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 붉은 승려<32>

폭설

쌀가루 같은 눈이 새벽부터 내리고 있었다. 2월이 되자마자 퍼붓는 폭설이었다. 김성숙은 통합야당인 신민당(新民黨)에 제출할 이력서를 쓰다 말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김성숙은 이미 신한당 운영위원과 지도위원으로 내락을 받은 터였다. 그에게 눈은 서설(瑞雪)이 아니었다. 22년 전 중국 상하이에서 미군군용기를 타고 귀국했을 때가 문득 떠올랐다. 그러자 자신도 모르게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슬픈 감정은 없었다. 억울한 마음도 들지 않았다. 어찌 보면 민중당과 신한당이 통합하고 머잖아 자유당과 한국독립당까지 통합할 기미가 보이는 기쁜 날이었다. 그러나 조국해방을 위해 반평생 동안 중국에서 투쟁했던 자신의 인생은 진정 무엇을 이루었는지 허허로웠다.

그날 임정간부 2진을 태운 미군군용기가 김포공항에 착륙하지 못하고 군산비행장으로 날아간 사실부터가 두고두고 아쉬웠다. 공항에 나온 환영객들에게 나누어주려고 태극기를 만들어왔지만 미군군용기는 폭설 때문에 김포공항에 착륙하지 못하고 아무도 없는 군산비행장으로 갔던 것이다.

대기하고 있던 버스를 타고 논산까지 가서 1박한 뒤 서울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임시정부봉영회(臨時政府奉迎會)가 끝난 지 하루 뒤였다. 임시정부봉영회는 임시정부와 연합군환영회가 서울운동장에서 주최한 임시정부 요원들을 환영하는 행사였던 것이다. 수많은 환영인파가 ‘김구 만세, 이승만 만세!’를 외쳤다.

그런데 몇 달 뒤 김성숙은 임정을 탈퇴하고 말았다. 임정이 미군정의 자문기관인 남조선국민대표 민주위원에 참여했기 때문이었다. 반일과 독립을 위해 고투해온 임정이 미군정의 자문기관으로 참여하는 것을 용납하지 못했다. 이때부터 김성숙은 김원봉, 장건상 등과 함께 진보적인 정책과 좌우합작 노선을 지향하는 민주주의민족전선(약칭; 민전)에 참여하여 전국을 돌아다니며 강연정치를 했다.

민전은 자주, 민주, 통일, 독립 등 4대 노선을 추구한 좌파도 우파도 아닌 중간파였다. 5인의 강연단을 만들어 전국을 순회하는 김성숙을 미군정이 좋아할 리 없었다. 김성숙은 전북 지방에서 강연하다 미군정법 제 2호를 위반했다는 죄목으로 1946년 3월 25일에 미군에 체포되어 재판받고 전주형무소에서 6개월을 살았다. 해방된 조국에서의 첫 번째 수감생활이었다. 훗날 김성숙은 다음과 같이 냉소하며 회상했다.

“그때 3월 30일에 체포되어 전주에서 재판을 받았어요. 가관이지. 내가 군정을 반대했다는 겁니다. 미군정법 제 2호에 보니까 ‘무릇 군정을 반대하는 자는 6개월 금고로부터 사형까지다’라고 되어 있어요. 그래 ‘당신들 마음대로 해라. 나는 도대체 답변할 것이 없소’ 했지요. 재판장이 뭘 딱딱 두들기더니 6개월 금고라는 거요. 그래 전주감옥에서 6개월 있었소. 내 휴양기간이었지. 수십 년 고난으로, 전쟁에 너무 시달려 몸이 말이 아니었는데 잘 쉬게 되었다 싶었어요. 아닌 게 아니라 특별대우를 해줍디다.”

두 번째는 1957년 10월에 민주혁신당을 창당한 뒤 간첩사건의 누명으로 6개월 동안 구속을 당했다. 세 번째는 1961년 1월에 통일사회당을 창당한 뒤 5.16군사정변이 일어나 아무 죄 없이 10개월 동안 구속을 당했다.

