빤딧짜스님
ashinpandicca@hanmail.com 2015-01-21 (수) 15:08그러면 여기에서 12연기를 조금 더 확대해서 이해해 보겠습니다. 12연기를 윤회라고 볼 때 그 연기의 가장 근본적인 뿌리가 무엇인지를 볼까요? 12연기를 표로 그린 앞 그림의 가운데에 있는 무명, 갈애가 가장 큰 뿌리입니다. 이 무명, 갈애라는 아주 큰 뿌리로 인해서 12연기가 이렇게 계속 돌고 있는 것입니다. 또 그 두 가지 뿌리에 덧붙여, 윤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 굴레를 이해해야 합니다. 그 세 가지가 번뇌의 굴레, 업의 굴레, 과보의 굴레입니다. 이 12연기를 보면 뿌리는 두 가지, 굴레가 세 가지예요. 번뇌의 굴레로 업의 굴레가 생기고, 업의 굴레로 과보의 굴레가 생깁니다.
굴레 세 가지를 좀 더 자세히 보겠습니다. 그림의 1번을 보면, 맨 바깥 라인에 세 가지 번뇌의 굴레가 있습니다. 위에서 아래로, 화살표를 거꾸로 타고 내려오면 무명이고 끝까지 내려가면 갈애와 취착, 업의 굴레에서 따라 내려오면 행, 12연기의 구조 그 선의 끝에까지 가면 생성업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집착, 갈애에서 시작해서 그 화살이 무명을 통과하며 가니까 무명, 갈애, 집착이 한 덩어리가 되어 이 세 가지가 번뇌의 굴레입니다. 그러니 무명도 번뇌이고, 갈애, 집착도 번뇌인 것이지요. 그 번뇌의 굴레를 통해서 업의 굴레가 생깁니다. 그림을 보면 옆에 행이 보이지요? 행의 밑으로 내려가면 생성업, 그것은 행과 똑같습니다. 업이 행이고 행이 업이어서 이 두 가지가 업의 굴레입니다. 생성업에서 올라가니까 행, 행을 통해서 바깥으로 화살표가 가니까 두 가지 업의 굴레가 됩니다. 순서대로 보면 세 가지 번뇌의 굴레로 인해서 두 가지 업의 굴레가 생긴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업이 생긴다는 것은 번뇌가 있기 때문이라고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번뇌가 없으면 업이 생기지 않는 것입니다.
부처님과 아라한은 업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부처님과 아라한은 번뇌가 없기 때문입니다. 무명, 어리석음도 없고 갈애, 집착도 없습니다. 갈애, 집착, 무명이 없으니 업이 안 생기고, 업이 없으니 과보도 생길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과 아라한들이 윤회가 끝났다는 것은 곧 과보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번뇌가 분명히 있기 때문에 업을 짓게 되고, 업이 있기 때문에 분명히 과보를 받게 될 것입니다. 과보가 무엇인가요? 느낌, 접촉, 육입, 명색, 식 이런 것들이 과보입니다. 그래서 번뇌가 있고 업이 있다면 틀림없이 식, 태어나야 합니다. 19가지 재생연결식 중에 어떤 식을 갖고 태어나는지는 모르겠지만 반드시 다시 태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식으로 인해서 명색, 명색으로 인해서 육입, 그 육입으로 인해서 촉, 다시 촉으로 인해서 수, 바로 여기까지가 과보의 굴레입니다.
그러면 1번과 2번만 봐도 세 가지 굴레에 의한 윤회가 분명한데 3번과 4번이 왜 또 필요한가. 1번 안에 세 가지 번뇌의 굴레와 두 가지 업의 굴레가 있습니다. 그 번뇌의 굴레로 인해서 업을 짓고, 그 업에 따른 것이 과보의 굴레입니다. 두 번째가 과보의 굴레인데 현재의 삶은 그 과보의 굴레에 의한 것입니다. 그런데 왜 세 번째를 다시 말하는가. 지금 우리가 태어난 것은 과보의 굴레이지만, 태어난 이후 우리는 다시 선 혹은 악의 업을 짓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번뇌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3번과 1번은 업이라는 면에서 일치합니다. 다만 1번은 과거의 업이고 3번은 현재의 업이라는 것이 다릅니다. 예를 들어 지금 저는 번뇌를 가진 채 강의를 하면서 선업을 짓고 있는 것이고 여러분들 또한 번뇌를 가진 상태에서 강의를 들으며 선업을 짓고 있는 것입니다. 선업이긴 하지만 어쨌든 업을 짓고 있는 것이고 이것이 생성업입니다. 이 생성업에 따라 미래의 우리가 또 태어나고, 또 태어나고 합니다. 그러면 4번과 2번이 똑같지요. 2번은 과거 업에 의한 현재의 과보이고, 4번은 현재의 업에 의한 미래의 과보라는 것이 다를 뿐입니다. 1번이 과거 번뇌의 굴레이고 업의 굴레, 3번이 현재 번뇌의 굴레이며 업의 굴레라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번뇌의 굴레, 업의 굴레, 과보의 굴레 세 가지를 우리가 빙빙 돌고 도는 것을 윤회라고 하는 것입니다.
