빤딧짜스님
ashinpandicca@hanmail.com 2015-04-24 (금) 18:0210. 위빳사나 지혜 계발 과정
우리는 위빳사나 지혜를 얻기 위해 수행을 하지만 수행을 시작하자마자 지혜가 생기지는 않습니다. 사념처 즉 우리의 몸·느낌·마음·법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것이 위빳사나 수행 방법이라는 것은 이미 앞에서 살펴본 바 그대로입니다. 대상을 미리 정해 놓고 그것을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인식되는 것이면 어떤 것이든 그것을 관찰 대상으로 하여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것이 위빳사나입니다.
몸·느낌·마음·법에 대한 인식이 다 있을 수 있지만 한 순간에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뿐, 동시에 두 가지를 인식하지 않습니다. 호흡 관찰을 예로 들어 설명하겠습니다.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 따뜻함이나 차가움을 안다면 지·수·화·풍 중에서 물질의 화대의 특성을 아는 것입니다. 숨을 들이쉴 때 공기가 콧속 어딘가를 가볍게 때리듯이 들어가고, 내쉴 때도 마찬가지로 때리는 듯한 느낌으로 나갈 때 공기의 흐름, 공기의 움직임을 알았다면 그것은 호흡의 특성 중 풍대를 아는 것입니다. 또 호흡에서 딱딱함을 느낄 수 있고 부드러움도 느낄 수 있고 무거움을 느낄 수 있고 가벼움도 느낄 수 있으면 그것은 지대입니다. 호흡에서 수대는 알기가 쉽지 않지만 나머지 지·화·풍대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이때 지대·화대·풍대를 골고루 모두 알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인식되는 대로만 알면 됩니다.
호흡은 사념처로 말하면 몸(身) 즉 물질에 해당됩니다. 호흡하는 중에 와 닿는 감촉을 느낄 수 있는 감각기관이 물질이고, 감각기관에 와 닿는 감촉도 물질입니다. 몸에 대상이 닿는 것을 아는 신식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코와 공기가 있고, 코에 공기가 닿는 부분에서 그 닿음을 인식하는 마음이 있는데 그 인식하는 마음을 신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정리하면 감각기관에 와 닿는 물질이 있고, 그것을 감지하는 감각기관이 있고, 그것을 인식하려는 마음, 대상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대상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이 사띠이고, 사띠를 계속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 노력과 사띠가 있어서 집중이 가능해집니다. 그래서 들숨과 날숨을 계속 관찰할 수 있게 됩니다. 즉 사념처로 팔정도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집에 있어도 호흡을 하는데 굳이 수행처에 와서 들숨 날숨을 애써서 관찰할 필요가 있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냥 생각 없이 호흡을 하는 것과 호흡에 집중하여 그것을 관찰하는 것은 다릅니다. 집에서 일상생활을 다 하면서 호흡을 놓치지 않고 관찰하기는 매우 어렵다는 것을 수행의 경험으로 알 것입니다. 사실은 단 몇 분 동안 잊지 않고 호흡을 챙기는 것조차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호흡의 들숨 날숨 과정을 놓치지 않고 안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다른 것을 모두 내려놓고 오직 호흡만 관찰하다 보면 물질적 대상인 호흡이 있고, 그것을 아는 마음이 있다는 것, 오직 이 두 가지밖에 다른 것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물질과 정신 이 두 가지밖에 없음을 아는 것이 위빳사나 지혜의 첫 단계입니다. 대상이 있으면 우리 마음이 그 대상으로 기우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소리가 나면 마음이 소리 쪽으로 가는 것 같은 느낌, 마음에 힘이 있을 때는 소리가 마음속으로 들어오거나 혹은 당겨지는 것 같은 느낌이 있습니다. 이것이 정신(나마)의 의미입니다. 마음과 마음부수 두 가지를 합쳐서 나마, 정신이라고 말합니다. 물질(루빠)은 계속 변하는 것이 특징이어서 더우면 변하고 추워도 변하고 조건 따라 계속 빠르게 분명히 변합니다. 우리의 몸도 마찬가지로 금방 춥다가 더워지고, 좋은 느낌이었다가도 곧바로 고통스러운 느낌으로 끊임없이 변하고 바뀝니다. 이렇게 변하고 있는 것이 물질과 정신입니다. 또 뭔가를 알아차리는 인식 과정을 정신이라고 하고, 그런 인식 과정이 없는 것은 물질이라고 합니다.
