사이에 엄마의 상을 내재화한다는 것이 요점이다. 그때 사랑해 주는 엄마와 야단치는 엄마 또는 그 중간까지 하나로 통틀은 인상이 아이의 마음속에 자리 잡는다는 것이다. 다행스럽게 이 과정이 성공적인 아이는 세 가지 특성을 보인다. 첫째는, “나는 엄마(세상)가 좋아, 엄마도 나를 좋아해.” 둘째는, “엄마(세상)는 나를 예뻐할 때도 야단칠 때도 있지만 여전히 좋은 존재야.” 셋째는, “엄마가 내 곁에 있어서 무슨 일이 생겨도 다 괜찮아지게 돼”이다.

리앤에게 엄마는 부정적인 사람으로 자리 잡았다. 대상항상성이 긍정적인 이들은 삶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문제들에 크게 흔들리거나 좌절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대개의 문제들은 관계의 어려움에서 발생되지만[리앤의 경우 엄마] 긍정적인 관계를[아빠] 통해서 해결된다. 조금이라도 긍정적인 관계의 상이 내면에 자리 잡으면 세상과 인간관계에 대한 믿음이 생긴다. 그럴 때 자신 또한 진실한 마음으로 사람과 세상과 소통을 시작하게 된다. 아니 이와 같이 소통할 수 있게 도와야 한다. 그보다는 엄마는 딸의 인생을 위해서라도 딸을 사랑하고 자신을 좋아하게 노력해야 할 것이다.

나무마하반야바라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