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찬주
ibuljae@naver.com 2013-04-19 (금) 11:24
금강산 붉은 승려<14>
젊은 지도자
김성숙과 장지락은 협화의학원 교문 앞에서 북경대학으로 갔다. 북경대학 도서관 현관에서 모택동을 만나기로 약속했던 것이다. 멀리 북경대학이 보일 때쯤 인력거꾼들이 다가와 호객을 했다. 그때마다 장지락이 젊잖게 거절했다. 인력거꾼 중에는 자신들과 같은 처지인 가난한 대학생도 끼어 있었다. 인력거꾼들은 두 사람의 부스스한 모습과 남루한 차림을 보더니 더 이상 따라붙지 않았다.
장지락은 북경대학 교문을 들어선 뒤 앞장서서 도서관으로 가는 지름길로 갔다. 이대소 교수가 도서관 관장으로 재직할 때 그를 한 번 찾아간 적이 있었던 것이다. 교정은 한눈에 다 볼 수 없을 만큼 넓었다. 건물들이 여기저기 들어서 어수선할 정도였다. 새롭게 조성하고 있는 정원은 조경수를 심으려고 군데군데 파헤쳐져 있었다.
어느 대학이나 도서관은 늘 학생들로 붐비기 마련이었다. 은자라도 되는 것처럼 도서관에 상주하며 독서하는 독서광도 있었지만 신문이나 잡지 등을 읽으며 강의시간을 기다리는 학생들도 많았던 것이다. 김성숙과 장지락은 서성거리는 학생들 사이에 서 있는 모택동을 바로 알아보았다. 그는 현관 계단 위에 동상처럼 무뚝뚝하게 서 있었다. 키가 컸으므로 젊은 학생들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김성숙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31세의 젊은 모택동을 바라보았다. 넓은 이마에는 야심이 담겨 있었고, 한 가운데로 가르마를 탄 검은 머리는 좌고우면하지 않고 직선적으로 행동하는 성격을 암시했다. 시선은 무언가를 주시하고 있는 것처럼 흔들리지 않았다. 얼굴 윗부분의 느낌만으로는 그의 면전에서 한 마디도 말을 붙이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러나 통통한 코와 둥그스름한 입술, 그리고 부드러운 턱 위에 있는 점 등은 다정하고 친숙한 이웃을 연상케 했다. 장지락이 모택동에게 먼저 다가가 인사한 뒤 김성숙을 소개했다.
“잡지 <혁명>의 주필이십니다.”
“모택동이라 하오.”
“김성숙이라 합니다.”
모택동이 손을 내밀었다. 체구에 비해서 작은 손이었다. 김성숙은 부지런한 느낌을 주는 그의 작은 손을 보자 갑자기 친밀감이 들었다. 압도할 것 같은 큰 키와 달리 작은 손은 겸손했다. 김성숙의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김성숙은 모택동의 말을 잘 알아듣지는 못했다. 아직 북경의 중국말도 서툴렀으므로 호남성의 사투리까지 쓰는 모택동의 말을 완전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당연했다. 김성숙과 장지락은 모택동이 안내하는 이대소 연구실로 따라갔다. 모택동은 조심스럽게 걷지 않았다. 교수연구실 복도를 쿵쿵거리며 걸었다. 국민당 상해지부의 조직부장이 된 자신의 존재를 조선의 유학생들에게 과시하는 면도 있었지만 원래가 공손한 성격은 아니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지나치게 예절을 강조하는 유교를 답답하고 낡은 것으로 여겼다. 소산(韶山)에서 논밭을 일구고 살았던 아버지를 닮고 싶지 않은 영향도 컸다.
