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연재 > 정찬주 장편소설 <금강산 붉은 승려>

“감옥도 한 생각 바꾸면 법당”<br>정찬주 장편 ‘금강산 붉은 승려’-7

정찬주 | ibuljae@naver.com | 2013-03-26 (화) 16:48

〈금강산 붉은 승려7〉


서대문형무소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지 한 달 만이었다. 태허와 함께 붙들려온 지월(이순재)이 갑자기 “독립만세!” 하고 소리를 치자 간수들이 달려왔다. 정의감이 강한 지월은 봉선사가 소유하고 있는 산과 토지를 관리 감독하는 농감(農監)이었는데, 소작농들 편에서 일을 보아온 승려였다. 일인 간수들을 본 태허는 물론이고 봉선사 승려 김석로와 강완수가 그들을 조롱하듯 피식 웃었다. 지월이 또 다시 “독립만세!” 하고 외치자 간수 한 사람이 지월을 겁박하며 끌어냈다.

지월은 지하 고문실로 끌려갔다가 하루가 지난 뒤에야 올라왔다. 못에 찔린 온몸은 멍이 들고 피딱지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수감자에게 가장 두려운 고문 가운데 하나인 상자고문까지 당했던 것이다. 상자고문이란 못이 삐쭉삐쭉 나온 상자 속에 수감자를 넣고 간수가 상자를 흔들어대는 고문이었다. 상자고문을 심하게 당한 수감자는 누구나 예외 없이 얼굴과 등, 엉덩이와 다리 등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었다.

태허는 지월의 볼에 난 상처를 보면서 이를 악물었다. 볼은 구멍이 나 피딱지 사이로 피가 흐물흐물 흘렀다. 지월은 볼에 난 상처와 입술이 부어올라 말을 못했다. 엉덩이가 찢어져서 고통 때문에 앉지도 못했다. 광릉천장터에서 함께 붙들려온 김석로와 강완수는 지월을 붙들고 소리 없이 울었다. 태허도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봉선사 승려들이 받은 죄목은 광릉천장터 만세시위운동 주도와 불온문서 제작 및 유포 죄였다. 경성지방법원은 태허와 지월, 김석로와 강완수가 1919년 3월 30일 광릉천장터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고 등사기로 시위격문을 인쇄하여 남양주 주민들에게 유포했다는 죄로 모두에게 실형을 선고했는데, 태허의 형량은 1년 2개월이었다. 만세시위운동의 가담 정도에 따라 1년에서 1년 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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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허와 독립투사들이 옥살이를 한 서대문형무소 전경

보름 후. 지월은 소동을 일으킨 죄가 더해져 지하 독방으로 이감됐고, 지월의 자리에 사회주의자 김사국(金思國)이 들어왔다. 1919년 4월 하순의 일이었다. 김사국의 죄목은 한성임시정부를 선포하는 국민대회에 참가한 뒤 종로 통의동 부근 주민들에게 불온문서를 유포했다는 것이었다.

김사국은 태허를 보더니 자신을 소개했다.

“스님, 고생이 많습니다. 제 법명은 해광(解光)입니다. 지난 4월 23일 국민대회에 참가했다는 죄로 들어왔습니다.”

김사국이 굳이 법명을 밝힌 것은 수감자들이 승려이기 때문에 호감을 주기 위해서였다. 태허 옆에 있던 김석로가 가르마 머리를 한 김사국을 보면서 물었다.

“우리와 같은 스님이라는 말이오?”

“신학문을 배우기 전에 어머니와 함께 유점사에서 살았지요.”

이번에는 태허가 물었다.

“어머니가 비구니스님입니까?”

“그렇소. 어머니 법명은 안국당(安國堂)입니다. 제가 13살 때였지요. 어머니는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형제를 데리고 서울에서 충주로 내려갔다가 점쟁이가 식구들이 장수하려면 불전에 축원하라는 말을 듣고 유점사로 갔습니다.”

김석로가 웃으며 말했다.

“점쟁이가 용하오. 하하하. 어머니를 스님으로 만드는 신통력이 있으니 말이오.”

“먹고 살기도 힘들고 불공드리지 않으면 저나 남동생이 단명한다고 하니 그랬던 겁니다. 충주에서 유점사까지 한 달을 걸려 걸어갔습니다. 어머니는 바로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고 저는 어머니가 붙여준 독선생(獨先生)에게 한문을 배웠지요.”

