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승균기자
hsk2618@naver.com 2013-04-29 (월) 19:00
만복사지 석인상
사적 제 349 호
전북 남원시 왕정동
고려시대
그곳은 지난한 숙제였고 의문이었다.
오래전 뚜벅뚜벅 불교유적을 답사하던 중에 전북 남원지역에 발길이 이르렀는데, 애초에 계획조차 못했던 성보를 만났다. 다름 아닌 폐사지 만복사터였다.
평지의 큰 길 옆에 있는 광활함에 놀랐고, 비교적 정비되어 단정하게 정리된 모습이 반가웠다. 그러나 정작 답답한 궁금함과 안타까움을 안고 돌아서게 만든 것은 발 뿌리 옆에 있는 석인상이었다.
크게보기
크게보기
크게보기
만복사지는 철제로 만든 울타리가 둘러쳐져 있어서 절터의 영역을 정갈하게 구분해 놓았다. 그것은 절터를 둘러싸고 형성되어 있는 마을과, 절터 앞 도로의 여건상 필요에 의한 조치였다. 평지가람이면서 도시 복판에 있는 특성상 말끔한 정비 상태가 필요했던 것이다. 비록 들풀 내음과 스산한 바람이 없다손 쳐도 시내에 이처럼 잘 보존된 폐사지도 드무니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거대한 석인상의 머리는 절터 밖에, 네모 울타리로 둘러싸여 있었다. 비록 양옆에 도로 경계봉까지 설치해 놓여 있었지만, 그 옆을 지나는 행인이나 차량뿐 아니라 석인상 자체도 참 불안하게 보였다.
고대의 전쟁에서는 적을 제압하는 수단 중에 가장 완벽하면서도 큰 선전효과를 노리고자 무참하게 적의 머리를 베었고, 수급을 몇 개나 획득 했는가에 따라 공을 따졌다. 뭇 대중들에게 공포감을 주는 방법으로 머리를 매다는 일이 횡행했음을 생각하면서, 천년의 성보가 한순간 섬뜩함으로 와 닿았다.
크게보기
크게보기
크게보기
답사를 마친 후에도 내내 궁금하던 차, 남원이 고향인 친구에게 물어도 ‘그 석인상은 어릴 적부터 원래 그렇게 있었다’고 하니 연유가 더더욱 의문이었다. 만약 이 석인상이 두상만 잔존한다면 사찰 구역 내에 모실 일이지 길가에 내치듯 팽개쳐 놓고는, 손실될까봐 철갑을 두른 행위가 잘 이해되지 않았다. 더욱이 관련 자료를 찾아본 즉 몸통부위가 매몰되어 있다고 서술되어 있으니 그 또한 납득이 안 되기는 마찬가지였다.
결국 이 석인상은 2009년에서야 완전한 발굴이 이루어졌고, 위치 또한 만복사지 사역내로 이전되어 모셔짐으로써 오늘날 만복사지에 가면 절터입구에서 가장 먼저 눈을 마주대하게 된 것이다.
직접 가서 이분을 만나가전까지도, 남원의 관련기관에서는 ‘최근에 몸통을 만들어서 두상과 붙인 후 옮겨 모셨다’는 답을 들어야 했으니 내가 품고 있는 숙제는 참으로 풀기 어려운 과제였다.
남원지역에서는 머리는 드러나 있으되 이 괴기스런 석상이 남원지역에 위해를 끼친다는 잘못된 주술적 믿음이 회자되었고, 배산임수의 절터구조상 도로를 개설하는 과정에서 절터구역과 돌출된 두상이 방해가 되자 사역을 온통 후퇴시키고, 이것만 철책을 둘러놓은 것이다.
크게보기
크게보기
실제로 550센티미터의 거구였던 석인상은 두상만을 지표에 드러냈으니, 지나가는 꼬마들조차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처지였다. 자연 위에서 내려다보는 모습은 험상궂고 화가 잔뜩 난 인상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차량의 왕래가 많아지면서 매연과 먼지에 시꺼멓게 그을렸으며, 한 때는 트럭에 받히는 바람에 머리부위는 깨진 흉터까지 생겨났다. 석상의 머리는 이렇게 점점 흉물로 변해갔다.
만복사지가 소재한 남원지역은 백제시대부터 일본과의 통로 역할을 했던 요충지였다. 내륙으로도 사통팔달하는 지역이었기에 만복사와 같은 거찰이 들어설 수 있었는데, 천년을 향내가 끊이지 않던 대가람도 정유재란 때 화마에 스러지고 말았다.
기록에 의하면 왜군과 명나라군의 남원성 전투에서, 왜군들이 만복사의 사천왕상을 수레에 싣고 전투에 이용했다고 전해진다. 기록이 사실이라면 왜군들 또한 어쩔 수없이 저급한 오랑캐들과 다를 것이 없다.
현재의 만복사지는 다른 폐사지에 비해 주춧돌의 보존상태가 매우 양호하다. 아름다운 석등의 하대석과 불상을 모셨던 석좌까지 제 위치를 지키고 있다. 만일 같은 사역에 만복사를 복원한다 해도 현재의 주춧돌 자리에 그대로 기둥을 세우고 또 석등을 올려도 될 만큼 점점이 그 윤곽을 상상하기가 어렵지 않다.
법향이 원만하였던 시절! 만복사는 저녁때 하루의 시주를 마치고 절에 돌아오는 스님들의 행렬이 남원팔경중 하나로 꼽혔을 만큼 아름다웠다 전한다. 감미로운 사랑과 변치 않은 지조를 이야기한 김시습의 최초 한문소설 ‘만복사 저포기’가 탄생한 것처럼 만복사는 아기자기하고 정감 있는 사찰이었던 것이다.
