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찬주
ibuljae@naver.com 2013-06-07 (금) 11:47금강산 붉은 승려<28>
민족, 그리고 민족
상해에서 결성된 중국좌익작가동맹에 김성숙 부부도 참여했다. 노신, 모순(茅盾), 정령(丁玲) 등이 1930년에 창립한 단체였다. 김성숙은 연맹의 기관지 <봉화(烽火)>와 <반일민중(反日民衆)>의 편집을 맡았다. 상해사변 직후 김성숙은 광서성사범대학에서 1년 동안 교수로 재직하다가 상해로 다시 돌아왔다. 노신은 여전히 상해에서 반봉건, 반일운동을 하고 있었는데, 중국좌익작가연맹과 상해의 문화계 인사들을 규합하여 ‘상해문화계구국운동선언’등을 외국기자들을 불러놓고 발표하기도 했다. 물론 문화계구국운동선언에 김성숙 부부도 참여했다.
김성숙 부부는 노신과 만나고 온 날은 두세 시간씩 길게 얘기를 나누었다. 그만큼 김성숙 부부는 노신이 주장하는 열변에 공감했다.
“여보, 오늘 노 동지가 한 말 중에 아직도 귓가에 맴도는 얘기가 있소.”
“저도 있어요. 당신은 무슨 말이 좋았어요?”
“중국대륙으로 건너와 고군분투하는 우리 동지들을 위로하는 말이었소. ‘우리 삶을 구원하는 것은 막연한 희망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의 구체적인 행동이다.’ 우리 좌파 동지들은 입이 아니라 온몸으로 싸우고 있으니 공감을 하는 것이오.”
“저는 인민해방을 원치 않는 것 같은 국민당 우파들에게 경고하는 노신 동지의 말이 좋았어요. ‘자유는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돈 때문에 팔아버릴 수 있다.’ 감옥에 있는 나청 동지를 생각하면 더 그래요.”
두군혜는 작년 10월의 사건을 떠올리고 있었다. 나청은 작년 10월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여 ‘전국항일구국연합회’를 결성할 때 ‘5월문예사’ 대표로 상해에 왔다가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 경찰에 체포돼 현재까지도 수감 중이었다. 이후에도 국민당 경찰은 일본의 편을 들어 ‘전국항일구국연합회’ 지도자 7명을 구속해버렸다. 중국인의 처지보다는 일본제국주의 입장을 두둔하는 해괴한 정치노선이었다. 그러니 중국인들은 일본 편을 드는 중국 국민당보다는 농민과 노동자의 해방을 위해 분투하는 중국공산당을 지지할 수밖에 없었다.
“당신이 중국 공산당원이 된 것을 나는 충분히 이해해요.”
“그럼, 당신 나라 조선 동지들은 후회한단 말이에요?”
“사실 우리 동지들 중에는 후회하는 사람도 있소. 우리가 중국으로 올 때는 조국해방을 위해 왔지요. 그런데 중국에 와 보니 일제와 싸우는 중국 사람들은 대부분 공산당원들이었소. 그래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중국 공산당원들과 친분을 맺었던 것이오. 중국의 공산당원들이 항일투쟁을 함께 해주었기 때문에 우리들의 동지가 될 수밖에 없었다는 거지요.”
“그런데 뭐가 문제라는 것이죠?”
“광주봉기 때 우리 동지들이 120여 명이 전사했소. 우리는 중국의 인민해방이 조선의 인민해방으로 이어질 것으로 굳게 믿었기 때문에 목숨을 내놓고 투쟁했던 거지요. 허나 조선해방은 아직도 요원하오. 중국의 인민해방을 위해 치른 우리 동지들 목숨의 대가가 현재까지는 너무 미약하다는 거지요.”
“당신도 그런 생각인가요?”
“솔직히 나도 그렇고 우리 동지들 중에 가장 강골인 김원봉 동지도 그래요.”
두군혜가 믿어지지 않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 말을 하려다 멈추었다. 침대에 누인 아기가 깨어나서 엄마 젖을 찾았다. 둘째아들로 태어나 올해 세 살이 된 아기이름은 두건(杜健)이었다. 두군혜는 아기에게 젖을 물려 잠을 재우고 나서야 말했다.
“당신은 진정한 공산주의자가 아니군요.”
“머리로는 누구보다 공산주의자지요. 누구에게도 공산주의 사상과 철학에 대해서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소. 중국으로 건너왔을 때 왜놈들은 이미 조선과 중국공산당의 적이었소. 그래서 나는 중국의 공산당원들과 친구가 되었던 것이오.”