나이를 따져보니 김사국은 태허보다 6살 위였다. 김사국은 신학문을 제대로 배워서인지 아는 것이 많았다. 소련의 정세와 사회주의 사상까지 환히 꿰뚫고 있었다. 더구나 김사국은 일본까지 가서 견문을 넓히고 온 지식인이었다. 그는 나이 16세 때 보성중학교에 다니다가 일본으로 건너가 대한흥학회(大韓興學會) 활동하던 중 그만 두고 귀국하여 경성고등보통학교를 들어가 마쳤다고 말했다. 채기두(蔡基斗)와 최린(崔麟)이 초대 회장과 부회장을 맡았던 대한흥학회는 1909년 1월에 크고 작은 동경유학생 모임들을 통합한 연합회 성격의 단체였다.

첫날부터 김사국은 가장 좋은 자리로 가 앉았다. 그에게 몇 마디를 듣고 공감한 태허가 변기에서 조금 떨어진 지월이 앉았던 자리를 권했던 것이다. 김사국은 태허에게 소련과 중국, 일본의 지식인들 사이에 사회주의 사상이 퍼지고 있는 국제적인 흐름을 얘기해주었는데, 이제 조선도 소작농이나 무산자(無産者)들이 긴 잠에서 깨어나 자신의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힘을 모아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김사국의 얘기를 들을 때마다 태허는 새롭게 눈이 떠지는 것 같았다. 고향에 있는 속가만 해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경상도 상산(상주)에서 평북 철산으로 이주해 온 이후 조상 대대로 변변치 않은 농토를 일구거나 부잣집 소작농으로 살아왔는데, 흉년이 들면 서당을 운영하는 할아버지까지도 끼니를 제대로 잇지 못하고 식구들 모두가 배를 곯았던 것이다.

태허는 김사국에게 날마다 비슷비슷한 얘기를 들었지만 지루하지 않았다. 오히려 형무소를 출소하면 김사국과 더욱더 가깝게 인연을 이어가고 싶었다. 김사국에게는 태허가 갖지 못한 국제적인 안목과 사람들을 단번에 설득하는 언변이 있었던 것이다.

태허와 김사국은 소등이 된 밤중에도 손바닥만 한 창문으로 흐릿하게 들어오는 달빛을 보면서 얘기를 주고받았다.

“해광이란 법명은 누가 지어주었소?”

“유점사 주지스님이 준 법명이오. 저도 어머니처럼 머리를 깎고 사미로 살았지요.”

“절에서 비록 3년밖에 살지 않았소만.”

“환속했군요.”

“절이 성격상 맞지 않았소. 나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서울이 그리웠어요. 한문보다는 신학문을 배우고 싶기도 했고.”

“그래서 보성중학교를 갔군요.”

“비구니스님이 된 어머니를 졸라 동생 사민이와 외할머니가 계시는 서울로 내려왔어요. 동생은 절에 놔두고 오려고 했으나 동생이 눈치를 채고 하루 종일 우는 바람에 같이 와 종로에서 살았지요. 저는 그해에 보성학교에 입학했어요.”

동생 김사민은 자신과 달리 성격이 거칠어 어린 나이지만 절에서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몰랐으므로 서울로 함께 왔다고도 말했다. 김사국의 말대로 김사민은 성장해서도 성격이 우직하고 저항적이어서 눈앞에 장애가 나타나면 참지 못했다. 김사민도 형과 같이 사회주의 운동을 하다가 1923년 1월 16일에 출판법 위반으로 2년 징역형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는데 큰 사건을 일으키고 말았다. 부당하게 처우하는 일인 간수가 찬 긴 칼을 빼앗아 그의 머리에 중상을 입혔던 것이다. 간수가 모자를 쓰고 있지 않았더라면 사망에 이를 뻔했던 사건이었다. 부당한 것을 보면 불같이 화를 내는 성격 때문이었다. 이후 김사민은 일인 간수들의 혹독한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정신이상이 돼버렸다. 출옥한 뒤 석왕사로 가 어머니 안국당이 치료하고 간병했으나 결국 미치광이 폐인이 되어 객사했던 것이다.

“일본에서는 무슨 공부를 했소?”

