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강에 비친 달 〈37〉


호불과 배불


집현전 학사들은 삭풍이 몰아치고 강물도 얼어붙는 한겨울에는 출근하지 않고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다. 사가독서란 관청에 나와 공무를 보지 않고 임금이 휴가를 주어 집이나 절에서 학문연구와 독서를 하는 제도를 말했다. 추위가 바늘처럼 뼛속 깊이 파고드는 한겨울의 사가독서 기간에는 일직을 하는 학사 한두 명이 집현전을 지킬 뿐이었다.

그런데 부제학 최만리는 사가독서를 거부하고 날마다 고집스럽게 출근했다. 그날도 최만리는 출근하자마자 수염에 달라붙은 살얼음을 떼어냈다. 입김과 콧김마저 바로 얼 만큼 몹시 추운 날이었다. 최만리의 콧등은 벌써 빨간 딸기코가 되어 있었다. 그는 분풀이할 대상이라도 찾듯 집현전으로 출근하곤 했다. 작년 동짓달 그믐날부터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일직을 하는 젊은 학사를 붙들고 하소연하는 날이 많았다. 그날 일직 당번은 하위지였다. 하위지가 그를 위로했다.

“행수께서는 이제 현실을 받아들여야 마음이 편하실 겁니다.”

집현전의 실무 총책임자를 행수라고 불렀다. 대제학은 명예직으로 집현전 공무에는 간여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부제학 최만리가 집현전 수장인 셈이었다.

“언문을 창제하여 나라의 풍속이 바뀌려고 하는데 자네는 걱정이 되지 않는가?”

“행수께서 모르시는 말씀입니다. 저라고 왜 걱정이 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전하의 뜻이 워낙 완강하니 때를 기다리자는 것이지요.”

“자네는 전하를 몰라. 겉으로는 부드러운 것 같으시지만 한 번 결심하면 결코 양보하시지 않는 분이라는 것을.”

“타협할 수 있는 방안이 없겠습니까?”

“이미 끝났어. 언문을 창제하셨으니 때를 보아 세상에 반포하실 걸세.”

“그래도 언문 반포를 늦출 수 있는 방법을 찾아는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최만리를 따르는 학사들은 하나같이 훈민정음을 굳이 언문이라고 칭했다. 중국문자인 한자가 있는데 공연히 우리 글자를 만들어 평지풍파를 일으킨다고 보았던 것이다.

“언문 반포를 지연시키는 방법 중에 상소 말고 또 무엇이 있겠나.”

“혹시 행수께서 이미 상소문을 작성해 놓으신 것은 아닙니까?”

“여러 학사들과 상의했어. 상소문 초안이네.”

최만리가 소매 속에서 상소문 초안을 꺼내 하위지에게 건넸다. 그때 신발에 묻은 흙을 터는지 발을 구르는 소리가 났다. 누군가가 집현전 문을 열고 있었다. 하위지는 재빨리 두루마리 종이에 적은 상소문 초안을 접었다. 가슴이 철렁 했고 머리끝이 쭈뼛거렸다. 뜻밖에 김수온이 허연 입김을 내뿜으며 들어오고 있었다. 김수온은 두루마리를 흘깃 본 뒤 하위지에게 말했다.

“하하하. 무얼 감추시는가?”

“형님은 저를 감시하는 것입니까? 아무 연락도 없이 갑자기 나타나시게 말입니다.”

“오늘 언문청 회의가 있어 나왔네.”

그제야 김수온은 헛기침을 하고 있는 최만리에게 다가가 깍듯하게 인사했다. 최만리는 상급자에다 나이도 김수온보다 9살이나 많았다.

“그동안 강녕하셨습니까?”

“강녕하지 못하네.”

최만리가 고개를 돌리며 퉁명스럽게 말하자, 김수온은 최만리의 불편한 심기를 잘 알고 있었으므로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성품이 강직한 최만리는 자신의 심기를 숨기지 못했다. 김수온을 보더니 당장 양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언문청 회의 장소는 어디인가?”

“내불당입니다.”

최만리는 언문청을 집현전에 두지 않는 것만도 다행으로 여겼다. 앞으로 훈민정음 보급을 언문청에서 한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잠시 후에는 최항과 신숙주가 나타났다. 두 사람 모두 한글창제를 찬성한 학사들이었다. 최만리는 부담스러운지 인사만 주고받은 뒤 곧 집현전을 나가버렸다. 하위지는 일직이었으므로 자리를 뜨지 못하고 안절부절 못했다. 그러나 김수온 일행은 곧 집현전을 나갔다. 하위지는 그들이 사라진 뒤에야 안도했다. 잠시 후 최만리가 다시 들어왔다.

“행수께서는 저만 남겨두고 어디로 가신 겁니까?”

“꼴 보기 싫은 먹물들이 들어와 밖에서 찬바람 좀 쐬고 들어왔네.”

“이 엄동설한에 밖에 계셨단 말입니까?”

“열불이 나 견딜 수 있어야지.”

“행수께서는 너무 강직해서 탈입니다. 지금은 전하께서 저들에게 힘을 실어주고 계시지만 언젠가 우리 쪽으로 마음을 주실지 모릅니다.”

“방금도 보았지 않나.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고 저들이 경거망동하는 것을 말이네.”

최만리의 불만은 생각보다 컸다. 그의 불만은 반드시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것만도 아니었다. 불만의 근원은 그보다 다른 데 있었다. 세종이 석교에 호의적인 후배 학사들을 총애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최만리는 그것이 못마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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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 어진.

