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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세력·토건주의자들에 뺏긴 한강<br>주인인 뭇중생들에게 돌려줘야 한다

| | 2010-04-02 (금) 12:16

우리시대 문화지킴이, 문화계의 포청천으로 불리는 황평우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 소장이 개발로 신음하는 한강을 살려야 하는 역사적·문화적 당위를 역설한 원고를 <미디어붓다>에 보내왔다. 정부의 무리한 사업 강행으로 머잖아 지금의 흉물스런 한강의 모습처럼 망가질 4대강 사업을 반대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나아가 콘크리트로 뒤덮인 한강의 모습이 어떻게 복원되어야 하는가를 제시한 옥고다. 황평우 소장의 장문의 원고를 게재한다. <편집자>
콘크리트로 사라진 한강의 역사와 문화
황평우(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장)
크게보기한반도에서 사람이 살기시작하기 전부터 강은 흘렀고, 강은 사람들이 강에 기대어 사는 것을 포용했으며 인간이 강을 헤치는 것조차도 묵묵히 담아내는 어머니이기도 했다. 긴 시간을 통해 보면 강 그 자체가 역사요 문화다.
인류의 정착생활을 통한 문화의 시작은 땅과 물의 이용을 통한 식량 생산이었으며 나아가 잉여생산물은 인간이 모여 사는 취락의 형성과 발달에 지대한 역할을 했다.
서울을 비롯한 주요 지역의 역사와 문화는 강이 주는 수리 기능과 그 유역을 이루고 있는 식량 생산의 토대인 경작지가 배경이다.
강 주변은 인간 활동으로 행해지는 교통과 외적(外敵)으로부터의 방어 역할 및 자연환경요소가 주는 예술 창조 활동 등의 주민 생활공간이 어우러졌고, 문화적 삶의 형태를 총망라한 역사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다.
인류문명의 발상지에서 보듯이 물의 이용이 편리한 강변에서 취락 도시가 발달했고 이것은 한강을 끼고 문화를 일으킨 서울 지역의 지리적 조건과 일치한다.
언제부터 한강이 사람들 삶의 근거지가 되었을까? 그 역사는 구석기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지리적 바탕으로 한강 유역의 비교적 온화한 기후, 풍부한 수량, 고루 발달된 샛강, 강안 좌우 언덕의 우거진 숲, 그 둘레에 식생 하는 짐승 등은 한강주변에서의 주거를 가능하게 했다 현재까지의 발굴을 통해서 밝혀진 한강주변의 구석기, 신석기시대 유적지는 약200여 곳에 이르지만 보존된 곳은 손으로 꼽을 정도이다.
농경의 발달과 금속기의 사용은 생산력의 증가를 가져왔고, 부와 권력을 가진 계층이 등장하여 정치조직을 형성했다. 한강 유역은 고대의 백제·고구려·신라 삼국이 국력을 키워 영토를 확장시키면서 필연적으로 만나게 되었던 역사의 장이다. 또한 고려와 조선의 중요한 교역로로 활용되며 우리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어머니 같은 존재이기도하다.
이렇게 오랜 역사와 문화를 간직한 한강을 직접표현해서 우리에게 남겨진 것은 조선의 화가들이다. 조선 초부터 한강의 경치는 팔경에 포함될 정도로 명승지의 하나로 자주 거론되었고 많은 누정이 입지해있었다. 세조실록에 임금의 종친, 문무재상, 승지들이 참여한 연회에서 활쏘기를 하였는데 좋은 점수를 딴 권람에게 <한강도> 한폭을 주었다는 기사가 나온다.
중국 사신들을 위한 기록적인 성격의 한강도이다. 당시 조선시대 중국 사신들에게 한강이 승경지로 알려져 있었고 한강유람이 인기 있었다. 이들에게 유람광경을 그린 한강유람도가 증정되곤 하였음을 실록에 기사가 나온다. 특히 조선의 대명관계에서 명나라 사신이 조선에 방문시 많은 연회를 베풀고 유람을 통한 대접했음을 알 수 있다. 명사신들은 조선에서 활동을 기록, 기념하는 수단으로 그림들을 많이 원했는데, 한양도 외에도 조선의 절경을 많이 청하였다. 이것은 사신들의 그림 요구에 응하는 것이 도화서의 중요 기능이 될 정도로 강하였다.
