벙거지와 누비장삼

폭설이 그친 뒤 칼바람이 불었다. 흩날리는 눈가루가 방문을 때렸다. 문틈으로 칼바람이 비집고 들어왔다. 정씨 부인은 방문을 열고 나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네 살 된 숙녀가 춥다고 칭얼거렸다. 작은댁이 사는 아래채 굴뚝에서는 연기가 나는데 정씨 부인이 기거하는 큰방은 냉골이었다. 수국사 농감스님이 태허의 소식을 전해준 뒤부터 냉골 방에서 잤다. 승려가 된 남편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날부터 단 한 번도 큰방에 불을 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날마다 사랑방 솥에 쇠죽을 끓이기 때문에 얼음장만은 겨우 면했다. 사랑방 구들과 큰방 구들이 한 굴뚝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정씨 부인은 수국사로 가서 놋쇠 마지(摩旨)그릇들을 닦으려고 했지만 뒷날로 미루었다. 수국사 가는 길도 눈이 한 자나 쌓여 막혀 있었다. 며칠 전 수국사 농감스님이 절의 마지그릇들을 닦아달라고 부탁했던 것이다. 수국사 소유의 논밭을 경작하고 있는 처지이므로 절의 허드렛일을 도와주어야 했다.

정씨 부인은 수국사에서 농토를 넉넉하게 빌려주어 먹고 사는 데는 지장이 없었지만 홀로 커야 할 어린 딸 숙녀를 보면 가슴이 아팠다. 숙녀는 아침에 눈만 뜨면 아래채로 가 놀았다. 태허의 동생이자 작은아버지인 김성호(金星鎬)가 숙녀를 친딸처럼 귀여워해 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요즘에는 식구들 모두가 김성호를 보기 힘들었다. 추수가 끝나고 나서는 아예 용문사나 봉선사, 수국사 객방에서 열흘 이상씩 머물다 오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김성호마저 승려가 되지 않는가 싶어 식구들이 불안해했지만 막을 방도는 없었다.

정씨 부인은 짜다 만 벙거지를 끌어당겼다. 먹물을 들인 굵은 실로 짜가고 있는 벙거지였다. 누비장삼은 동짓날 이전에 무명 천 속에 솜을 넣고 바늘로 한 땀 한 땀 질러 이미 만들어 놓은 상태였다. 어젯밤을 새웠으면 벙거지 모양이 다 나왔을 텐데 자꾸 손이 곱아서 밀쳐 두었던 것이다. 얼굴이 아버지 태허를 빼닮은 숙녀가 말했다.

“우리 방은 왜 불을 때지 않아?”

“추우면 작은엄마 방으로 가 있어라.”

“싫어. 작은아버지가 없잖아.”

숙녀는 정씨 부인이 왜 방에 불을 들이지 않는지를 모르고 묻곤 했다. 정씨 부인으로서는 남편이 차가운 감옥에 있는데 자신만 따뜻한 방에 다리를 펴고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방에 군불을 지피지 않고 사는데 숙녀는 정씨 부인의 마음을 이해할 리 없었다.

“이거는 무엇이야?”

“벙거지라는 모자다.”

“누구 것이야?”

“아버지 것이다.”

“아버지는 어디 있어?”

“서울에 계신다.”

“왜 한 번도 오지 않아?”

“공부를 하시는 중이다.”

태허를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숙녀는 또래보다 영특했다. 이것저것 물어보면서 아버지인 태허를 상상하는 모양이었다. 한 번 질문하면 끝이 없었다. 정씨 부인이 한 마디 해야 멈추었다.

“추우면 어서 작은엄마 방으로 가라니까!”

숙녀가 방문을 열고 나갔다가 다시 들어와 버렸다. 칼바람은 이제 눈보라로 바뀌어 있었다. 눈발 섞인 바람이 무섭게 몰아치고 있었다. 뒷산을 넘어가는 눈보라가 소나무 가지들을 부러뜨릴 듯이 흔들었다. 문풍지가 다급하게 울었다.

