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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개념이 뭐냐?” “붓다로 사는 이가 붓다”

이학종 기자 | urubella@naver.com | 2015-02-12 (목) 21:01

‘붓다로 살자’라는 명칭은 적절한 것인가? 불교적으로 타당한 명칭인가?


‘사실상’ 조계종 자성과쇄신결사추진본부장 도법 스님이 이끌고 있는 ‘붓다로 살자’라는 ‘신행’ 운동이 ‘그 명칭부터 불교 교의에 맞지 않는다’는 허정스님의 불교신문 비판기고를 계기로 공개토론의 장에 올랐다. 


‘붓다로살자’는 2월 월례모임을 ‘붓다로 살자, 타당한 주장인가?’라는 주제로 ‘야단법석’의 형식으로 열었다. 야단법석의 형식이라는 것은 토론이 열린 조계종 극락전 2층 설법전에 도착해서 알게 되었지만, 당초 이날 행사는 도법 스님과 허정 스님의 대담이 논쟁 형식으로 진행되는 것으로 알려져 관심 있는 이들은 눈길을 모았다.


그러나 막상 아단법석에 동참해보니, 허정 스님과 도법 스님의 '붓다로 살자'라는 명칭 및 운동에 대한 논쟁적 대담이 아니라 붓다로살자 회원들과 허정 스님의 문답(논쟁) 형식으로 전개됐다. 삼귀의 대신 서원문으로 시작된 야단법석은 경전적 근거가 없거나 빈약한 지리한 주의주장의 반복으로 길게 이어졌다. 도법 스님과의 1:1 토론인 줄 알고 서산 천장암에서 올라온 허정 스님은 예상치 못한 행사 진행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핸드폰 문자로 주최측에 항의를 하며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출하기도 했다. 그러나 납득하기 어려운 진행은 1시간 가까이 진행됐다. 취재를 나왔던 언론사의 기자들 대부분이 중간에 자리를 떴다. 답답한 진행에 일부 스님들이 ‘붓다로 살자’라는 명칭에 대한 도법 스님의 입장을 듣고 싶다고 지적했지만, 대중토론을 더 해야 한다는 주최측의 입장은 이상할 정도로 완강했다.

 
아무튼 대중토론에 앞서 허정 스님이 불교신문에 기고했던 글을 중심으로 제기한 ‘붓다로살자’가 왜 문제인가의 발언 요지는 ‘붓다로살자’라는 명칭에서 붓다에 대한 정의를 분명하게 하라는 것이었다. 도법 스님이 사용하는 붓다의 의미가 속담에서 나타나는 착함, 양심에서부터 이타심, 깨어있음, 일념 등과 4향4과라고 부르는 성인의 지위까지 포함하고 또한 계정혜 삼학을 모두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런 광범위한 붓다의 의미는 정리가 필요하다는 지적이었다.


허정 스님은 ‘붓다로살자’가 화엄경의 사상에서 따온 것으로 보이는데, 화엄경의 가르침은 깨달은 자의 입장에서 설한 것으로, 이것을 일반인들에게 적용해 당장 붓다로살자고 하는 것이 가능한 것인지, 과연 화엄이 이런 것인지 의문이 든다고 지적했다..


스님은 이어 “붓다로 살자고는 하는데 구체적으로 붓다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제시하거나 정의한 것을 본적이 없다”며. “설령 붓다로 산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붓다의 삶인지, 말인지, 행동인지 하는 것을 누가 규정하는가?”라고 물었다.


“가장 소중한 것이 생명이고, 생명이기 때문에 붓다라는 논리를 펴고 있는데, 부처님께서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고 지적한 허정 스님은 “불교에서 생명의 가치는 너 자신을 위해 남을 해치지 말라고 가르치신 것인데, 도법 스님의 생명이 소중하기 때문에 네가 부처야 한다고 하는 말은 경전 어디서도 본적이 없다”고 지적했다. 스님은 “이런 주장은 불교가 삶을 찬탄하고 죽음을 미워하는 삶을 찬탄하는 세속적 종교로 오해하게 만든다”고 꼬집었다. .