“전하께서 훈민정음 창제를 공개하시고 난 뒤부터 집현전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어. 나는 그것을 더 걱정하고 있네. 이러다가 집현전이 석씨(釋氏)를 신봉하는 불당이 돼버릴 수도 있으니 말이네.”

“행수께서 요즘 과민해지신 것 같습니다. 어찌 집현전의 분위기가 김수온 같은 자들의 뜻대로 변하겠습니까? 승도를 혁파하고 흥천사 사리전 중수와 경찬회(慶讚會)를 줄기차게 반대했던 형님을 따르는 학사들이 아직은 많습니다. 정창손 선배님도 변함없이 따르고 의지하지 않습니까? 훈민정음 창제를 찬성했던 박팽년도 사실은 누구보다도 불당 혁파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전하의 속마음은 이미 숭불(崇佛)로 기울어 버렸어. 간사한 중 신미의 농간이야. 언문 창제도 유불 갈등에서 우리가 밀린 거네. 언문을 창제하고 공개한 것이 바로 그 증거네.”

“그 말씀도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전하와 맞서기만 한다면 화를 자초할 수도 있습니다.”

훈민정음 창제를 찬성하는 학사들 면면을 보면 대부분 호불(好佛)하는 이들이었다. 김수온은 말할 것도 없었고 최항, 신숙주, 성삼문 등은 세종을 받들고 있는 신미를 현실적으로 인정했고, 부처를 신봉하는 강희안은 세종의 명을 받아 불당에서 불경을 사경한 적이 많았다.

“어서 상소문 초안을 읽어보게.”

최만리의 상소문 초안은 최만리 혼자만의 주장은 아니었다. 신석조, 김문, 정창손, 송처검, 조말생의 효성스러운 아들 조근 등과 상의한 결과였다. 상소문 초안에는 훈민정음 창제를 반대하는 여섯 가지 이유가 쓰여 있었다. 요지는 다음과 같았다.

첫째, 조선은 개국 때부터 대대로 중국문물을 본받고 섬기며 살아왔는데 한자와 다른 언문을 만드는 것은 사모하는 중국에 대해서 부끄러운 일이다.

둘째, 한자와 다른 글자를 가진 몽고, 서하, 여진, 서번(티베트) 등은 오랑캐들이니 지금 언문을 만드는 것은 스스로 오랑캐와 같아지려는 것이다.

셋째, 이두로도 불편하지 않게 생활할 수 있다. 그러나 언문을 사용해 출세할 수 있게 되면 어려운 한자로 된 성리학을 멀리 할 것이다. 그것은 학문과 문화의 수준을 떨어지게 할 것이다.

넷째, 백성들에게 송사의 불공평함이 생기는 것은 한자를 잘 알고 쓰는 중국에서도 흔히 있는 일이다. 그것은 옥리의 자질이 문제이지 언문을 만들어야 할 이유가 되지 못한다.

다섯째, 언문을 만드는 것은 풍속을 크게 바꾸는 일이다. 그러니 훗날 고침이 없도록 성급히 추진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일부 찬동하는 이들만으로 추진하고 있고 상감은 몸을 해쳐가며 지나치게 정성을 쏟고 있다.

여섯째, 동궁이 성리학에 정진해야 하는데 언문에 정력을 소모하는 것은 옳지 않다.

상소문 초안을 읽어본 하위지는 두말없이 찬동했다.

“이는 제가 하고 싶었던 말입니다. 저도 행수께서 나서는 일에 적극 동참하겠습니다.”

“각오하고 있네. 상소를 올리게 되면 전하께서 주동한 나를 벌하실 걸세. 그러나 어찌하겠나. 언문 창제는 그저 신기한 재주일 뿐이네. 성학(聖學)을 위해서도 손해가 되고, 정치에 있어서도 이로움이 없으니 되풀이해서 생각해 보아도 아닐세.”

결국 최만리는 초안을 더 보완해서 자신을 추종하는 학사들과 함께 상소문을 올렸다. 그러나 세종은 지체하지 않고 상소문에 가담한 학사들을 정전으로 부른 뒤 이례적으로 길게 질책했다.

“설총이 이두를 만든 근본 취지가 백성을 편안케 하는 일이었다면 지금의 언문도 백성을 편안케 하는 일이 아니냐? 너희들이 설총은 옳다고 하고 과인이 한 일은 옳지 않다고 하는 것은 무슨 까닭이냐?

너희들이 운서를 아느냐? 사성과 칠음을 알고 자모가 몇인지 아느냐? 지금 운서를 바로잡지 않는다면 누가 바로잡겠느냐?

과인이 나이 들어 세자가 국가의 자잘한 서무를 도맡아서 하고 있는데 하물며 언문을 말해서 무엇 하겠느냐? 만일 세자로 하여금 동궁에만 있게 한다면 환관이 이 일을 맡아서 해야겠느냐? 너희들은 과인의 신하들로서 내 뜻을 분명히 알고 있을 터인데도 상소문에 이런 말을 하고 있으니 옳은 일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이에 최만리는 떨리는 목소리로 변명했다. 이두는 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 썼지만 언문은 그것이 아니고, 동궁은 급하지 않은 일에 시간을 허비했다고 변명했다. 다만 운서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답을 못했다.

세종은 또 김문과 정창손을 지목하여 질책했다.

“과인이 ‘언문으로 〈삼강행실(三綱行實)〉을 번역하여 민간에 퍼뜨리면 어리석은 남녀가 모두 쉽게 깨달아서 충신, 효자, 열녀가 반드시 무리로 나올 것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때 문은 ‘언문을 제작함에 불가할 것은 없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런데 지금은 ‘불가하다기사에 만족하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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