“무섭지? 아래채로 가거라.”

“엄마도 작은엄마 방에서 놀자.”

정씨 부인은 숙녀를 업고 아래채로 갔다. 등에 업힌 숙녀가 또 물었다.

“벙거지는 왜 아궁이 속의 재 같은 색이야?”

“아버지는 잿빛을 좋아하신단다.”

숙녀가 또 무언가를 물으려고 하자 정씨 부인이 숙녀의 엉덩이를 치며 말을 막았다.

“그만 물어라, 이것아!”

아버지 없이 크는 숙녀가 불쌍해서 말을 받아주고 있었지만 정씨 부인의 속마음은 불티가 묻힌 화로 속의 재와 같았다. 숙녀가 자꾸 캐묻는 것은 식어가는 재를 헤집어 불티를 찾아내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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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초스님의 배려로 태허스님의 속가 가족들은 수국사 소유의 농토를 빌려 살게 된다.

보름 후.

정씨 부인은 이른 새벽에 보따리 하나를 머리에 이고 집을 나섰다. 수국사에서 서울 서대문까지는 한 나절 이상을 걸어야 했다. 처음에는 숙녀를 데리고 가려 했으나 어린 아이가 걷기에는 먼 거리였으므로 혼자 집을 떠났다. 수국사를 지나서 응달 길을 따라 불광동 어귀에 이르자 아침 해가 떴다. 응달 길은 아직도 눈이 쌓여 있었다. 눈길에서는 조심스럽게 잰걸음으로 걷다가 엉덩방아를 찧기도 했다.

정씨 부인은 마을 당산나무 아래 보따리를 내려놓고 잠시 쉬면서 해바라기를 했다. 때마침 서울로 땔나무를 팔러 가는 지게꾼들이 지나갔다. 지게꾼들은 걸음이 빠르지도 늦지도 않았다. 한결같은 걸음걸이로 무학재를 올라가고 있었다. 정씨 부인도 지게꾼들의 꽁무니에 서서 뒤따랐는데 정오 무렵에야 멀리 서대문형무소가 보였다. 서대문형무소는 무학재 너머 산자락에 붙어 있었다. 지게꾼들 덕분에 서대문형무소까지 지름길로 온 것 같았다.

서대문형무소는 정씨 부인이 지금까지 봐왔던 건물 중에 가장 컸다. 사람 키보다 높은 벽돌담장을 보자 숨이 막혔다. 정씨 부인은 숨을 고른 뒤 정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나 한인 간수가 정씨 부인의 면회신청을 접수받지 않았다. 형무소 자체행사가 있어 면회를 받지 않는다고 거절했다.

“오늘은 면회신청 받지 않으니 돌아가시오.”

“간수님, 면회를 받아줄 때까지 여기 앉아 있겠습니다.”

“내일 오란 말이오.”

그러나 정씨 부인은 항의하듯 정문 밖에서 쭈그리고 앉아 버텼다. 간수는 정씨 부인이 그러거나 말거나 모른 체했다. 그래도 정씨 부인은 면회신청이 받아들여지기를 기다렸다. 벽돌담장 밑에서 짐승처럼 웅크리고 앉아서 밤을 새울 생각이었다.

석양이 기울고 기온이 뚝 떨어지자 일인 간수장이 한인 간수를 데리고 나타났다. 한인 간수가 물었다.

“면회할 사람이 누구요?”

“태허스님입니다.”

“중이 한두 명인 줄 아시오. 이름이 누구요?”

“김성숙입니다.”

간수장이 태허를 아는 듯 심각하게 찡그리고 있던 표정을 바꾸었다. 간수장은 태허(김성숙)의 일어실력을 칭찬했던 일어강사 하야카와 케이조(早川敬藏)를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간수장이 정씨 부인에게 손짓을 했다.