허정 스님은 이어 “(도법 스님은) 자유의지를 부처라고 했지만, 자유의지는 좋은 나쁜 의지 양쪽이 있기 때문에, 나쁜 부처도 있을 수 있으므로 자유의지가 부처라는 것은 맞지 않다”며 “아마도 불성에 대한 믿음 때문에 붓다로 살자는 운동이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일체중생실유중생을 믿음으로써 이것이 가능하기 때문에 불성을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으로 분리될 위험이 있으며, 불교는 믿음 등의 전제조건 없이 진리를 발견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허정 스님은 “불교가 탁월한 점은 어떤 믿음이나 전제조건 없이 진리를 발견하는 것을 가르치기 때문”이라며 “불교는 인간에게 생겨나는 괴로움이 무엇이고 괴로움의 원인이 무엇이고, 괴로움을 소멸시키는 길은 무엇인지를 현실적으로 진단하고 처방하는 즉문즉설의 종교이므로 일반인들에게 붓다로 살자는 용어를 들이대는 것은 전제 조건 없는 가르침을 협소한 종파의 울타리에 가두는 우를 범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허정 스님은 “불성, 본래부처에 대한 믿음을 주장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와서 보라’고 가르친 부처님의 말씀을 거스르는 것이고, 또한 비불자에게 ‘붓다로살자’는 ‘예수를 믿으라’는 말처럼 무례하게 받아들여질 수가 있다”며 “전제조건을 달고 믿음을 강요하는 종교는 사람들에게 공포를 조장하거나 그 공포로 거래를 하게 된다”고 우려를 표명했다.


허정 스님은 ‘결론 및 요구사항’으로, ‘붓다로살자’는 명칭을 특정종교의 울타리를 벗어나는 용어로, ‘믿음의 불교보다는 와서 보라는 이해의 불교’로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촉구했다. 또 “전제조건 없이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구체적인 가르침(사성제), 깨달음에 이르는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 불교”라고 거듭 환기시켰다.


이어 허정스님은 '붓다로살자' 회원들의 공격성 질문에 대한 답변을 통해 자신의 입장을 거듭 분명히 했다.


‘붓다로살자는 믿음을 강조한 것이 아니고 살겠다는 의지이며 의지와 믿음은 다르다’는 반론에 대해 허정 스님은 “지금 당장 붓다로 살자라는 할 때 그 마음은 어떤 마음인가? 어떤 말이고 행동이고 생각인가를 묻는 것이다. 착함, 어짐, 이런 말이 과연 붓다를 말하는 것인지 말해 보라”며 “붓다로 살자에서의 붓다의 의미는 모든 단계를 다 포함하는 것 같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붓다가 뭔지? 그것을 말해달라는 것이다. 단어에는 의미와 뜻이 있다. 그것을 말해 달라는 것”이라고 답답해 했다.


‘교학체계 안에서 붓다로살자의 의미는 남방불교 전통에서 보면 팔정도를 늘 깨어서 실천하는 것, 대승에서는 육바라밀을 실천하는 것을 말하는 것 같다’는 견해에 대해 허정 스님은 “팔정도도 번뇌가 있는 상태에서의 팔정도와, 번뇌가 끊어진 상태에서의 팔정도 두 가지가 있다”며 “팔정도는 유루 무루로 나뉘지만, 붓다는 유루와 무루로 나눠지지 않는다. 그래서 문제다. 나눠지지 않으므로 붓다로 살자는 잘못된 것이다. 유루의 붓다는 없다. 그래서 붓다로 살자가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냥 ‘팔정도를 실천하자’, ‘보살로 살자’, ‘가르침대로 살자’고 하면 교리적으로 문제가 없으니 그렇게 하라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2600년 불교사에서 붓다로 살자라는 말이 없었고, 붓다로 살자는 것은 붓다로 살지 않고 있다는 것을 내포하는 말이며, 따라서 유루의 붓다를 인정하는 것인데, 굳이 붓다처럼 살아가자고 말하면 되는 것인데, 왜 붓다를 이상하게 말하느냐”고 반문했다.


