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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은 강물 같은 것이네”<br>정찬주 장편 ‘금강산 붉은 승려’22
정찬주 ibuljae@naver.com 2013-05-16 (목) 09:58
금강산 붉은 승려 <22>
이육사의 첫 시
보슬비가 오락가락 내렸다. 김성숙은 광주에서 3년째의 봄을 보내고 있었다. 광주의 봄은 조선의 봄과 달랐다. 비가 내리면 주강은 금세 흙탕물로 변했다. 비가 내리지 않아도 광주의 강이나 시냇물은 맑지 못했다. 이를 빗대어 장지락은 가끔씩 농담 삼아서 조선 사람들은 비참하긴 하지만 푸른 강에서 투신자살하는 것을 다행으로 여길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중산대학 교수로 노신(魯迅)이 왔다는 것은 학생뿐만 아니라 광주시민들에게 대단한 화젯거리였다. 김성숙은 사무실 창을 타고 흐르는 빗물을 보면서 <혁명운동>에 노신 특집을 다루자고 장지락에게 말했다.
“노신 작가가 북경대학을 떠나 우리 대학으로 왔대. 특집을 다뤄보는 것이 어때.”
“형, 저는 이미 강의를 들었어요.”
“장 동지가 노신 작가의 강의를 들어봤다고?”
“학생들로 강의실이 넘쳐서 강의실 창 밖에서 겨우 들었어요.”
“대단한 열긴데.”
“성숙 형도 노신 교수의 중국소설사략(中國小說史略) 강의를 들어봐요.”
시 습작을 할 정도로 문학을 좋아하는 장지락이 노신 강의를 청강했다는 것은 이해할 만한 일이었다. 노신은 살아 있는 중국작가 중에서 최고 인기작가였던 것이다.
“의학도였던 노신 교수가 왜 작가가 되었는지도 우리 조선 처지와 비슷해서 공감이 되더라구요.”
장지락은 노신에 대해서 이미 자세하게 알고 있었다. 노신은 관비유학생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고분학원(弘文學院)에서 일본어 및 물리와 과학을 공부한 뒤 센다이의학전문학원에 입학했다는 사실은 김성숙에게도 흥미로웠다. 그런데 노신은 의전 2학년 때 환등기로 스크린에 비친 사진들을 보며 진행하는 세균학 수업이 끝난 뒤 시사적인 화상을 본 적이 있는데, 바로 그것이 그가 의학도에서 문학가로 전향하게 된 계기가 됐다고 한다. 시사필름의 내용은 러일전쟁의 뒷얘기였다. 시사필름은 러시아를 도운 중국인이 일본군에게 잡히어 처형당하는 사실적인 장면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현장에 모인 수많은 중국인들은 아무도 일본의 침략에 분노하지 않고 구경만 하고 있었던 것이다. 순간 노신은 중국인의 정신을 개조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며, 그 수단은 노신 자신에게 있어서는 문학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노신은 의학도의 길을 단념하고 민중을 각성시키는 글을 잡지 등에 기고했다. 또 한편으로는 반봉건, 반식민지 정신을 소설화한 유럽의 단편소설들을 번역했다. 중국에서도 혁명의 전사들이 출현해야 한다는 갈망 때문이었다. 노신은 의전 때부터 반봉건운동을 하는 단체에도 이미 가담해 활동했다. 반청(反淸) 활동을 하는 광복회 회원이었던 것이다.
1909년 중국으로 돌아온 노신은 고향인 절강성 소흥에서 교원이 되어 중국고전을 연구하고 유럽의 문학작품들을 번역했다. 손문이 주도한 신해혁명이 성공한 듯 보이자 국민정부의 교육부원 자격으로 북경으로 거처를 옮겼다. 봉건시대의 도덕을 통렬하게 부정하고 인간해방을 주장하는 소설 <광인일기>를 발간했고, 이어서 북경대학 재직중에 중국사회와 민중의 현실을 그린 소설 <아큐정전>을 발표하여 또 다시 중국문학계를 놀라게 했다.