김성숙은 쓴웃음을 지었다. 5.16군사정권의 군사혁명재판소에서 집행유예 판결을 받고 석방된 지 얼마 뒤에 사복차림의 낯선 군인이 찾아와 자신을 회유했는데 창당할 민주공화당에 입당하여 요직을 맡아달라는 것이었다. 김성숙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쿠데타를 일으킨 군사정권이 만드는 당에 입당하는 것은 자신의 인생을 뿌리째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김성숙이 해방된 조국에서조차 세 번이나 수감됐던 이유는 너무도 분명했다. 그는 임정 때부터 일관되게 지켜온 자신의 신념을 버릴 수 없었던 것이다. 상하이 한 호텔 회의실에서 김규식 부주석이 개최했던 임정 국무회의 때였다. 귀국하기 바로 직전의 국무회의 석상이었다. 김성숙은 세 가지를 제안하고 관철시켰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임정은 비록 개인 자격으로 입국하기로 되었으나, 미군정이 용인하는 한도 내에서 정치활동을 할 것인데, 국내에서 극좌와 극우파의 대립 항쟁하는 사태에 임하여 임정은 어느 파에도 편향함이 없이 초연한 입장을 취하여 양파의 대립을 해소시키며 다 같이 포섭하도록 노력할 것.

둘째, 입국 즉시 전국 각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와 각 지방 반일민주인사를 소집하여, 비상국민대표회의를 가져 임정은 이 대회에서 30여 년간 지켜온 임정헌법과 국호와 연호를 채택하는 조건 하에 임시의정원의 정원을 확대 개선하는 동시에, 명실상부한 한국 민주정부를 재조직할 것.

셋째, 미소에 대해서는 평등한 원칙 하에서 외교관계를 수립할 것.

자신의 이력서를 마저 다 쓴 김성숙은 자신이 1938년 <조선민족전선> 창간호에 발표했던 애도도산선생(哀悼島山先生) 애도문 원고를 봉투에 챙겨 넣었다. 흥사단 간부가 김구와 이광수가 쓴 애도문은 있는데 김성숙의 글만 없다고 협조를 요청했던 것이다. 김성숙은 어색한 문장이 보였지만 당시 좌우파가 모두 존경했던 안창호(安昌浩)였으므로 선생의 서거를 애도했던 원고 그대로 봉투에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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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 안창호 선생이 쓴 마지막 글씨로 알려진 글. 삼성출판박물관 소장.

<위대한 민족해방운동가이자 지도자인 안창호 선생이 3월 10일 적군의 감옥에서 나와 세상을 떠나셨다는 비보가 들려왔다. 조선민족 특히 선생과 혁명 사업을 책동한 오랜 동지들과 도산 선생의 지휘 하에 혁명 투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무수한 청년들은 선생의 오랜 해외망명생활 중에 만난 잔혹한 조운(遭運)과 그에 대한 비통함을 감추지 못했다.</SPAN>

도산 선생은 향년 61세로 원로 혁명가셨다. 선생은 30여 년간의 망국생활을 하면서 줄곧 조선민족의 자유 독립을 위해 끈질긴 투쟁을 했다. 특히 나라를 잃은 후에도 해외로 망명해 만주 상해 및 미주 각지에서 혁명동지들을 도우며 사단을 조직해 혁명 사업을 이끌어 나갔다. 1919년 3.1운동 대혁명운동 당시, 선생은 한국임시정부에 가입하여 국민대표대회를 소집했다. 이는 혁명운동의 통일을 도모하기 위한 책략이었다. 1.28전쟁 후 윤봉길 열사의 폭탄투여 사건으로 상해 파견군 사령관인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를 살해한 사건이 발생했을 때, 도산 선생은 상해에서 왜적에게 체포되어 경성의 감옥으로 이송된 후, 5,6년간의 처참한 철창생활을 하다가 병환으로 석방되었다. 하지만 노병으로 적군들의 심문을 더 이상 버텨낼 수가 없었던바 결국 우리 곁을 떠나셨다. 우리는 민족의 자유 독립 투쟁을 위해 희생된 도선 선생을 기억해야 한다.