‘부처의 말을 하고, 행동을 하고 마음을 쓰는 분이 부처님이고, 붓다로 살자는 붓다가 되어서 하자는 것이 아니라 그 행동을 하는 것으로 붓다로 살자는 것 같다’는 한 스님의 발언에 대해서도 허정 스님은 “그런데 누가 그것을 규정하느냐? 누가 붓다의 말과 생각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가? 부처의 말과 행동을 하면 그 사람이 붓다이라고 하는데, 그 종류 중에서 이런 것이 붓다의 말이며, 생각이며, 행동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군가?”라고 되물었다. 스님은 이어 “나는 오히려 붓다로 살자가 사람을 우울하게 하고 괴롭게 하고 주눅 들게 한다고 본다. 늘 선택해야 하고, 고민하게 하는 삶을 줄 것이다. 내가 규정하는 붓다, 내가 규정하는 붓다의 말과 행동과 생각을 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인데, 그때그때 규정할 수 있는 사람만이 붓다로 살 수 있을 것이다. ‘와서 보라’는 것은, 붓다를 보라는 것이 아니고 법을 보라는 것”이라고 답변했다.

 


도법스님과 허정스님의 '불다로살자' 명칭 논쟁이 지난 2월 10일 열띤 분위속에서 열렸다.

지리한 문답이 이어지면서 분위기는 ‘도법 스님이 답하라’는 쪽으로 흘렀다. 사회자가 도법 스님의 견해를 밝혀달라고 요청하자 도법 스님이 ‘자신이 생각하는 붓다로 살자에 대해 답변을 시작했다. 


도법 스님은 “이 주제는 밤새도 결론이 안 날 것이고, 끊임없이 다듬어가야 할 것”이라며 “(지금까지 나왔던 이야기들이) 다 일리가 있고 정당성이 있는 이야기들”이라며 말문을 열었다.


“개인적 경험으로는 부처님 가르침대로 살자, 부처되기 위해 살자. 그런 것을 50년을 했다. 부처님 가르침대로 살자 해보니까 그것도 굉장히 어려웠다. 부처님으로 살자, 보살로 살자 등등도 다 쉽지 않다. 붓다로 살자도 쉽지 않을 것”이라고 전제한 도법 스님은 “허정 스님의 글을 읽고 (오늘) 발표를 듣는 속에서 중요한 개념을 발견했다. 대화의 종교라는 점, 은혜를 갚는 길이라는 내용, 또 대승불교가 초기불교와 다르지 않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그래서 반갑고 고맙고 좋고 그렇다. 이 자리에 매우 큰 가치를 부여한다”고 말했다. 이어 도법 스님은 '붓다로살자'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저는 삶을 이야기하고 싶은 사람이지 불교를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왜 불교는 삶을 이야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부처라는 말, 보살이라는 말은 석가모니와 미륵에게만 적용된다. 이것이 대승불교에 오면 일반화된다. 대승불교는 끊임없이 특수한 것을 대중화 보편화시키는 과정의 연속이었다고 본다. 붓다로살자도 그런 일환이고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개념이 도출된 것이 '붓다로살자'라고 생각한다.”


도법 스님은 허정 스님이 대중토론에서 강조한 붓다로 살자에서 사용하는 ‘붓다’의 개념을 정의해보라는 요구에 대해서도 입장을 밝혔다.
 
“부처님은 마치 애써서 노력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인 것처럼 표현하고 있는데,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부처님도 애써서 살아가신 분이라고 본다. 물론 심리상태라든가 하는 것에는 애쓰지 않으실 수 있다고 본다. 대반열반경에 보면 나이가 들어서 너무 힘들어 하는 모습이 나온다. (아난에게) 너무 힘들어 못가겠다. 좀 쉬었다 가자과 하는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그래서 나는 우리 관념 속에 있는 붓다의 모습이 실화인지, 관념인지를 검증해봐야 한다고 본다. 우리 머릿속에 있는 붓다에 관한 상, 즉 '붓다상'을 전제한다면 이 논쟁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굳이 개념으로 설명하면 좋겠다고 허정스님이 주문했으니까 개념으로 정리하면 '깨달음을 실천하는 사람'이라고 본다. 어느 누구든 신구의 삼업으로, 삶으로 나타나지 않는 한, 그 어떤 것도 공허하다고 본다. 지금 삶으로 나타나지 않는 한 그것이 오매불여든, 돈오돈수든, 깨달음이든 그것은 사람의 일이 아니거나 세상의 일이 아닌거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굳이 정리한다면 초기불교적으로 정의한다면 깨달음을 실천하는 사람, 대승불교적으로 정리한다면 본래면목대로(존재의 실상대로 ) 사는 사람(분)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고, 다른 표현으로 한다면 공, 무상, 무원의 행, 바라밀행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저런 것들을 다 녹여내서 나온 개념이 붓다로살자이다.“
 