그러나 노신은 1926년 장작림군벌이 데모하는 학생들과 시민을 무자비하게 살상하는 현장을 목격하고는 북경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노신은 북경을 떠나기 전 개혁하려다 100일 만에 좌초한 청 마지막 황제인 광서제(光緖帝)의 무덤인 숭릉을 찾아가 하직하면서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피에 젖었던 중원은 억센 풀이 무성하고
얼어붙었던 대지에는 봄경치가 아름답네.
영웅에게는 변고가 많아 모략꾼에 병들고
숭릉에 눈물 뿌리니 저녁 까마귀 시끄럽네.
血沃中原肥勁草 寒凝大地發春華
英雄多故謀夫病 淚灑崇陵躁暮鴉
“우리 조선 민중도 역시 3.1독립운동 때만 그랬지 지금은 왜놈들과 투쟁하기보다는 물러서서 방관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아요.”
“방관이 아닐 거네. 강물이 조용하게 흐른다고 죽은 강물이라고 할 수 없거든. 때가 되면 강둑도 무너뜨리며 흐르지 않던가. 민중은 강물 같은 것이네. 평소엔 순하지만 격랑으로 돌변하기도 하거든.”
“성숙 형, 노신 교수 강의를 청강하는 조선 학생이 또 있어요.”
“누구인가?”
“사실 저는 작년에 김원봉 동지를 만나던 날 통성명했어요. 이활(李活)이란 사람입니다.”
“아, 나도 작년에 윤세주 동지에게 소개받고는 통음한 적이 있네. 생각보다 호주가더군. 이활 동지가 의열단 단원으로서 광주에만 있지 않고 압록강을 자주 넘나들기 때문에 우리 광주 동지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것 같네.”
이활은 가명이었다. 본명은 이원록(李源綠), 훗날 이육사로 더 잘 알려진 의열단 단원이었다. 내성적인 성격 탓으로 그는 모임에 얼굴을 거의 내밀지 않았다. 다만 1927년 들어서는 노신 교수의 강의를 청강하는 등 은밀하게 활동하던 태도를 바꾸었다. 작년에 창립했던 유월동지회에도 신임 집행위원으로 가담했다.
이육사(왼쪽)와 노신(오른쪽)
이활은 감옥을 나온 뒤 <조선일보>에 <말>이라는 첫 시를 발표하게 되는데, 시는 중산대학의 인연 있는 동지들에게 전해졌다.
흐트러진 갈기
후줄근한 눈
밤송이 같은 털
오! 먼 길에 지친 말
채찍에 지친 말이여!
수굿한 목통
축처-진 꼬리
서리에 번적이는 네 굽
오! 구름을 헤치려는 말
새해에 소리칠 흰 말이여!
두말 할 것도 없이 흰 말(白馬)은 일제에게 고통 받고 있는 이활 자신이거나 항일투사였다. 지금은 비록 지쳐 꼬리 내리고 있지만 네 굽을 번쩍이며 구름을 헤치고 새로운 세상에서 소리칠 것이라는 조국해방의 비원을 담은 시였다.
“장 동지, 육용사(六榕寺)로 김규하 스님을 지금 찾아가볼까?”
“좋습니다. 저도 스님이 어떻게 사시나 궁금했습니다.”
“차응준 스님보다 공산주의 사상에 밝은 분이지. 단체에 묶이는 것을 아주 싫어해서 독립군처럼 투쟁하는 스님이지.”
두 사람은 <혁명운동> 사무실을 나왔다. 내리는 둥 마는 둥 하던 보슬비가 이제는 굵은 빗줄기로 바뀌어 내렸다. 사무실에서 우산을 가지고 나와 폈지만 금세 바짓가랑이가 젖었다. 육용사(六榕寺)는 광효사와 지척의 거리에 있었다. 경북 의성 출신인 김규하도 김성숙을 따라서 용문사를 떠나 북경을 거쳐 차응준과 함께 광주로 온 스님이었다.