선생은 혁명운동 중, 전 민족의 힘을 모으고, ‘착실하고 열심히 일해야 한다’라는 정신을 가지고 전진해 나가야 함을 주장하셨다. 왜적이 대대적으로 중국을 침략하고, 전 민족반일통일전선운동의 기운이 일어나게 된 오늘날 특히 전 민족반일통일전선운동이 막 고조되었을 때, 선생의 육체는 비록 적군들에 의해 잃게 되었지만, 선생의 혁명정신은 모든 혁명가 마음속 깊이 영원히 새기며, 혁명운동을 지속적으로 이끌어갈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도산 선생을 애도해야 하고, 전 민족단결의 힘을 모아 전 민족의 통일전선을 건립하고자 했던 선생의 유지를 계승하여 일본제국주의를 무찔러야 한다.>

김성숙은 빗자루를 들고 마당으로 나섰다. 아무리 폭설이 내린다 해도 눈은 치워야 했다. 눈이 녹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은 김성숙의 생활방식이 아니었다. 그러나 김성숙은 눈을 쓸다 말고 주저앉았다. 힘이 부쳤다. 이제 자신의 나이도 어느 새 예순 아홉, 하늘이 부르면 가야 할 늙은이였다. 입안이 비릿했다. 갑자기 침이 고여 뱉어내니 피가 섞여 나왔다. 핏덩어리가 흰 눈을 붉게 물들였다. 며칠 전부터 기침을 심하게 했는데 핏덩어리가 식도에 얹혀 있었던 모양이었다.

김성숙은 토방에 빗자루를 세워두고 잠시 고개를 들었다. 쌀가루 같은 눈이 얼굴에 내려앉았다. 문득, 곧 사라질 눈송이지만 이것도 조국의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고마웠다. 눈발 사이로 ‘비를 피하는 집’ 피우정(避雨亭)이라는 편액이 보였다. 노산 이은상이 짓고 쓴 글씨였다. 그러고 보니 10.5평의 시멘트 벽돌집도 동지들이 지어준 오두막이었다. 자신의 인생에 박해와 좌절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동지들의 마음이 오두막과 편액에 스미어 있었다.

김성숙은 외출을 포기했다. 방으로 들어와 누운 채 몸을 녹였다. 연탄불이 활활 타는지 아랫목은 뜨거웠다. 기침은 밤이 돼야 터져 나왔다. 약국에서는 천식이라며 보름치 약봉지를 내밀었다. 병원으로 가 입원 치료할 형편은 못되었다. 그러나 김성숙은 동지들이 지어준 오두막 아랫목에 누워 기침이 멎은 것만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날 밤에도 김성숙은 누운 채 일기를 썼다.

‘나의 유일한 명분은 민족국가의 독립과 민주체제의 확립과 행복된 사회의 건설이었다. 나는 이러한 대의명분 하에서 일생을 바쳐왔고 아직도 이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분투하고 있다.’

얕은 잠의 꿈속에서는 자꾸 중국에 두고 온 두쥔후이와 세 아들이 나타났다. 특히 병약했던 둘째 젠이 꿈속에서 울음 섞인 소리로 ‘아버지!’라고 부를 때는 벌떡 일어나곤 했다. 오래 전에 젠이 중국 텐진(天津)에서 인천까지 배를 타고 왔지만 자신을 만나지 못한 채 지인만 보고 돌아갔기에 안타까움이 더했다. 원래는 세 아들 모두가 밀항선을 이용하려 했지만 둘째 젠만 외국상선을 타고 와서 인천 연안부두에 내린 뒤 아버지 김성숙을 만나려고 여기 저기 수소문만 하다가 돌아갔던 것이다.

눈은 꿈속에서도 하염없이 내렸다. 피우정을 지붕까지 덮을 기세로 계속해서 내렸다. 김성숙은 방을 나가지 못하고 옴짝달싹도 못했다. 눈으로 덮인 세상이었지만 피우정만은 자신을 보호해 주는 왕국 같았다. 꿈속이었지만 그런 생각이 들자 피우정이야말로 가장 편안한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김성숙은 새벽녘이 되어 모처럼 기침도 하지 않았을 뿐더러 깊은 잠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