“일본에서 고학하려고 했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어요. 대한흥학회도 별로 매력이 없었지요. 동경유학생들이 회비를 내고 모여서 지덕체(智德體)를 연마하자, 귀국해서 계몽운동을 하자, 뭐 이런 한담을 나누다가 헤어지는 단체였지요. 나로서는 귀가 솔깃해지는 혁신적인 토론은 없고 모두들 점잖게 듣기 좋은 말만 하고 그랬어요. 고학도 안 되고 모임에도 흥미가 없고 그래서 서울로 와버렸지요.”

초가을이 되자, 형무소 감방 안은 살얼음이 낀 듯 추웠다. 여름에는 달구어진 옥사벽돌의 열기와 퀴퀴한 냄새로 견딜 수 없었지만 초가을부터는 뼛속 깊이 냉기가 파고들었다. 그래도 태허를 비롯한 봉선사 승려들은 잘 견디었지만 약골인 김사국은 추위에 약했다. 감기에 걸려 콧물을 흘리곤 했다. 어떤 날은 기침을 심하게 하여 목구멍에서 피가 넘어오기도 했다. 일인 간수에게 약을 원했지만 무시당하기 일쑤였다.

봉선사 강원에서 만났던 일어강사 하야카와 케이조가 태허를 면회 오지 않았더라면 김사국은 큰 병이 도졌을지도 몰랐다. 하야카와 케이조는 태허에게 약속을 지켰다. 약을 일인 간수 편에 넣어 주었던 것이다.

하야카와 케이조는 월초를 안내하여 또 다시 서대문형무소를 찾아왔다. 월초는 하야카와 케이조가 형무소 소장에게 부탁한 덕분에 특별면회를 얻어냈던 것이다. 월초는 면회실에 먼저와 태허를 기다리고 있었다. 특별면회실은 2평 남짓했다. 작은 책상과 의자는 감시하는 간수용이었고, 긴 책상과 의자는 수감자와 면회자용이었다. 태허와 김석로, 강완수는 월초를 보자마자 비좁은 시멘트바닥에 엎드려 절을 했다. 잠시 후에는 간수의 손에 의지해 들어온 지월도 비틀거리며 월초 앞에서 엎드렸다. 월초는 몸이 몹시 상한 지월을 보더니 한동안 말을 못한 채 입술을 떨었다. 태허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주지스님, 저희 때문에 마음고생이 많으시지요? 면목 없습니다.”

“무슨 얘기를 하는 거냐?”

“우리들은 이심전심으로 수행하는 중이 아니더냐. 말하지 않더라도 하늘이 알고 땅이 안다. 삼세 불보살님들이 다 지켜보고 계신다.”

지월이 눈물을 흘렸다. 그러자 월초가 의자에서 일어나 몸을 앞으로 숙이더니 지월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월초의 그 모습에 태허는 콧잔등이 시큰했다. 김석로와 강완수는 고개를 숙여버렸다.

“너희들 속가는 걱정하지 마라. 내가 돌보고 있다. 그러니 너희들은 몸조리를 잘해 무사해야 한다. 건강해야 수행도 잘할 수 있는 것이다. 임제선사가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入處皆眞)이라 했다. 선 자리마다 주인공이 되어 진리의 땅이 되게 하라는 뜻이다. 감옥도 한 생각 바꾸면 법당이다.”

월초가 법문이나 강의시간 외에 태허에게 여러 마디를 한 것은 처음이었다. 작심하고 면회를 와 법문하고 있는 셈이었다. 태허는 월초의 짧은 법문에 감동하여 환희심이 솟구쳤다. 감옥을 법당으로 생각한다면 억울하고 분한 마음이 사라질 것 같았다. 감옥이 비록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부처님의 6년 고행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월초가 면회실을 나가면서 태허에게 한 마디 했다.

“네 속가 식구들은 이미 수국사 근처로 이사 왔다. 수국사에 딸린 논밭이 많으니 아무 걱정하지 마라.”

“스님, 잊지 않겠습니다.”

“허허. 쓸데없는 소리.”