“가슴으로 공산주의를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군요.”
“그럴지도 모르오. 우리 조선의 동지 대부분은 민족주의자이지요. 공산주의자라기보다는 항일이 지상목표인 민족주의자라오.”
그러나 두군혜는 자신의 생각과 다른 김성숙의 태도에 별로 실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김성숙의 처지를 이해하는 말을 했다.
“중국으로 온 이유는 오직 조선해방운동을 위한 것이었으니 이해는 해요. 저라도 그랬을 것 같아요. 하지만 당신은 민족주의자이지 진정한 공산주의자는 아니군요.”
“그렇소.”
“당신은 임시 공산주의자예요. 조선이 해방된다면 당신은 공산주의를 버릴 것 같아요. 당신 꿈을 이루었으니까.”
“사실 난 아무리 옳다 하더라도 극단을 좋아하지 않아요. 승려생활의 영향일 것이오.” “당신은 좌파나 우파에게 비난받을지도 몰라요. 좌우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기회주의자 혹은 분파주의자라고 말이에요.”
“비난한다면 감수해야지요. 하지만 나는 항일투사이기 전에 승려로서 불법의 중도를 최고의 가치로 알고 살았던 사람이오. 좌와 우를 초월하되 좌와 우를 포용하는 것이 중도의 지혜라오. 지금 나의 중도가 있다면 그것은 조국해방이라오.”
“알아요. 당신이 금강산에서 붉은 가사를 입고 승려생활을 했다는 것을. 그래서 우리 동지들 중에는 당신을 ‘금강산 붉은 승려’라고 하죠. 더 말할 필요 없어요. 당신은 호주머니 속에 늘 승려 도첩증을 넣고 다니는 사람이니까요.”
오랜 만에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눈 김성숙 부부는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잠이 부족한 두군혜를 위해서였다. 둘째아이가 간밤에 잠을 자지 않고 칭얼댄 바람에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기 때문이었다. 김성숙은 둘째아이가 꼬무락거릴 때마다 손으로 토닥토닥 두드려주었다. 오늘밤은 김성숙이 둘째아이를 돌보는 불침번이 되어 밤을 지새울 차례였다. 두군혜는 곧 작은 소리로 코를 골며 잤다.
두군혜에게 고백한 김성숙의 얘기는 모두 진심이었다. 실제로 김성숙은 공산주의자이면서도 민족해방을 최우선 가치로 삼았던 박건웅, 김재호(金在浩), 신정완(申貞婉) 부부 등 20여 명의 동지들과 의기투합하여 이미 ‘조선민족해방동맹’을 결성해 활동 중이었다. 단체의 이름에 공산주의라는 말을 뺐다. 공산주의보다 조국해방이 더 중요하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민족해방이 이루어지고 난 다음에야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를 선택할 수 있다는 독자노선이었다. 이는 프로레타리아 국제주의와 모순을 낳을 수밖에 없는 ‘계급’보다는 ‘민족’을 우선하는 민족주의였다. 항일투쟁의 선봉에 선, 일경이 독립투사 중에서 가장 많은 현상금을 내건 김원봉조차도 민족주의를 앞세워 조국해방을 하자고 동지들을 설득했다.
중일전쟁의 발발 원인인 된 이른바 '노구교 사건'의 장소 노구교 모습
중일전쟁이 발발했다. 만주를 점령한 일본군과 중국군이 마주보고 있던 북경 교외의 노구교(蘆溝橋)에서 벌어진 해프닝이 전쟁의 빌미가 되었던 것이다. 초저녁이었다. 중국군 쪽에서 총성이 났다. 일본군 쪽으로 총알이 날아온 것이었다.
일본군 중대는 즉시 전투태세를 갖추고 인원점검을 했다. 그때 일본군 병사 1명이 사라지고 없었다.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화장실을 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일본군은 사라진 병사가 중국군에게 잡혀갔다고 판단하고 중국군 쪽에 진상조사를 요구했다. 이에 중국군은 완강하게 거부했고 전쟁의 구실을 찾던 일본군은 이를 이유로 전쟁을 개시했다. 1937년 7월 7일의 이른바 노구교사건이었다.
지금까지 일본을 두둔하던 장개석은 태도를 바꾸어 주은래와 여산(廬山)에서 공동으로 대항하자며 막후회담을 가졌다. 그러나 막강한 군사력을 앞세운 일본군은 전쟁개시 21일 만에 북경을 점령했다. 이제 중국으로서는 상해를 방어해야 할 다급한 상황이 되었다. 9월 들어 상해전투가 치열해지자 중국국민당과 중국공산당은 전격적으로 2차 국공합작을 선포했다. 그러나 총공격하는 일본군에게는 역부족이었다. 배수진을 치고 방어했지만 2달 만에 상해는 일본군에게 점령당하고 말았다.