‘식’이란 한 사람을 예로 들자면 이번 생에 사람으로 태어난 의식을 말합니다. 그리고 지금 그 사람이 갖고 있는 몸과 마음을 명색이라고 합니다. 육입은 눈, 귀, 코, 혀, 몸, 마음을 말하고 접촉은 눈과 형상, 귀와 소리, 코와 냄새, 혀와 맛, 몸과 감촉, 마음과 여러 가지 대상을 촉하는 것을 말하고, 그 촉할 때마다 생기는 느낌, 즉 형상의 느낌, 소리의 느낌, 냄새나 향기의 느낌, 맛의 느낌, 몸의 감촉의 느낌, 마음에 여러 가지로 일어나는 느낌에 따라서 갈애로 넘어갑니다.
갈애로 넘어가면 그것에 의해 다시 집착으로 넘어가고 그것이 번뇌의 굴레입니다. 갈애와 집착이 번뇌의 굴레입니다. 지금 우리가 어떤 대상을 보면서 ‘아, 보는 것이 좋다.’ 하면 느낌(受)에서 갈애로 넘어가고 있는 것이고 이것이 더 강해지면 집착이 되는데 그게 바로 번뇌의 굴레인 것입니다. 번뇌의 굴레에서 생성업이 생깁니다. 즉 좋은 것을 또 보려고 하는 의도, ‛또 보고 싶다.’ 하는 말, 또 보려고 하는 행동, 그런 모든 것이 몸으로 지은 업, 입으로 지은 업, 마음으로 지은 업이 되어 우리는 세 가지 업을 짓게 됩니다. ‘보는 것이 싫다, 느낌이 안 좋다’ 이렇게 보기를 싫어하여 피하고자 하는 것도 갈애입니다. ‘어떻게 하면 볼 수 있을까?’ 하는 것과 ‘그 보기 싫은 형상을 어떻게 없애야 될까?’ 하는 말, 행동, 생각 모두가 번뇌에 따른 업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잠재적 상태의 번뇌든 일어나는 번뇌 또는 이미 일어나서 파괴한 번뇌든 모두 번뇌인 것은 분명한데 이것은 아라한이 되어야만 소멸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번뇌가 있는 한 계속 다음 생을 받아야만 합니다. 태어난다는 것은 죽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탄생과 죽음은 똑같은 것의 양면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이렇게 윤회를 12연기로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면 12연기와 위빳사나의 관련성은 어떻게 되는가를 알아볼 차례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볼 때 오직 볼 뿐임을 깨닫게 하고자 위빳사나를 가르치셨습니다. 위빳사나는 육입을 끊임없이 관찰하는 것입니다. 보고 있을 때 봄, 봄, 봄을 관찰해야 하는데 관찰하지 않으면 느낌(受)에서 갈애로 바뀝니다. 그런데 놓치지 않고 그 느낌을 관찰하는 사람은 수에서 갈애로 넘어가지 않고 지혜로 넘어갑니다. 위빳사나가 하는 일이 바로 그것입니다. 느낌에서 지혜로 가면 위빳사나이고, 느낌에서 갈애로 넘어가면 빙빙 도는 윤회입니다. 그래서 도표에 보면 화살표들이 밖으로 향해 있습니다. 그것이 곧 윤회에서 벗어나는 길입니다. 느낌과 갈애 사이에서 빠져나가면 지혜이고 빠져나가지 못하면 느낌에서 갈애로 넘어가 다시 한 바퀴 돌고, 그 다음에도 빠져나가지 못하면 또 돌고, 그렇게 계속 빙빙 돕니다. 윤회는 돌고 도는 것이어서 뒤로 갈 수가 없습니다. 똑같은 길을 계속 빙빙 돌고 싶지 않으면 갈애가 아닌 지혜를 선택해야 하는데 그 방법이 바로 위빳사나라는 말입니다.