육용사에 도착한 김성숙은 장지락을 밖에 세워두고 혼자서 육조당(六祖堂)을 들어가 참배했다. 장지락은 기독교 신자이기 때문에 절을 할 줄 몰랐던 것이다. 육조당에는 혜능대사의 좌상이 봉안돼 있었다.
용수(榕樹)란 보리수인데 여섯 그루의 용수를 보고 소동파가 육용(六榕)이란 휘호를 쓴 뒤부터 육용사가 됐다는 안내문이 보였다. 김성숙이 중국인 승려를 붙잡고 김규하를 물었지만 그도 객승이므로 모른다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할 수 없이 주지를 찾아 묻자 출타했으니 객당에서 기다리라고 말했다.
김성숙은 객당 의자에 앉아서 누군가가 그린 조잡한 소동파의 초상화를 보고는 피식 웃었다. 두군혜 집으로 초대받아 갔을 때 보았던 식탁에 놓인 동파육이 떠올라서였다. 문득 자신이 생무를 왜 먹었는지 근사한 해답이 생각났다. 기름범벅의 느끼한 광동요리를 보고 조선의 담백한 음식이 그리워 생무를 본능적으로 씹어 먹은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객당 벽면의 홍보판에는 소동파의 초상화뿐만 아니라 그가 불자가 된 인연담까지 소개돼 있었다. 빗줄기는 더 거세졌는지 추녀 끝에서 떨어지는 빗소리가 객당을 가득 채웠다. 장지락은 무료한 듯 앉아 있지를 못하고 객당 안에서 서성거렸다. 장지락뿐만 아니라 의열단 단원들은 대부분 익숙한 장소를 떠나면 불안해했다. 그러나 절 분위기를 좋아하는 김성숙은 편하게 앉아서 객당 홍보판에 소개한 소동파의 불교 인연담을 찬찬히 읽어내려 갔다.
소동파가 형주에 있을 때였다. 그곳 옥천사(玉泉寺)에 고명한 승호(承皓)선사가 주석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는 소동파가 한가한 날을 잡아 관리들을 대동하고 찾아갔다. 옥천사 산문에 이르렀을 때 소동파를 맞이하는 승호선사가 먼저 정중하게 물었다.
“대관의 존함은 어떻게 되십니까?”
“나는 칭(秤)가요.”
“칭가라니요?”
소동파는 승호선사의 반문에 진담 반 농담 반으로 대답했다. 승호선사가 의아해 하자 다시 오만불손하게 말했다.
“나는 천하의 선지식을 저울질하는 칭가란 말이오.”
칭이란 저울이란 뜻이므로 자기가 선지식의 법력을 달아본다는 거만하기 짝이 없는 말이었다. 잠시 후, 승호선사가 천둥소리 같은 할을 했다.
“할!”
그러고는 놀란 소동파에게 바로 물었다.
“그렇다면 이것이 몇 근이나 되는 거요.”
소동파는 ‘할’이 몇 근이나 되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소동파는 여지없이 승호선사의 법력에 자존심이 꺾이고 말았다.
김성숙은 의자에 앉지 않고 객당 안을 왔다 갔다 하는 장지락에게 물었다.
“장 동지, 저 육용이란 탁본 글씨는 소동파가 쓴 모양인데 무슨 마음으로 썼을까?”
“소동파도 불자였으니 당연히 불심에서 썼겠지요.”
“아마도 여섯 분의 부처님을 참배하는 마음으로 쓰지 않았을까 싶네. 인도에서는 지금도 보리수를 부처님 대하듯 한다고 그러거든.”
김규하는 두 사람이 기다리다가 막 돌아가려는 순간 나타났다. 누더기 승복 자락이 비에 젖어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마치 물에 빠졌다가 나온 사람의 복장 같았다. 그러나 김규하는 자신의 젖은 복장에는 개의치 않고 두 사람을 보더니 활짝 웃으며 합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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