특히 한강을 서호, 동호, 남호로 구별할 수 있는데 서호(양천방면) 일대를 그린 겸재 정선의 <경교명승첩 京郊名勝帖>에 4점이 있다. <경교명승첩 京郊名勝帖>는 겸재가 60대 후반인 1740년 12월 양천 현령에 부임된 후 친구인 이병연과 했던 약속인 시와 그림을 서로 바꿔보기로 한 것에 시작해 1740년 겨울부터 다음해 여름까지 한강변의 명소, 백악산 일대, 고사, 자화상, 거처를 그린 회화를 포함한 화첩이다. 이 중 <금성평사도金城平沙圖>, <양화환도도楊花喚渡圖>, <종해청조도宗海聽潮圖>, <소악후월도小岳候月圖> 4점이다. 화첩에 포함된 4점 외 <관악석남도冠岳夕嵐圖>, <관악청남도冠岳晴嵐圖>이 있다. 그 외에도 한강 전경을 그린 <목멱조돈도 木覓朝暾圖>, <안현석봉도 鞍峴夕烽圖>, 화면 중앙에 주요 경물을 부각시킨 <공암층탑도 孔岩層塔圖>, <소요정도 逍遙亭圖>, <양화진도 楊花津圖>, <선유봉도仙遊峯圖>, 양화진 일대 겨울 경치를 그린 <양화답설도 楊花踏雪圖> 등이 있는데, 모두 정선의 그림이다.
동호 일대를 그린 한강도는 압구정에서 바라보는 동호의 경치를 그린 압구정도로 압축된다.
남호일대(서빙고에서 용산강까지) 본래 용산강을 일컬으며, 이 지역은 강물이 비탈 아래로 잔잔히 휘어 돌고, 가운데 너벌섬(지금의 여의도)과 밤섬이 보이고, 물 건너 멀리 관악산과 청계산이 있어서 경관이 좋았다. 남호일대를 그린 그림 중 정선의 그림은 <동작진도 銅雀津圖>가 있다.
한강은 강변에 비옥한 농토를 주었다. 홍수 때마다 밀려오는 미세한 토양은 강변에 퇴적되어 비옥한 충적지를 발달시켜 선사시대부터 농경 및 취락 터로 이용되었다. 또한 한강변에서 일찍이 어로생활이 이루어졌음을 알려주는 많은 유물들이 발견되고 있다. 따라서 한강 주변에는 다양한 시대와 문명과 권력의 교류와 충돌로 양산된 문화유적이 존재했다.
그러나 한강은 일제의 근대화라는 미명아래 공공재에서 사유제로 급변하게 되고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민중들은 한강을 떠나기 시작했다. 해방이후 이를 답습한 개발세력들은 더욱 광분하며 한강을 저들의 욕심을 채우는데 난도질하기 시작했다.
면목동 구석기유적은 서울의 한강 유역에서 발굴 조사된 유일한 구석기유적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정밀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주택 건설 등 도시개발로 인하여 유적지가 모두 파괴되어 현재는 그 흔적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암사동 선사주거지는 두만강 하류, 대동강 하류, 낙동강 하류와 더불어 우리나라 신석기문화의 4대 중심지의 하나이다. 암사동 선사유적은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크게 파괴되어 다수의 토기편이 노출되면서 학계에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암사동 선사유적지는 도로와 택지로 대부분 파괴되었고 겨우 일부만 보존되어 있는 실정이다.
조정경기장으로 파괴된 미사리 선사유적지는 카페촌에 밀려나고 표지판만 존재한다.
역삼동 청동기유적은 한강 유역에 벼농사가 시작된 뒤의 전형적인 주거지이지만 사라졌다.
송파구 가락동 송파대로 동쪽 해발 40m 가량의 낮은 구릉 위에서 청동기시대의 주거지가 발굴되었다. 이곳도 사라졌다.
강동구 명일동 유적은 청동기 후기의 주거지로 1961년 암사동 남쪽 해발 42m의 야산 사면에 위치하였다. 역시 이곳도 사라졌다.