느낌의 순간 거기에서 무상을 보든가, 무아를 보든가, 고를 보든가 하면 갈애로 떨어지지 않습니다. 무상을 아는 사람은 욕심을 내지 않습니다. 무상을 알고, 그 상태에서 대상을 보니 어떤 욕심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계속 사라지고 있는 것을 보고 있는데 욕심이 생길 리 없고 오히려 무서움이 일어납니다. 가지고 싶은 것이 아니라 놓아버리고 싶은 마음이 계속 생깁니다. 탐이 아니고 불탐, 무탐입니다. 고(苦)를 보고 있으면서 고를 가지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어떤 대상이 고라는 것을 아는 순간 바로 욕심이 떨어져 나갑니다. 위빳사나 수행으로 무상·고·무아를 아는 순간 갈애, 집착이 떨어져 나갑니다.
나(我)라고 착각하면 틀림없이 집착이 생깁니다. 수행을 하지 않으면 항상 나, 내 것을 고집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실 내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나’가 없는데 ‘내 것’이 어디 있느냐 이런 말입니다. 따라서 무아를 아는 순간 욕심이 생기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무상·고·무아를 제대로 아는 것은 곧 욕심을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인간의 심리가 그렇습니다. 좋지 않다는 것을 알면 그 순간 그것을 놓아버리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좋은 것을 좋아하게 되어 있는 법입니다.
대상을 볼 때마다 오직 볼 뿐, 그렇게 계속 관찰만 합니다. 소리를 들을 때마다 들음, 들음, 들음을 관찰하는 이유도 이와 같습니다. 소리를 들을 때 좋다, 좋지 않다 하는 느낌 자체는 어쩔 수 없습니다. 듣기 싫은 소리를 들으면서 좋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지요. 부처님도 느낌이 일어나는 것은 피할 수 없습니다. 부처님일지라도 시끄러운 소리를 들으면서 좋다고 느끼지는 않는 것이지요. 다만 거기에서 멈추는 것입니다. ‘좋다, 안 좋다’는 이미 선과 악 중 하나로 넘어선 것입니다.
여기에서 느낌(受)은 ‘좋다, 아니다’가 아니라 성품 그대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맛을 예로 들면 단맛, 쓴맛 등은 맛의 성품입니다. 고추를 생각해 볼까요. 아주 매운 고추가 있는데 매운 고추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싫어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좋아하는 사람 때문에 그 고추가 매운 것이 아니고, 싫어하는 사람 때문에 매운 것도 아니며 그 고추 자체의 맛이 매운 것, 이것이 수受의 의미입니다. 이때 매운 것을 좋아하는 것도 욕심이고 싫어하는 것도 욕심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것이 없지만 원래의 맛은 그대로 아십니다. 소리를 들을 때 그 소리가 주는 느낌은 부처님도 우리와 똑같이 받아들이십니다. 매우 시끄러운 소리가 있으면 부처님께도 안 좋은 느낌이 그대로 전달됩니다. 그 시끄러운 소리로 인한 느낌 자체는 당연히 좋은 느낌이나 즐거운 느낌이 아니라 괴로운 느낌인데, 부처님께서는 그 소리로 인해 고통을 받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음식을 먹는 것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음식이 갖고 있는 그대로의 맛을 부처님도 아시지만 그 맛에 따라 좋아함 또는 싫어함이 생기지 않을 뿐입니다. 우리는 맛이 안 좋다면 싫어함이 생길 수 있고, 맛이 좋으면 계속 원하는 마음이 생길 수 있습니다. 대부분이 그렇게 좋아하거나 싫어하거나 하는 욕심을 부리게 됩니다.
그래서 관찰하지 않고 그냥 가만히 있으면 느낌에서 바로 갈애로 넘어가는데, 위빳사나 지혜가 일어날 때는 우리도 아라한과 부처님처럼 맛, 즉 느낌을 제대로 알고 있으면서도 갈애로 넘어가지 않고 아는 데서 그냥 끝냅니다. 즉 마음에서 반응이 일어나지 않게 됩니다. 있는 그대로를 제대로 알기는 하지만 그 맛에 대해 탐심이 안 생기고 성냄도 안 생깁니다. 그렇다고 어리석게 먹는 것도 아닙니다. 맛을 모르고 먹는다면 그건 어리석음 속에서 먹는 것입니다. 먹으면서 딴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위빳사나 수행자는 확실하게 알면서 먹기 때문에 느낌에서 갈애로 넘어가지 않게 됩니다. 관찰력이 매우 빨라지면서 하나하나 계속 변하는 것만 알기 때문에 거의 맛에 빠지지 않게 됩니다. 그렇다고 맛을 모르느냐 하면 그렇지 않고 확실하고 분명하게 압니다. 그것을 두고 갈애가 아니라 지혜로 간다고 말하는 것이고 그렇게 해 주는 것이 바로 위빳사나 수행입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