이대소는 강의를 들어가 자리를 비우고 없었다. 연구실을 지키고 있던 학생들이 나가자 책들이 빼꼭하게 들어찬 연구실에 세 사람만 남았다. 중국 공산당 창립자 중 한 사람답게 이대소 연구실의 삼면은 중국역사, 공산주의와 무정부주의, 서양철학의 책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모택동은 그 많은 책들을 대부분 읽었다는 표정인 듯 고개를 끄덕끄덕하면서 장지락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반년 동안 도서관에 처박혀 책만 보던 때가 있었소. 주로 서양철학 서적들이었소. 특히, 나는 한때 톨스토이를 흠모했소. 누구나 젊었을 때 톨스토이 소설들은 꼭 읽어봐야 해요.”
“톨스토이를 왜 좋아하십니까?”
장지락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 그 바람에 장지락의 입속에 있던 침이 김성숙에게 튀었다.
“러시아의 톨스토이같이 철학적이고 윤리적인 작품을 쓴 위대한 작가가 중국에 한 명만 있다 해도 우리 국민의 낡은 사상을 씻어내는데 훨씬 더 쉬울 거라고 생각하오.”
“아, 저도 톨스토이를 아주 존경합니다. 중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톨스토이 <인생독본>을 늘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읽고 있을 정도니까요.”
김성숙이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모 동지는 문학이 낡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작가는 혁명가와 처지가 비슷하오. 꿈을 버리지 않는 야심가라는 점이 같소. 현실주의자들이 혁명가를 꿈만 꾸고 사는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비난하지만 말이오. 그러나 패배하지 않는 꿈은 자기를 극복할 수 있는 강인한 자들만이 갖는 것이오.”
모택동은 13세부터 시를 쓰기 시작하여 지금까지 수백 편도 넘게 습작하고 있다는 얘기도 했다. 제일사범하교 시절에는 정치적인 구호 같은 시상(詩想)들을 생각나는 대로 일기에 메모했다고 웃었다.
하늘에 맞서 싸우는 것은 얼마나 큰 기쁨인가.
대지에 맞서 싸우는 것은 얼마나 큰 기쁨인가.
사람들에 맞서 싸우는 것 또한 얼마나 큰 기쁨인가.
어느새 모택동은 조선에서 온 두 사람의 유학생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의자 등받이에 기댄 채 다소 거만하게 말하던 자세를 바꾸었다. 모택동이 자세를 곧추세우며 말했다.
“김 동지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소?”
“사회주의 사상을 소개하는 잡지 <혁명>을 만들고 있습니다.”
“잡지는 위대한 교사나 다름없소. 한 권의 잡지가 수많은 사람들에게 사상적으로 영향을 주기 때문이오. 나도 장사(長沙)에서 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상강평론(湘江評論)>이라는 주간지를 만들었소. 장사의 농민, 도시노동자들을 모집해서 야학교사도 해봤지만 잡지의 효과보다는 못했소. 잡지의 힘이란 정말 대단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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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모택동이 호남제일사범학교에 다니던 23세 때에 3일간 머무렀던 밀인사 골방. 지금도 모택동의 사진과 함께 당시의 모습이 잘 보존되어 있다. 사진=유동영 작가.
모택동이 말한 학교란 호남제일사범학교였다. 그는 2학년 때부터 학생회 간부를 지내면서 1918년 6월까지 꼭 5년 반 만에 학교를 졸업했던 것이다. 졸업반 학생들에게 모범생으로 선정되기도 한 그는 그해 가을 어머니가 죽은 뒤 북경으로 갔다가 제일사범학교 은사였던 양창지 교수의 추천으로 북경대학 도서관장이던 이대소 교수를 찾아가 도서관 열람실 사서로 일하면서 강의와 강연을 들으며 정식으로 좌파 이론을 접했다. 다음해 4월 다시 장사로 돌아온 모택동은 제일사범학교에서 운영하는 소학교에 교사로 취직이 됐고, 이때 호남학생연합회의 기관지 <상강평론>을 창간했던 것이다.