도법 스님은 이어 “삶과 수행이 통일될 수 있는 실천이 무엇일까? 그런 불교가 무엇일까? 이것을 종합적으로 검토했을 때, 붓다로살자라는 표현을 한 것이다. 물론 이것이 절대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절대적이라면 불교가 아니다. 지금 존재 자체가 원만구족한 붓다이기 때문에 더 이상 다른 것을 구하는 마음 없이 본래붓다에 대한 이해와 확신을 갖게 되면 그런 마음을 가질 필요가 없게 되고 , 설사 생기더라도 얼른 거둬들여서 구하는 마음이 없게 되는 것이다. (초기불교와 마찬가지로) 대승불교도 이해, 앎의 불교라고 본다. 대승불교를 믿음의 불교로 규정한다면 이것은 대단히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붓다로살자도 누구나 이해하고 공감하고 확신해서 살아가자는 것이다. 개인적 경험으로는 붓다로살자라는 훨씬 경쾌하게 할 수 있는 불교라고 생각한다”고 ‘붓다로 살자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했다.

 

이에 대한 허정 스님의 답변을 시작으로 두 스님 사이에 매우 치열한 문답이 오갔다.
 
허정 스님
“(도법 스님의 말씀을 들었는데도) 여전히 답답하다. 실제적으로는 처음부터 묻고 도법스님이 답하는 것으로 대중토론을 했으면 좋았을텐데 지금도 답답하다. 도법 스님께서 생명이 소중하기 때문에 부처다라고 한 데 대해서 어떤 답변을 하셨는지 잘 모르겠다.”.

 

도법 스님
“중론에 언어로 표현되는 것은 다 가명이라고 했다. 부처님의 팔만사천 가르침을 응병여약이라고 하지 않는가. 어떤 것만이 약이라고 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모든 언어는 사실 가명이다. 생명, 부처라는 표현도 사실은 가명이다. 왜 가명이 필요한가. 언어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것이 사람들에게 잘 이해될까, 하는 것 때문에 가명이 필요한 것이다. 사람들에게 붓다임을 알리기 위해 여러 가지 가명을 찾는 거다. 거기에 생명, 살림 등의 가명이 필요한 것이다. 이런 용어를 대여섯 가지 사용했는데, 필요하다면 100가지도 넘을 것이다.”

 

허정 스님
“도법 스님께서 좋은 말을 찾아봤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그것은 부처님을 제대로 설명할 수는 없다는 것과 같다. 깨달음을 전제하지 않고 누가 붓다를 칭할 수 있는가. 취지도 너무 좋고 지표도 너무 좋지만, 보다 바른 언어를 쓰라는 것이다. 생명이 부처라든가, 자유의지이기 때문에 부처라든가 하는 것은 바른 언어가 아니라고 지적하는 것이다. 붓다의 바른 의미는 경전에서 찾는 것이 가장 좋다고 본다. 그러나 오늘 와보니까 자신의 생각만 말하는 분이 너무 많은 것 같다. 붓다로 살자고 하자면 경전에 나오는 것을 잘 찾아서 해야 하는데 계속 자기 생각만 나열하는데 (이래서 되겠는가). 그런 수준의 말은 불교를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통용될 지 모르겠으나, 불교를 제대로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는다.”.

 

도법 스님
“사실 붓다로살자 발원문에 나와 있는 것은 화엄경의 내용을 표현한 것이다. 그것을 많이, 현대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사람이 부처라는 화엄의 가르침이다. 본래부처를 부정한다면 몰라도, 본래부처를 인정한다면 부처임을 알았으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런 문제다”.