송파구 석촌동 주거지 유적은 잠실대교 건너편 한강 연안 충적 모래층에 위치하고 있었으나, 현재는 한강개발사업으로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없다.
풍납리토성은 백제 초기의 성지 가운데 가장 장대한 규모를 가진 성이다. 이 토성의 성격 규명은 백제사 뿐만 아니라 한국 고대사를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가 될 전망이다. 사적으로 지정·보존하기로 하였으나 서울시의 적절한 대책이 없어 어려움에 처해있는 곳이다. 북쪽 성벽의 많은 부분이 올림픽도로를 개설하며 도로로 편입되어 훼손되었다. 결국 풍납토성의 원형은 도로 개발 공사로 인해 사라지게 되었다.
송파구 방이동 올림픽공원 내에 위치한 몽촌토성(夢村土城)은 백제 초기의 토성으로서 한성시대 백제 도성의 유력한 후보지의 하나로 추정되고 있으며, 사적 제297호로 지정되었다.
몽촌토성 주변도 호텔을 짓거나 가짜 해자 등의 복구로 원형을 잃어버린 허수아비 유적에 불과하다. 그런데 몽촌토성 안에 건립될 한성백제박물관은 많은 문제점이 있다.
첫째 장소의 문제다. 한성백제박물관은 몽촌토성에 위치한다. 몽촌토성에 있으면서 백제의 초기 수도 풍납토성의 위용을 재현하겠다고 한다.
많은 전문가와 시민단체는 박물관을 풍납토성내 또는 풍납토성 인근에 건설하도록 원했으나 서울시는 짓기 편하다고 몽촌토성에다 추진해버렸다.
둘째, 박물관 추진인력의 전문성 문제이다. 관장부터 학예사까지 고대사나 백제사 전공자가 과연 얼마나 있는지 의문이다.
셋째, 박물관이 서울시장의 홍보관으로 전락하고 있다는 것이다. 서울시는 한성백제박물관에 한강르네상스 홍보를 하겠다고 발표했다. 한강르네상스사업은 토목공사이며 한강을 더럽히는 사업이다. 많은 전문가와 학계, 심지어 같은 당의 원희룡 시장 예비후보도 한강 르네상스 사업의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역사와 문화를 전시하는 박물관에 서울시장이 추진한 사업의 홍보만을 하겠다는 것인가? 박물관의 인력구성, 건설예정지, 전시기획 등에 전면적인 수술이 필요해 보인다.
삼성리토성(三成里土城)은 강남구 삼성동(현 경기고등학교)에 있었으며, 삼국시대의 토성으로 알려져 있다. 이 산성은 위치와 지형 조건으로 보아 한강 나루를 지키는 백제의 수비성의 하나로 추정된다. 그런데 박정희 정권은 한강의 모래를 파다가 강남에 아파트를 지었는데 자녀교육문제 등으로 입주가 원활하지 않자 강북의 고등학교(경기, 경기여고, 서울고, 창덕여고, 정신여고, 배재고, 휘문고, 숙명여고, 중동고 등)를 도심 교통밀집을 유발한다며 대거 강남으로 보내버렸다. 그 학교들이 떠난 자리는 대부분 대기업이나 큰 건물들이 들어섰다. 어마 어마한 교통 밀집을 유발하며 말이다.
석촌동 고분군은 백제가 한성(漢城)에 도성을 정한 후 475년 웅진(熊津, 공주)으로 천도하기 전까지 축조된 백제 전기 고분군이다. 백제의 매장 풍습과 함께 축조 당시 문화·정치 ·사회 등에 관한 백제의 역사를 우리들에게 알려주고 있다. 그러나 지금처럼 3층일까?
한국전쟁 시 미군 전차의 한강도하 때 전차 밑에 깔리고 주변에서 건축부재로 사용하는 등 모두 파괴되고 1987년 복원하기 전에는 석촌동 적석총 제3호분과 제4호분 2기 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구의동 고구려보루성유적은 동서울터미널 주변의 신흥 주택가에 있던 표고 53m의 야산에 위치하여, 북으로 의정부 길목에서 남으로는 잠실까지 한눈에 볼 수 있다. 이 지역은 서울시의 화양토지구획정리사업지구로 발굴조사 이전에 이미 훼손되어 있었으며, 이후 대형상가와 아파트 건설로 사라졌다.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헌릉(獻陵)과 인릉(仁陵)에는 이문동 의릉에서 문화유산을 훼손한다는 이유로 이전한 국가의 정보부처가 또 왕릉에 자리를 잡았다.