‘나마루빠 냐나’라고 하는 위빳사나 지혜의 첫 단계는 간단히 말하면 물질과 정신을 나눠서 완벽하게 아는 지혜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호흡을 물질과 정신으로 나누어서 분명하게 알 수 있는가. 그것을 위해서는 아침에 일어날 때부터 오로지 호흡에 집중해야 합니다. 아침에 잠에서 깰 때 깨어나는 마음이 있습니다. 미세하긴 하지만 뭔가를 약하게 인식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이면 그런 미세한 마음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밤에 잠자리에 드는 순간까지 관찰하면서 잠드는 사람은 아침에 자고 있던 마음에서 깨어나는 순간 어떤 구멍에서 뭔가가 빠져나오는 것같이 깨어나는 마음의 과정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그것이 물질적으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머리가 조금 맑구나, 어질어질하구나.’라고 알기도 하고, 옆에서 나는 소리나 그 순간 일어나는 생각 하나하나를 인식하기도 합니다. ‘지금 몇 시인가? 일어나야지.’ 이런 생각들, 정신적인 것들이 보이기 시작할 수도 있습니다. 정신적인 면을 보는 것과 물질적인 것을 보는 것은 다릅니다. 정신을 볼 때 매 순간을 보기 때문에 급할 때 급한 마음, 화날 때 화나는 마음, 욕심날 때 욕심나는 마음, 질투 시기하면 질투 시기하는 마음 등 여러 가지를 그때그때 일어나는 대로 끊임없이 보면서 마음이 여러 가지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마음에 89가지가 있고, 깨닫지 못한 사람, 선정 없는 사람, 범부에게는 거의 45가지 마음이 끊임없이 일어나 사라지고 있습니다. 깨달은 자가 아니면 89가지 마음을 다 볼 수는 없고 일반적으로 45가지 정도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마음을 본다는 것의 의미는 이런 것입니다. 즉 매 순간 일어나고 사라지는 마음 상태의 있는 그대로를 보면서 지금 마음이 행복하면 행복한 것을 보고, 기쁘면 기쁜 것을 보고, 신심이 떨어지면 신심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지치면 지치는 것을 보고, 지루하면 지루한 것을 보고, 신나면 신나는 것을 보고……. 이렇게 일어나는 대로 그 마음을 반복해서 보다 보면 45가지 마음을 그대로 볼 수 있게 됩니다. 반복해서 관찰한다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수행 중에 한 번 관찰하고 두 번 세 번 관찰해 나가면, 관찰하는 대상들을 모두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볼 수 있는 물질에는 28가지가 있습니다. 지·수·화·풍을 비롯하여 28가지가 있는데 그 중 위빳사나 수행의 대상으로 볼 수 있는 것은 18가지밖에 없습니다. 그 18가지 물질을 거듭 관찰하다 보면 차차 익숙해집니다. 볼 때마다 봄, 봄, 봄을 관찰하면 보는 형상을 잡을 수 있는 눈의 감성물질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보는 것을 자세히 분석해 보면 어느 때는 마음이 형상으로 가고 어느 때는 마음이 눈의 감성물질로 가고, 또 어느 때는 안식으로 마음이 갑니다. 그러므로 관찰한다는 것도 한 가지가 아니라 그 세 가지 중 어느 하나일 수 있는데 수행할 때마다 그때그때 다릅니다. 어쨌든 보는 것을 관찰하면 틀림없이 눈의 감성물질·형상·안식 그 세 가지를 관찰하게 되는 것입니다. 들음을 관찰하면 귀의 감성물질·소리·이식, 냄새를 관찰하면 코의 감성물질·냄새·비식, 맛을 관찰하면 맛과 혀의 감성물질·설식, 몸을 관찰하면 몸의 감촉·몸의 감성물질·신식 이런 식으로 말이지요. 사람들을 반복해서 보다 보면 그들을 차차 구별할 수 있게 되듯이 18가지 물질과 45가지 마음, 그리고 마음부수 52가지를 알 수 있게 됩니다. 탐·진·치·자만·질투·시기 등 안 좋은 것, 무탐·무진·무치·신심·노력·지혜·사띠·연민·자애 등 좋은 것들이 다 마음부수입니다. 그런 마음부수들도 그때그때 수행 중에 보게 됩니다. 기쁠 때 기쁨을 보면 희열이 있고, 급한 마음을 보면서 어떻게 되고 싶다는 열의도 보게 되고, 이렇게 하나하나를 반복해서 보면 마음부수 52가지를 계속 보게 됩니다. 그 마음부수의 명칭은 모를 수 있지만 그렇다고 그 마음이나 마음부수를 못 보는 것은 아닙니다.