오늘날의 남원은 광한루를 정점으로 온통 이몽룡과 성춘향의 애틋한 사랑이야기를 테마로 하는 도시가 되어있지만, 그 원조는 만복사 저포기의 주인공 양생과 소설 속 처녀였으니 이곳 만복사터에 ‘원조’ 간판이라도 달아야 할 판이다.
일곱 번에 걸친 발굴조사를 통해 당시의 만복사는 서쪽에 전각을 구성하고 동쪽에 탑을 배치하는 서전동탑식 가람배치였음이 밝혀졌다. 현재는 비바람에 노출되었던 석조여래입상을 보호각에 모시는 한편, 산재되어 있던 5층 석탑도 제 짝을 맞추어 구색을 갖추어놓았다.
석인상은 1965년과 1980년에 시행된 발굴로 인해 하체가 드러났다는 기록이 있건만, 다시 파묻어 두상만을 내놓은 채 긴 세월을 흙속에 옭아매 두었으니 정녕 안타깝고 애처로운 일이다.
두상의 얼굴 표정은 상당부분 마모가 진행되어 있고, 몸체의 양상은 국내에서 비교할 만한 사례를 찾을 수 없도록 특이한 형상을 하고 있기 때문에, 석인상의 용도와 실체에 대해 여러 의견이 나오고 있다. 본래 있던 위치나 두상의 모습을 감안하면 금강역사상이라는 견해가 타당해 보이고, 금강역사상이었다면 당연히 금강문이 배치되었을 것이라는 의견에 공감이 간다.
현재의 석인상 몸통은 얼굴이 바라보는 방향에 비해 많이 꼬여있는 자세이다. 한쪽 면은 문양을 새기지 않은 채 당간지주형 구멍이 뚫려 있다. 따라서 당시의 석인상 모습이 어떨지에 대한 상상은 무한으로 내닫지만, 바로 옆에 육중한 당간지주가 건재하고 있고, 본래의 석인상 위치가 지주로부터 4미터 정도 전면에 있었음을 볼 때 아무도 보지 못했을 만복사만의 성스러움을 연출했던 기운이 엿보인다.
이제 거구의 몸체 위에 올린 두상은 험상궂고 괴기스러운 얼굴이지만, 위엄과 친숙한 미소가 배어 있다. 금강저를 움켜쥐었을 근육질 팔뚝과 화려한 치장의 옷매무새에서는 강인함이 드러난다. 5미터를 넘는 키에 비해 얇은 몸체는 표현할 것을 다 쏟아 부은 듯 알뜰하다.
폐사지에 가면 늘 하던 버릇처럼 양팔을 벌리고 깊은 숨을 들이마시면서 천년의 숨결을 찾곤하는 데, 만복사지에서는 검게 그을린 금강역사상의 얼굴과 마주 보기가 민망하다.
본래의 위치도 아니려니와 하단부를 만들어서 이어 붙였다는 착각을 줄만치, 하얀 몸통과 검은 얼굴이 어울리지 않는다. 민 문양의 한쪽 면에 뚫긴 구멍을 보면 아이들 장난감인 레고가 절반의 짝을 잃은 듯 엉성한 느낌이다. 분명히 있었을 반대편 금강역사상의 부재도 쓸쓸한 느낌을 더해 준다. 현재 또 하나의 석인상은 두상만 상당히 마모된 채 향토박물관에 전시되어있다니 되찾아올 방법을 강구해야 할 것이다.
파묻힌 만복사지의 두상을 처음 만났을 때는 군대를 막 제대했을 무렵이었다. 군대에서는 별명이 ‘삽질의 귀재’라 불렸던 것이다. 다만 몸뚱이가 땅에 묻혀 답답하셨을 그때나 엉뚱한 자리에서 애처로운 시선을 보내고 있는 지금이나 애처롭기는 매한가지다.
원래 계셨던 곳에서 삿된 귀신의 진입을 막고 참배자에게 경각심을 일으키는 금강역사상 본연의 임무를 다하시도록 내 뛰어난 삽질이라도 돕고 싶은 것이다.
우리는 이역만리에서 고국 땅에 돌아오지 못하는 우리의 수만 점에 달하는 문화재에 대해 여러 경로를 통해 환수노력을 하고 있다. 개중에는 비열한 방법으로 탈취한 그들의 의식을 탓하고 있지만, 석인상의 경우처럼 바로 곁에 있는 선인들의 자취를 이렇게 방치하여 왔음에 대해서도 재고해야 할 것이다.
전쟁의 상흔과 세월의 풍상은 동(銅)으로 조성하여 거대했던 불상과 환희로운 5층 목탑을 전설에 묻어버렸다. 덕유산에서 흘러온 기린봉 자락을 머리에 밴 배산임수의 가람배치는 알록달록한 민가의 지붕으로 둘러싸여 있어 목탁소리 아득하지만, 보슬보슬한 잔디밭에 동그라미가 일정한 간격으로 수놓아 있는 만복사의 벌판은 금박을 입혀 윤기가 나는 비단결처럼 매끄럽고 정갈하다.
만복사는 이름만치나 만복이 그득하고, 사랑의 도시 남원에 있는 만큼 비교적 애정과 관심을 받고 있는 절터이다. 앞으로도 많은 순례객들이 찾아올 테고, 또 지금처럼 정갈하게 유지될 것이다. 하지만 지독한 고생 끝에 겨우 가족을 찾은 노숙자가 목욕도 하지 않은 채 이쁘고 멋스러운 옷을 입고는 계면쩍게 웃음 짓는 금강역사상의 삐딱한 눈초리를 뒤로 하고 돌아서는 발걸음은 너무 불편하고 미안스럽다.
아직도 못 다한 숙제를 한 듯 못내 고개를 돌려 석인상의 검은 얼굴을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