선릉(宣陵)과 정릉(靖陵)은 강남의 도로 건설에 방해가 된다고 하여 사방팔방이 잘려나가 지금은 봉분만 남아있다. 얼마전 봉분뒤편에 서울에서 가장 크다는 나이트클럽이 자리 잡아 밤이면 밤마다 영혼을 깨우고(?)있다.
한강에 있었던 많은 정자들은 겸재의 그림으로 일부가 남아있는데 제천정(濟川亭), 압구정(狎鷗亭), 천일정(天一亭), 화양정(華陽亭), 심원정(心遠亭)이 사라지고 없다.
광진구 자양동의 한 아파트단지 내에 낙천정이 있는데 사라졌다가 1991년에 팔작지붕의 정자를 건립하였으나 최근 아파트 재건축에 방해가 된다하여 철거가 제기되고 있다.
봉은사(奉恩寺)는 강남에 있는 서울의 대표적 도심 수행공간인 사찰이다. 보우대사, 추사 김정희, 수많은 목판 경전, 독특한 구조의 선불당(選佛堂)은 19세기의 귀중한 목조건물로 높이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봉은사는 무자비한 강남개발로 인해 주변에 초고층건물이 들어서며 수행환경이 훼손되어가고 있다.
금호동과 응봉동의 경계를 이루는 작은매봉의 남쪽 기슭 한강 연변은 전부터 경도십영(京都十詠)의 하나로 손꼽히는 ‘입석조어(立石釣魚)’의 대상지인 입석포(立石浦)였다. 현재는 철도 등으로 옛 모습을 찾아 볼 수 없다.
입석포에서 중랑천 쪽으로 올라가면 사적 제160호로 지정되어 있는 살곶이다리가 위치해 있다. 살곶이다리는 현존하는 조선시대 돌다리 중 가장 긴 다리다. 살곶이다리는 무분별한 하천개발로 인해 하천의 폭이 넓어져서 길이 27m 가량의 콘크리트 교량을 중간에 증설하여 옛 다리의 모습은 잃어버렸다. 서울시는 이곳 중랑천에 의정부까지 배가 지날 수 있게 한단다. 살곶이다리의 운명이 풍전등화이다.
성동구 옥수동 한강변은 한강 본류와 중랑천의 두 물줄기가 만나기 때문에 일찍이 두뭇개·두모포(豆毛浦)라 불리었다. 현재는 주택이 들어서 있다.
밤섬(栗島)은 일찍이 마포팔경(麻浦八景)의 하나로, ‘율도명사(栗島明沙)’의 풍광이 뛰어나 많은 시인들이 밤섬 위쪽으로 넓게 펼쳐진 흰 모래밭을 읊었다. 밤섬을 중심으로 하여 주위에 푸른 버드나무가 그늘도 좋고, 또 물이 섬을 감싸며 돌아나가는 사이로 고기배·놀이배들이 한가롭게 떠 있는 모습은 더욱 아름다운 풍광이었다. 따라서 여름철 백사장에는 피서인파가 넘쳤고, 봄·가을에는 배를 띄우고 혹은 언덕 위에 올라 강상풍경을 구경하며 흥취를 즐겼다. 그러나 1968년 여의도 윤중제 공사로 밤섬을 폭파하게 되었고, 당시 어로와 조선을 주업으로 하던 주민들은 인근 창천동으로 이주당했다.
여의도(汝矣島)는 한강의 하중도(河中島)로서 1970년대 한강 개발의 상징물이다. 여의도는 잉화도(仍火島)·나의주(羅衣洲)·나의도(羅衣島) 등으로 불리었다. 이곳은 조선시대에는 목장이 있어 사축서(司畜署)와 전생서(典牲暑)의 관원이 파견되어 목축을 감독하였으며, 궁중이나 나라 제사에 필요한 제물을 제공하는 기능을 하였다. 1968년 한강개발계획이 수립되어 여의도는 현대식 난개발도시로 조성되기 시작하였다. 섬 주위에 높이 16m, 폭 21m, 연장 7km의 윤중제를 쌓아 87만 600평의 땅을 만들어, 주거·금융·대사관·방송국·국회의사당 등이 들어섰다. 이때 경관이 훌륭했던 인근의 밤섬을 폭파하여 여의도 땅을 돋우는데 필요한 토석을 채취하여 사용하였다.