위빳사나 수행을 해서 지혜를 깨달았다면 누구나 이렇게 물질 정신을 구별해서 아는 지혜의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이런 과정 없이 깨달은 사람은 없습니다. 물질 정신을 확실히 다르게 아는 상태, 그런 과정이 꼭 있어야 합니다. 수행 중의 그런 상태를 수행자마다 다르게 여러 가지로 표현할 수는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앉아 있는데 또 다른 제가 있어서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보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물질과 정신을 나누어서 보고 있는 것을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이 몸이 나다.’라는 생각이 이미 굳어져 있고, 또 ‘무언가를 아는 것이 나다. 내가 안다.’라는 생각이 이미 습이 되어 있기 때문에 아는 것을 나라고 착각합니다. 그런 상태이기 때문에 알고 있는 정신 쪽과 대상인 물질을 각각의 사람, 즉 두 사람 이미지로 떠올리면서 한 사람인 내가 다른 한 사람인 나를 보고 있다고 여기는 것이지만 사실은 물질과 정신을 구분해서 보는 지혜가 생겼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원래 물질과 정신은 다른 것이어서 그 둘이 섞이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미지로 보는 습이 있어서 뭐든지 이미지로 봅니다. 예를 들면 처음에 스님이 북치는 것을 어딘가에서 봤다면 이 모습이 기억에 남게 되어 스님의 이미지와 북소리를 함께 머릿속에 저장해 놓습니다. 그렇게 되면 나중에 그 북소리와 비슷한 소리가 나면 스님과 북치는 모습을 동시에 떠올리는 것입니다. 즉 소리만 들어도 이미지를 같이 떠올리게 되는 것이 습관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북소리를 듣고 그 소리가 나는 곳을 직접 가보니 머릿속에 있던 스님이 아니라 전혀 다른 사람이 북을 치고 있습니다. 머릿속에 저장되어 있는 모습과 사실이 일치하지 않는 것입니다.
수행 중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수행자가 모든 대상을 있는 그대로 관찰한다고 하지만 ‘몸은 이런 거고 마음은 이렇다.’라고 이미 갖고 있는 상이 있기 때문에 사실을 사실대로 본다는 것이 생각대로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정신 쪽도 나라는 한 몸을 가지고, 물질 쪽도 나라는 한 몸을 가지면서 부풂 꺼짐이 일어나고 있는 몸이 하나이고, 그것을 관찰하고 있는 쪽도 또 다른 하나로 두 사람이 있다고 말하는 것인데, 이런 경우가 거의 물질 정신이 분리되는 느낌을 받을 때 하는 말입니다. 수행자가 수행을 직접 실천하여 체험한 것을 언어로 표현할 때는 서로 많이 다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배를 보며 부풂 꺼짐을 관찰할 때 “벽에 진흙 반죽을 바르는 것처럼, 아주 말랑말랑한 뭔가를 하나씩하나씩 던져서 벽에 딱딱 붙이는 느낌이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던졌다’는 것이 마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이 대상을 인식하는 것을 진흙이 던져지는 것처럼 이미지로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또 가서 붙는 자리, 벽 같은 자리는 물질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표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처음에는 부풂 꺼짐 관찰이 되게 어려웠는데 지금은 물건이 벽에 가서 딱딱 붙는 것처럼 분명하게 느껴집니다.” 그것은 수행자가 물질과 정신을 분리해서 알고 있는 것입니다. 호흡을 관찰하면서 물질과 정신을 각각으로 인식하는 지혜 과정은 똑같은데 사람마다 표현은 다양합니다. 수행 중의 체험을 말로 옮길 때 아주 완벽하게 옮길 수 있는 사람은 부처님밖에 없습니다. 경전이라는 것이 부처님께서 수행을 실천하면서 체험한 것을 확실하게 기록한 것입니다. 그래서 경전을 무시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만 수행 과정을 확실하고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다들 자기 나름대로 말합니다. 부처님이 열반하시고 나서 많은 스님이 자기들의 체험을 자기 나름대로 써서 많은 책들을 남겼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제대로 깨달은 사람, 아라한이라면 모르겠지만 진실로 깨닫지 못했으면서 어느 정도 아는 것을 가지고 계속 책을 쓰는 사람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많이 오염시켰습니다. 그 사람의 의도는 좋았을 수 있지만 결과적으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오염시킨 것입니다. 그러므로 수행자들은 가능한 한 부처님의 경전을 바탕으로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법문을 하거나 책을 쓸 때에도 항상 부처님의 가르침에 근거해야 합니다. ‘내가 지금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 경전의 어느 부분을 근거로 하고 있는가’를 반드시 따져보고 확인해야 합니다. 또한 경전의 바탕이 없이 자신의 체험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말을 들을 때도 조심해야 합니다. 개개인의 체험이라는 것은 아주 미묘합니다. 그런 것들을 각자 자기 마음대로 말해 버리면 오해가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