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형
jprj44@hanmail.net 2014-10-15 (수) 20:52건물의 정면은 팔작지붕, 뒷면은 맞배지붕이라는 독특한 건축양식을 가지고 있는 부석사 범종루는 말 그대로 범종을 매달아 때에 맞추어 종을 치던 전각이다.
그러나 부석사 범종루에는 범종이 없다. 범종루의 주인인 범종은 어디로 가고 없고, 지금은 목어와 법고 그리고 운판만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최초 부석사 범종루의 건축시기는 알 수 없지만, 1746년 화재로 인해 경내 전각 상당수가 소실되는 안타까운 일이 발생했으니, 그때 중건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화재발생 이듬해에 삼응(三應)스님을 비롯하여 지금의 충북 단양 영춘 현감 유언탁이 재목을 시주하고 사내 대중들이 힘을 모아 1747년 2월 복구를 시작하여 이듬해인 1748년 6월 불에 탄 범종루를 비롯하여 만세루, 승당 등의 전각을 중건했다.
그러나 이때 화재로 범종이 파손되었는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으나 1780년 8월 부석사를 방문한 박종(朴琮. 1735~1793)이 남긴 『청량산유록』에 “범종각(梵鐘閣)이 있는데 쇠종을 매달았다. 종의 둘레는 몇 아름이어서 울리는 소리가 매우 장엄하다”고 한 걸로 보아 범종은 화마를 피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조선 후기의 문신 성대중(成大中:1732~1812)의 시문집 『청성집(靑城集)』에 '임백후와 함께 한 부석사 모임(與林伯厚期會浮石寺)‘이라는 시에 “上方鐘動月初來(천상에서 종을 치니 달이 일찍 떠오르네)”라고 한 것으로 보아 화재로 소실된 종각 중수 후에도 범종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보다 앞서 주세붕(周世鵬:1495~1554)의 시 ‘부석천년사(浮石千年寺)’에서 “鐘動斗午間 (종은 하늘에서 치는구나.)”라는 구절을 통해 범종각의 종이 임진왜란 이전인 15~16세기에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밖에도 이헌경(李獻慶.1719~1791)의『艮翁先生文集(간옹선생문집)』에서도 범종각에 범종이 있다고 하였으며, 권두인(權斗寅, 1643~1719)의『하당선생문집(荷塘先生文集)』에서는 “暮鍾寒動木魚樓(모종한동목어루)”라 하여 범종과 함께 목어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청량산유록』에 범종의 크기가 몇 아름이 된다고 하니 실로 장중한 범종이었으리라 상상이 된다.
그러나 범종각의 범종은 19세기에 접어들면서 그 행방이 묘연해 지는데 일설에는 조선말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증축하면서 공출해갔다는 얘기와 일제시대 전쟁물자로 약탈당했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이 중 일제시대 약탈설은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이미 1915년 부석사 중수 당시 범종각에는 범종이 없었음을 당시의 자료 등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부석사의 범종은 어디로 간 것일까.
범종의 실종과 관련된 기록이 거의 없어 당시의 몇 가지 사건을 토대로 그 행방의 전말을 추정해 보았다.
1800년대 즉 19세기 초 까지 부석사는 나름의 사세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1606년 태백산 사고가 축조되면서부터 사단이 일어날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부석사는 1808년까지 무량수전을 비롯한 여러 전각들에 대해 중수를 하였지만 이후 70여년간 별다른 불사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고, 1884년에 이르러서야 ‘보덕각’을 중수한 사실만이 확인된다.
그렇다면 약 70여년 동안 부석사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이 기간 부석사의 사세(寺勢)를 짐작케 하는 자료가 있다. 1895년 발생한 산송과 토지매매 사건과 관련된 ‘산송문서(山訟文書)’와 ‘토지매매문기(土地賣買文記)’(이 두문서는 현재 직지사성보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다. 이 자료에 따르면 1868년 부석사가 사세가 기울어 부석사 극락암 뒤편의 산자락을 안동의 김건영 가문에 250금(金)을 받고 팔았다는 내용이다.
도대체 무슨 일로 땅을 팔아야 했을까.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19세기 초까지 잘 운영되던 부석사에 날벼락이 떨어졌다.
이것은 뜬금없는 세금 폭탄, 즉 ‘태백산사고’를 지키기 위한 세금인 ‘정조(精租)’를 1820년경에 이르러 갑자기 해마다 100두(斗)씩 바쳐 했다.
앞서의 문서에 의하면 부석사는 태백산사고 수비 비용을 대기위해 이미 30여년전 비어버린 절 서쪽의 극락암을 허물어 그 재목과 기와를 처분한 대금으로 1868년 공납을 납부하였다고 한다. 또한 이 시기를 전후하여 토지처분과 불기(佛器)는 물론 가마솥까지 팔아야 했고 이로 인해 경내 스님들도 남아있지 않아 향화(香華)가 끊긴지 4~5년이 되었다고 한다.
바로 여기서 부석사 범종각 범종의 행방을 추정할 수 있다.
한편 계암 김령(1577~1641)이 쓴 『계암일록』에 따르면 1615년 보다 조금 앞선 해에 부석사 인근 계곡 모래밭에서 발견된 작은 종이 무량수전 안에 걸려 있었다고 했다.
이 종 또한 그 행방을 알 수 없기는 마찬가지이나 앞서 열거한 바와 같이 이 작은 종도 태백산사고를 수비하는 비용으로 충당하기 위해 매각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이는 1868년 부석사 토지를 매각하는 문서에 ‘불기(佛器)’를 매각했다는 대목에서 확인할 수 있다.
‘불기(佛器)’를 금속제 그릇 종류로 파악할 수 도 있지만 그와 더불어 돈이 될 만한 종이나 기타 불구(佛具)류 등이 모두 포함되었을 것이다
부석사의 쇠락은 1820년경부터 시작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이즈음부터 태백산사고의 수비비용을 납부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이는데, 현재 직지사성보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대승사 목각탱과 관계문서’에도 잘 나타나 있다.
이 문서에 따르면 1860년대 말에 부석사가 쇠퇴하여 금색전에 봉안된 목각탱에 대한 향화가 끊긴지 40여년이 되었다고 했으니 그 시점이 대략 1820년대로 보인다.
결국 이러한 시대적 상황속에서 부석사의 우람하고 웅장했던 범종은 사라지고 몽고침략,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의 전란을 피해 1천여년을 이어온 수많은 전각과 보물들이 점차 사라져갔고, 지금 우리가 만나고 있는 부석사는 과거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부석사이야기 중 두 번째에 소개한 무량수전의 아미타부처님과 관련하여 원융국사 비문의 ‘浮石寺媲 本師釋伽以靈鷲山爲七寶凈土常安住也’라는 부분에서 ‘본사석가.....’앞에 두 글자를 띄고 문장을 이어간 것은 문장의 단락이 아니라 석가여래에 대한 극존칭을 위한 장치였였음을 밝힌다. 따라서 본문의 해석은 ‘본사이신 석가여래는 영취산으로써 칠보정토를 삼아 아우르며 항상 안주하신다’로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