한강은 예부터 중요한 수로로 이용되어 왔다. 현재는 한강의 하구가 휴전선이 되어 있어 항해가 불가능하지만 1950년 이전에는 한강의 하구를 통하여 상류 330㎞까지 역함이 가능해서 마포, 용산, 뚝섬, 여주, 목계, 충주, 청평 등지의 나루가 번창하였지만 모두 사라졌다.
우리나라는 6천 해리의 긴 해안선과 7대강을 포함하는 하천이 국토를 가로지르며 흘러서 수운 교통이 발달할 수 있는 좋은 조건을 가졌다. 배로 운항하는 것에는 해운과 수운 두 종류가 있어 배로 해운에 사용되는 해선과 수운에 사용되는 강선(江船)으로 구분되었고 강선은 다시 노선(櫓船)과 광선(廣船)으로 구분되었다. 대체로 강선은 폭이 좁고 길이가 긴 형태이다. 그러나 20세기 중반이후 한강에 다리가 놓이고 한강의 수운로의 역할이 줄어들면서 한강에서 유람선과 가짜 오리배를 제외한 배는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조선시대에 남한강과 북한강 수로 변에는 각각 약 200여개 및 100여개의 포구와 나루터가 있었고 선박의 기항지도 약 150여 곳이 있었다. 이들 포구와 나루터 주변에는 창고업, 도매업 그리고 숙식업이 성했으며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중간상인인 객주집과 창고겸 위탁업을 겸한 여각이 바로 전국의 산물이 집결되는 한강변에 모였었다. 여기에는 다양한 문화와 놀이가 있었다. 현재 한강의 객주와 여각터에는 대형 호텔과 고급카페로 대체되었고 비싼 이유를 알 수 없는 고가의 아파트의 소수자들만이 한강을 가두어두고 있다.
조선이 항양에 수로를 정한 이후 한양은 500여 년 동안 정치, 사회, 문화의 중심지였다. 따라서 이러한 중심지를 흐르는 한강은 단순히 하천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수운로 로서 좋은 조건을 두루 갖추어 포구주변에 장이 서면서 상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니 조선 최고의 교역의 장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한강에 다름과 차이를 극복하는 교역이기 보다 다름과 차이가 천박하게 표출되는 사익의 현장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무형의 민속, 굿, 놀이는 대부분 사라졌다
오늘날 한강의 주인은 아파트와 자동차 등 소위 개발세력과 토건주의자들 이다.
서울시가 주창하는 이른바 한강르네상스사업은 많은 계획을 담아내고 싶어 한다. 너무 많아서 열거하기도 힘들다. 왜 이렇게 뭘 만들어야 직성이 풀리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한강을 좀 비워달라는 것이다. 서울시의 한강 르네상스 계획은 마치 프랑스의 푸아그라 요리를 연상한다. 좋은 요리 재료를 위해서라는 핑계를 대면서 억지로 거위에 먹이를 집어넣고 그 지방간으로 요리를 만들어 먹고는 좋다고 웃어대는 인간의 탐욕스러운 모습들이 연상되는데 이것이 개발주의 행정책임자와 공무원들, 토건업자들이다.
서울시를 비롯한 강주변의 지방정부가 한강과 사람들을 위해 해야 할 사업은 한강에 사람들의 진입을 쉽게 하는 조치와 콘크리트 제방을 철거하는 일, 자동차 길을 멀리 돌리는 것. 이 세 가지 사업만 하면 된다.
시민들이, 예술가들이, 청년들이, 청소년들이 자유롭게 드나들면서 그들이 만들어내는 담론과 주제들을 모아 새로운 한강의 문화를 꿈꾸게 하면 된다.
한강의 주인은 서울시청 직원도, 영혼 없는 전문가도, 토건업자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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