 

허정 스님
“신기하고 신기하다는 탄성을 지은 사람은 이미 끝난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경전에 쓰여 있으니까 그렇게 해야해’ 하는 사람은 답이 없는 것이다. (나는) 화엄경을 봐도 별로 감동이 없다. 화엄경의 신기하고 신기하다는 가르침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부처가 되고자 하는 것이다. 본래부처가 왜 본래부처라고 썼는가 하면, 원리와 가능성이라는 의미다. 너 앞으로 부처 될 수 있어? 어떻게? 고타마 붓다는 35세에 깨달았다. 그것으로 가능성을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 그후 불성, 여래장이라는 말은 말로 설명할 수 있다. 일체중생 실유불성을 여기서 이해하는 사람 있나? 저는 (예전에) 사실 이것(일체중생 실유불성)을 자부심을 갖고 믿었다. 그렇지만 내가 불성을 보려고 하니까 보이지 않더라. 다만 믿음만 남았을 뿐. 나중에는 믿음도 흔들렸지만.. 일체중생 실유불성의 불성을 누가 본 사람이 있는가? 그래서 불성을 근거로 붓다로 살자는 것은 믿음을 근거로 하는 운동이라는 것이다.”

 

도법 스님
“그것은 불성에 대한 허정스님의 의견일 뿐이다”

 

허정 스님
“그럼 스님의 불성관을 말해 달라.”

 

도법 스님
“부처는 어떻게 생겼는가? 어떻게 사는가? 라는 선사들의 물음이 있다. 부처는 어떻게 생겼는가?라는 질문에 선사는 이렇게 답한다.  정천각지 안횡비하(頂天脚地 眼橫鼻下) 정수리는 하늘을 향하고, 다리는 땅을 딛고 서있으며, 눈은 옆으로 찢어졌고, 코는 아래로 향한다는 뜻이다. 그야말로 인간의 모습을 말한 것이다. 또 그렇게 깨달은 자, 즉 부처는 어떻게 살아가는가?라는 질문에는 반래개구 수래합안(飯來開 睡來合眼)이라고 답한다. 밥이 오면 입을 열고, 잠이 오면 눈을 감는다는 것이다. 깨달은 도인의 어떻게 사는가? 이 모양이나 살림살이는 누구를 닮았는가?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이다.”

 

허정 스님
“그런데 저는 그렇게 말하는 선사를 믿지 않는다.”

 

도법 스님
“깨달은 사람은 우리와 똑같은데, 어디에서 나와 깨달은 사람이 다른 것일까? 공 무상 무원이다. 구함이 없으면 모두 편하고 구함이 있으면 괴롭다. 중생이란 존재자체가 붓다임을 모르고 사는 사람, 존재자체가 붓다임을 알고 붓다로 사는 것이 붓다인 것이다. 붓다로 살자는 명칭이 몇 사람의 아이디어로 나온 것이 아니고 무수한 논의와 고민 끝에 나온 것이다.”

 

허정 스님
“도법스님은 부처냐 중생이냐?”

 

도법 스님
“본래부처인데,, 당연히 부처다.”

 

허정 스님
“나(저)는 중생이다.”

 

도법 스님
“수행의 의미는 깨달음을 추구하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완성을 추구하는 것이 수행이다.”

 

허정 스님
“깨달음의 실천은 누구의 깨달음이고 어떤 깨달음인가?”

 

도법 스님
“완성을 추구하는 것이 수행이라고 한다. 틀리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만이 수행은 아니다. 보살을 깨달음을 실천하는 중생이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깨달음을 실천하는 사람이 부처라고 생각한다. 깨달음을 실천하는 것이 수행이라고 할 때, 여래 십호 중에 명행족이 있는데 앎과 실천이 일치되거나 아는 대로 실천하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연기법을 가장 잘 생동감 있게 표현한 것을 본적이 있는데, 바로 장익순 선생의 ”미처 몰랐내 그대가 나였다는 것을‘ 이라는 책이다. 바로 이것을 안다면 삶이 달라진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것을 연기법에 대한 이해, 터득이라고 본다. 경전적으로는 동체대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것을 명과 행이 구족하다, 명행족이라는 표현이 가능하다. 수행이라는 것은 본래부처에 대한 자각과 확신이고, 이것에 토대해서 실천을 하는데 현실적으로 우리는 중생이라는 인식과 믿음이라는 오랜 습성이 있기 때문에 거기에 맞게 살아가는 것에는 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붓다로 살자에는 대단한 장점이 있다고 본다. 즉 구원의 마음에 사로잡히지 않는 것에 효과가 있다. 본래 나는 간화선주의자다. 지금도 간화선을 한다. 그러나 일반적인 간화선과 다르다. 본래부처에 대한 이해와 확신 아래 하니까 구하는 마음이 없다. 이렇게 간화선 하니까 부처님의 본의를 실재 속에서 실천하는데 붓다로 살자는 것이 대단히 좋다는 것이다“.