<상강평론>의 성공은 모택동의 필력을 중국의 좌파 학생들에게 알리는 절호의 기회였다. 창간호 2000부는 하루 만에 다 팔렸으며 2호부터는 5000부를 인쇄했다. 자신에게 공산주의 이론을 설명해 주었던 북경대학 이대소 교수는 자신이 간행하는 잡지 <매주평론(每週評論)>에 <상강평론>은 훌륭한 형제지라고 극찬했다. 실제로 <상강평론>은 호남의 군벌에 대항하는 학생, 농민, 노동자의 조직들이 하나로 묶이는 계기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호남의 군벌은 <상강평론>을 그대로 놔두지 않았다. 무장병력을 인쇄소로 보내 잡지를 회수하고 폐간시켜버렸다. 호남학생연합회도 해체시켰다. 이후 모택동은 장사의 의학도들이 만드는 <신호남(新湖南)> 잡지를 맡았으나 역시 얼마 되지 않아서 그만 두어야 했다. 그러나 모택동은 그 사이에 학생들 사이에 유명한 좌파논객이 되었고, 호남의 대표적인 신문 <대공보(大公報)>에 글을 기고하는 기회를 얻었다.
모택동은 그때가 떠오른 듯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김성숙은 순간적이나마 모택동이 자신과 같이 편집 일을 했던 사람이었으므로 더욱 친밀감을 느꼈다. 모택동이 다시 말했다.
“호남의 모기는 독하다오. 그러나 나는 모기장 속으로 들어온 모기들의 공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밤새 잡지 원고를 썼소. 뿐만 아니라 나는 잡지가 나오면 그걸 들고 거리로 나가 행인들에게 직접 팔기도 했소. 돈 때문이 아니라 한 사람이라도 우리 학생동지들이 벌이는 운동에 노동자들의 지지를 받기 위해서 그랬소.”
모택동의 얘기를 듣는 동안 김성숙은 놀랍게도 그에게서 여러 가지 면모를 발견했다. 장지락도 마찬가지였다. 모택동은 교육자와 혁명가, 그리고 시인, 지독한 독서광, 자신의 주장을 펼치는 논설가, 잡지 편집인 등등 아주 다양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장지락은 모택동이 하는 얘기를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속기했다. 정리가 되면 <혁명>에 게재할 생각이었다. 이윽고 김성숙은 화제를 돌렸다. 자신이 한때 조선의 승려였다고 말했다.
“모 동지, 저는 금강산에서 붉은 가사를 걸치고 수행하던 승려였습니다. 이곳 북경의 조선인 유학생들이 저를 ‘금강산 붉은 승려’라고 합니다.”
“그래요? 나도 어린 시절에는 불자였소. 어머니를 따라 절에 가곤 했소. 나와 어머니가 힘을 합쳐 아버지에게 불교를 믿게 하려고 노력했던 적도 있었소. 아버지에게 욕만 먹고 말았지만 말이오. 하하하.”
김성숙도 따라 웃었지만 모택동의 웃음소리가 훨씬 더 컸다. 너털웃음을 터뜨리는 모택동의 모습은 마치 호랑이가 포효하는 것 같았다. 김성숙은 압도당하는 느낌이 들어 어깨를 움츠렸다.
“아버지께서는 불교를 싫어했습니까?”
“아니오. 나중에는 불교에 대해 존경심을 조금 나타냈소. 때때로 향을 피웠고 집안 거실에 불상을 들여놓아도 좋다고 허락했소. 그러나 그뿐이었소.”
어린 모택동의 고향 소산에 살던 사람 중 여자들은 대부분 불교신자들이었다. 불교신자들은 계곡 너머 봉황산에 있는 절로 올라가 불공을 드렸는데 모택동의 어머니도 마찬가지였다. 모택동은 9살 전후로 어머니를 따라 절에 가곤 했다. 집안 거실에는 흑단나무 탁자 위에 불상을 모셨는데 어머니가 아버지를 설득한 뒤의 일이었다.
“영험이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아주 심하게 아팠을 때 어머니를 따라 봉황산 절로 가서 향을 피우고 재를 먹기도 했어요.”