월초는 입을 다문 채 뒤를 돌아보지 않고 휑하니 나가버렸다. 태허는 월초의 뒷모습을 더 보려고 했지만 일인 간수의 손에 끌려 나갔다. 태허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의 입술에서 피가 흘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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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불적운 2013-03-26 17:3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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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초스님의 '감옥도 한생각 바꾸면 법당이다'라는 말씀이 와 닿습니다.
청우 2013-03-26 17:5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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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ㅡ너무  생생합니다.
마치 눈앞에서 감옥의 인물들이 대화를 나누는 듯합니다.
태허가 시대의 방편으로 붉은 가사를 입을 수밖에 없었던
소설의 테마로 한 걸음씩 다가가고 있군요. 오늘도 잘 읽었습니다.
아일랜드 2013-03-26 23:5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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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허스님과 지식인 김사국의 만남,
감옥에서의 고행,
월초스님의 짧은 법문,
소설의 전개가 정말 흥미롭습니다.감사드립니다.
레이첼 2013-03-27 02:2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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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웠던 역사를 제대로 알고 결코 잊지말아야겠습니다.  불행과 행복도 마음먹기에 따라 달라 질 수 있다는 사실이 다시금 진리처럼 느껴집니다.
보산 2013-03-27 15:3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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隨處作主라는 말을 일 주일에 두 번 접하게 됩니다.
한 차례는 주인의식으로 주어진 일을 책임감 있게 하라는 것이었고,
처한 상황에 구애없이 마음중심을 바로 하라는 것이 또 다른 배움입니다.
근엄하시고 장중하신 월초스님의 면회 시 대화가 가슴뭉클하게 합니다.
점심 후 시간을 내어 글을 접하는 기쁨은 入處戒愼의 길을 동경하게 합니다.
존경하는 선생님 좋은 글 ... 즐겁게 감상하였습니다.((합장))
프린세스 2013-03-28 14:3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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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을 공부하는 사람이라 그런지 '감옥도 한 생각 바꾸면 법당이다.' 라는 글이 마음에 와닿습니다.
감사히 잘 읽고 갑니다:)
은행나무꽃 2013-03-28 20:0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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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살이 하고 있던 벗에게 위안이 될만한 말 한마디 못하고 그냥 "편하게 잘 있어라"란 외마디만 되풀이하고 면회실을 나왔던적이 엊그젠데.. 진즉 이 글 귀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入處皆眞)'을 알았더라면 힘든 시기를 보냈던 벗에게 작은 용기를 주지않았을까하고 생각해봅니다.  짧은 면회, 긴 여운..가슴이 뭉클해지고 저절로 눈물이 납니다. 감옥이 학교란 말은 여러번 들었습니다만 법당이란 사실은 오늘 처음 알았습니다.
장비 2013-03-28 20:3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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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자고문은 처음 듣는 고문이다. 얼마나 아플까?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이겨낸 독립투사들에게 감사드립니다.
태허스님의 말씀은 그대로 법문입니다.
"감옥을 법당으로 생각한다면 억울하고 분한 마음이 사라질 것 같았다. 감옥이 비록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부처님의 6년 고행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우리도 어려운 일을 당할 때 부처님의 6년고행을 떠올리면
많은 위안이 될 것 같습니다.
고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겠다는 생각으로
6년동안 거의 먹지도 눕지도 않았던 석가모니 부처님!
새들이 나무인줄 알고 부처님 머리에 둥지를 지었다고 하지요.
이 시대에 태허같은 스님이 나타나시기를 기다립니다.
불자 2013-03-28 22:5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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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초스님, 만세운동하다 형무소에 들어가신 태허스님.
저런분들이 지금 조계종에 계셨으면 하는 생각을 해본다.
스님이면서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며 부처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며 국민들에게 나라의 소중함을 깨우치게 하고...
도박하는 실천승가회 스님들과는 너무도 비교된다.
폭력까지 휘두르는 스님은 국민들에게 불교를 멀리하게 다시 깨우쳐 주는구나...
무진 2013-03-29 09:2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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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릅뜬 눈시울에
눈물이 고여든다.

입술은 찢기워져
헤집어 애달프다.

함성의 부르짖음이
심장마저 찢는다.
깨돌이 2013-03-29 10:3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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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며드는 작은 달빛을 보며 시린 이야기를 나누는 스님들이 애처로우면서도 서로를 위하는 마음이 뭉클합니다. 마음이 통해야 거사를 하는 것이겠지요.
도곡 2013-04-05 09: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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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극악무도 ㅡ그들는 악업에 대한 죄업을  언제 다받을고?  이미 받은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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