‘조선민족해방동맹’ 회원들을 비롯한 조선 항일투사들은 상해를 급히 떠나 남경으로 이동했다. 김성숙도 남경으로 거처를 옮겼다. 상해 김성숙의 집에서 며칠씩 머물렀던 정율성도 남경으로 따라왔다. 그런데 그때 어디를 가나 연안으로 떠난 장지락을 잊지 못하고 있던 정율성은 연안행을 결심했다.
중일전쟁의 광풍이 점점 내륙으로 몰아치던 날이었다. 일본군이 머잖아 남경도 점령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미리 안전한 무한으로 떠나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정율성은 기회를 보고 있다가 두군혜에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했다.
“누님, 연안으로 가겠습니다. 도와주세요.”
“싸오쩡, 연안은 누구나 가고 싶어 하지만 아무라도 들어갈 수 없는 곳이에요. 장지락 동지도 얼마나 힘들게 갔는지 알잖아요.”
“누님이라면 저를 도와줄 수 있다고 믿어요. 연안에는 섬북공학(陝北公學)도 있고 항일군정대학도 있고 무엇보다 노신예술학원도 있다고 그래요. 그곳에서 음악도 공부하고 항일의지를 다지고 싶어요.”
“장지락 동지도 만나고 싶은 거죠?”
“장 선배님과 연안에서 만나자고 약속한 것은 사실이죠.”
김성숙 부부는 물론 매형 박건웅도 정율성의 연안행을 허락했다. 박건웅은 늘 입고 다니는 남루한 외투 차림이었다. 생활고 때문에 아내와 자식들을 국내로 보내고 나서는 빨래도 제때에 못하는지 외투에서 퀴퀴한 냄새가 났다.
“매형, 누님이 없으니까 불편하시죠?”
박건웅은 어색한 표정을 짓더니 동문서답을 했다.
“처남, 편지하게. 우리도 장 동지 소식이 궁금하거든.”
“저는 장 선배님과 달라요. 편지를 자주 쓸 겁니다.”
박건웅은 정율성과 헤어지는 날에도 또 그 외투를 입고 나타났다. 몸이 달포 전보다 더 수척하여 낡은 외투가 유난히 더 헐렁해 보였다. 두군혜가 저녁식사 자리를 마련해 집으로 초대했다. 두군혜가 담근 김치 냄새가 방 안을 진동했다. 정율성은 김치 냄새만 맡고서도 감격했다. 아내와 자식을 국내로 보내고 나서 가끔 우울해 하던 박건웅도 김치냄새를 맡더니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식사 전에 정율성이 바이올린을 들고 일어났다.
“전 누님 덕분에 연안으로 가게 됐습니다. 상해에서, 남경에서 늘 신세만 졌습니다. 무엇으로 은혜를 갚을지 막막합니다.”
“싸오쩡이 음악으로 우리를 가끔 즐겁게 해주었어요. 싸오쩡의 음악을 듣지 않았더라면 우린 더 지쳤을 거예요. 그러니 너무 미안해하지 마세요.”
“누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저도 좋은 음악을 만들어 보답하겠다는 용기가 납니다. 오늘은 누님과 김성숙 선배님과 매형께 제가 작곡한 노래를 연주하겠습니다.”
정율성이 바이올린으로 연주한 곡은 항일투쟁의지를 고취시키는 노래였다. 정율성은 최근에 작곡한 <유격전가>, <전투하는 여성의 노래>를 연달아 연주했다. 마지막에는 바이올린을 켜면서 작년에 ‘5월문예사’ 창립대회에서 즉흥적으로 작곡했던 <오월의 노래>를 큰소리로 노래했다. 식사가 끝나고 헤어질 무렵에는 <아리랑>을 석별의 마음이 담긴 선율로 슬프게 연주했다.
다음날, 정율성은 자신의 결심대로 연안을 향해 떠났다. 두군혜가 중국공산당 지하당원인 선협부(宣俠父)를 소개해주었고, 선협부는 서안 팔로군 판사처 주임 임백거(林佰渠)에게 자필로 소개장을 써주었기 때문에 수월하게 떠날 수 있었다. 서안 팔로군 판사처는 연안으로 가는 혁명투사들을 최후로 성분 검사하는 중국공산당 기구였는데, 선협부의 소개장을 든 정율성은 그곳마저 무사히 통과했던 것이다. 크게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