모택동은 자신의 불교 신앙에 대해서 상세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15세 때는 어머니가 앓아눕자 남악 관음대를 찾아가 기도하기도 했다. 이후에는 제일사범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 호남성의 다섯 현을 한 학우와 함께 6주 동안 무전여행으로 돌았는데, 그는 주로 사찰에서 숙식을 해결했다. 영양현에 있는 위산(爲山) 밀인사(密印寺)에서는 3일 동안이나 머무르면서 주지스님과 토론하며 자신의 신념을 굳히기도 했다. 특히 27세 때 ‘문학서사’라는 서점을 운영하며 여금희(黎錦熙)에게 보낸 편지에서 불학(佛學) 도서를 구해서 보내달라고 요청하여 <금강경>, <화엄경>, <육조단경>을 접했던 바, 그중에서도 <육조단경>은 전문가 수준으로 이해했다. 그는 육조 혜능을 선종의 진정한 창시자이자 중국불교의 조사(祖師)라고 평했으며 <육조단경>의 가치를 억압받아왔던 중국인민 개개인의 자주성을 표출시킨 중국 철학사상 거대한 약진이라고 극찬했다. 그러면서 모택동은 혁명 동지들에게 최고의 불경은 바로 노동인민의 불경인 <육조단경>이며 노동인민은 바로 혜능이었다고 소개했다.
혜능에 관한 얘기가 나오자 김성숙도 물을 만난 고기처럼 활기를 찾았다.
“그렇습니다. 나무꾼인 혜능대사야말로 노동인민입니다. 저는 인민의 해방정신과 평등사상을 혜능대사의 말씀에서 찾았습니다.”
김성숙이 신분의 귀천을 떠나 인민 해방정신과 평등을 찾은 <육조단경>의 구절은 나무꾼 혜능이 홍인대사를 만나는 첫 장면이었다. 홍인대사가 “그대는 어디 사람이고 무엇을 구하는고?” 하고 묻자 혜능이 “저는 영남 신주 사람인데 멀리서 찾아와 스승께 절하는 것은 오로지 성불하는 길을 구함이요 다른 것을 구함이 아니옵니다.” 하고 대답했다. 이에 홍인대사가 다시 “영남 사람이라면 오랑캐인데 어찌 성불을 할 수 있겠는가?” 하고 묻자, 혜능이 “비록 사람에게는 남·북이 따로 있겠지만 불성에는 남·북이 따로 없습니다. 오랑캐 몸인 제가 스님과 같지는 않지만 불성만은 어찌 차별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당돌하게 말했던 것이다.
“천자도, 노동인민도 다 불성이 있다고 했으니 인민해방이 아니고 무엇이겠소. 혜능대사야말로 진정한 중국불교의 창시자지요. 농민, 노동자 가릴 것 없이 중국인민 개개인 모두에게 자신의 존귀함을 깨우쳐 준 고승이었소.”
모택동은 자신의 턱에 박힌 점을 만지작거렸다. 오늘은 이쯤에서 얘기를 멈추자는 신호 같기도 했다. 실제로 조금 피곤해 보였다. 석양은 어느새 창 너머로 기울고 있었다. 속기하고 있는 장지락의 공책은 3분의 1 정도가 채워져 있었다. 질문지 없이 찾아왔는데 생각보다 많은 얘기를 모택동에게 들었던 것이다. 다만 잡지와 불교 얘기를 주고받느라고 공산주의에 대한 모택동의 얘기를 듣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그러나 모택동은 자신이 북경에 있는 동안 또 다시 만나주겠다고 약속했다. 언질을 받고 나서야 김성숙과 장지락은 의자에서 일어났다.
모택동은 순식간에 그들을 만나기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말하지 않는 그의 얼굴은 난처해질 만큼 무표정하게 변했다. 그가 낡은 저고리와 헐렁한 바지를 입고 있지 않았더라면 겁이 났을지도 몰랐다. 지금까지 얘기하면서 보여주었던 따뜻한 친절이 입을 다무는 순간 어디로 사라져버렸는지 이상한 생각이 들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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