“하야카와 케이조 스키나 오보상다네. 츠이떼 키테구다사이(하야카와 케이조씨가 좋아하는 중이군. 따라 오시오).”

“당신! 운이 좋은 줄 아시오.”

면회를 거절했던 한인 간수가 투덜거렸다. 그러면서 간수장에게 거수경례를 하고는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정씨 부인은 간수장 사무실로 따라갔다. 사무실은 화목난로의 온기로 창에 김이 서려 있었다. 김에 가리어 형무소 안의 옥사들은 흐릿하게 보였다. 간수장 사무실에도 한인 간수가 한 명 있었다. 한인 간수가 화목난로에 장작을 던져 넣으며 말했다.

“보따리를 풀어보시오.”

“누비장삼과 벙거집니다.”

“사제 옷과 모자는 전해줄 수 없소.”

정씨 부인은 보따리를 풀다 말고 한인 간수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간수는 누비장삼과 벙거지를 확인하고는 단호하게 말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보관하고 있다가 출소 날 돌려주는 것밖에 없소. 어떻게 하겠소?”

“전해주신다니 감사합니다.”

“나한테 고마워할 필요는 없소. 수감자 사제품은 돌려주게 돼 있소.”

“간수님, 이 자리에서 태허스님을 만날 수는 있겠지요?”

“나는 위에서 시키는 대로만 할 뿐이오. 소장님 재가가 나야 되오.”

그러나 간수장이 잠시 나갔다 돌아오더니 한인 간수에게 일본말로 지시했다.

“쇼초노 쿄다쿠가 오리따. 고코니 츠레떼 키나사이(소장님, 허락이 떨어졌네. 이리 데리고 오게).”

“이곳으로 말입니까?”

“그렇다.”

한인 간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면회실이 아닌 간수장 사무실로 수감자를 데려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간수장은 형무소 규정을 어겨가며 태허에게 호의를 베풀었다. 아마도 하야카와 케이조가 ‘잘해 주라’고 특별하게 부탁을 한 것이 분명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정씨 부인은 초조했다. 갑자기 입술이 탔다. 한때 남편이었던 태허를 만난다는 것이 반갑기보다는 두려웠다. 무서워서 두려운 것이 아니었다. 승려로 변한 모습과 마주친다는 것이 두려웠다. 입안의 침도 말랐다. 속이 떨려 한 마디도 못할 것만 같았다.

그러나 한인 간수가 혼자 돌아왔다. 간수장에게 일본말로 뭐라고 보고하더니 정씨 부인을 쳐다보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돌아가시오. 김성숙이 당신을 만나지 않겠다고 하오.”

“그럴 리가 없습니다.”

“집 떠난 중이 됐으니 당신을 만나지 않겠다는 것이오.”

“무심한 사람이 스님이라더니.”

정씨 부인은 더 매달리지 못했다. 자신을 아내로 인정해 주지 않는 사실에 정신이 번쩍 났다. 태허는 이제 더 이상 자신의 남편이 아니었다. 숙녀만이 피붙이로서 딸일 뿐이었다. 정씨 부인의 태도를 지켜보고 있던 간수장이 한 마디 했다.

“조센니모 혼모노노 오보상이 이딴다(조선에도 진짜 스님이 있군).”

간수장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도리질했다. 간수장은 정씨 부인의 면회를 거절한 태허의 태도에 감동한 표정을 지었다. 한인 간수를 보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그제야 한인 간수가 정씨 부인에게 “누비장삼과 벙거지는 반드시 전해줄 것이니 안심하라”고 말했다. 한인 간수는 약속을 지켰다. 태허에게 누비장삼과 벙거지가 전해진 것은 두 달 뒤 태허가 출소한 날이었다. 태허는 누비장삼에 벙거지를 쓴 모습으로 서대문형무소 정문을 나섰던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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