 

허정 스님
“도법 스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수행과 깨달음과 붓다가 동일하다는 것으로 들려 혼선이 빚어지고 있다. ‘깨달음의 실천’이라는 표현을 붓다를 설명할 때도, 수행을 설명할 때도 똑같이 적용하고 있다. 그렇다면 깨달음의 실천이 수행도 되고 붓다도 되는데 도법스님이 말하는 그 깨달음의 실천은 뭔가?”

 

뒤늦게 시작된  허정 스님과 도법 스님의 1:1 논쟁은 객석의 한 스님이 질문을 하면서 흐지부지 마무리됐다. 허정 스님은 보다 충분한 토론과 논쟁이 되지 못한 데 대한 아쉬움을 감추지 않았다. 도법 스님은 ‘오늘과 같은 자리가 불교계 도처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면 한국불교에는 희망이 살아나고 미래가 밝다는 말과 함께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하신 스님들을 모두 붓다로살자의 지도법사를 모시자”며 큰 박수를 유도했다. 박수가 끝나기가 무섭게 허정 스님이 말했다.


“저는 사양하겠습니다.” 

 

 

*논쟁(대담) 내용은 최대한 발언 내용의 요지를 있는 그대로 기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습니만 잘못 기록된 부분도 있을 수 있음을 밝힙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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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깨어 있는 붓다' 2015-02-13 05:2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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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정 스님
“도법스님은 부처냐 중생이냐?”
도법 스님
“본래부처인데,, 당연히 부처다.”
허정 스님
“나(저)는 중생이다.”

큰일 났다.
도법이 한국 불교 다 망쳐놓겠다.

자 자신의 미혹함을 깨치지 못하고
지 좋고 미혹한 중생들이 좋아할 말들을 멋대로 만들어
불교라는 배를 산으로 몰고 간다.

지가 부처라고 ?
부처님 앞에 사죄의 3 만 배를 올려라.

붓다가 될 수 있는 불성이 중생에게 내제되어 있음을
중생들에게 알려준 화엄경의 말을
지 좋을 대로 해석하여
지가 부처라고 ?

정각을 이루어야 내제되어 있는 불성이 발현하여 붓다가 됨을 모른단 말인가.
불쌍하고 어리석은 미혹한 중생 도법이 부처라고 ?

전 세계에 한국 불교 망신시키려는 도법.

한국의 종정, 선지식, 큰스님들은
저 도법의 망 말에 어찌 고요한가.
다들 주무시는가.

아침은 언제 오는가.
그대로 2015-02-23 12:3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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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이상도 합니다.
불교를 잘 알지 못하지만 위의 두 스님께서 하신 말씀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결국 언어(개념) 때문에 벌어진 틈이겠는데, 붓다를 일체 법을 스스로 깨달아 아신 분으로
하자면 중생을 부처라 하는 것이 말도 안 되겠지만, 사성제를 아는 자를 붓다라고 한다면
이 중생 또한 붓다인데, 두 스님께서 그것을 잘 아실 텐데도 왜 이렇게 하고 계신지요?
네에 2015-02-28 08:54:50
답변 삭제  
붓다로 살자 라던지 하는걸 만들면 안됩니다.

그것은 '창조경제' '섬김정치'라는 표어들과 같은것입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입니까.

구체적 내용은 없으며 그 집단들의 기분과 감정만을 전하는것입니다.
질문하면 대답은 꾸역꾸역 내놓지만 이치에 맞지 않는 답이 나오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왜 저런 끝없는 표어들을 만들어낼까요.
그것을 생각해 보십시요.

왜 만들어 낼까요.

방안에서 문을 잠구고 내가 왜 만들어 냈을까
내가 왜 만들어낸 저것에 동조하고 반대하는 사람에게는 분노하는것일까
라고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변성환 2024-03-26 17:42:47
답변 삭제  
아래 둘은 어느 지위에서 닦아 갈 것이냐 하는 인승(因乘)과 과승(果乘)의 차이일 뿐, 둘 다 부처님의 선교방편이다.

 - 도법 스님 “본래부처인데,, 당연히 부처다.”
 - 허정 스님 “나(저)는 중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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