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전(保全)은 계승(繼承)과 다르다. 되레 해체가 계승일 수 있다. 이 말은 무슨 뜻인가. 예를 들어보자. 제자가 스승의 은혜를 갚는 방법은 스승이 행했던 방법을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방법, 즉 자기만의 교화와 학문을 행할 때 스승의 학문을 발전적으로 이어갈 수 있는 것이다.

일본의 유명한 고승 잇펜(一遍)은 입적을 당하여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의 교화는 내 일생에 있을 뿐이다. 내가 죽으면 나의 교화도 죽는다. 아니, 죽어야 한다. 너희들의 일생에는 너희들의 교화가 있어야 한다.”

잇펜 스님의 이 유문(遺文)은 불가의 한 전통이기도 배사자립(背師自立)을 말한다. 스승에게 모든 학문과 수행을 배웠더라도 어느 단계에 이르렀을 때는 스스로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자립의 성숙이 있어야 된다는 뜻이다.

혜암선사문화진흥회(회장 성법 스님)가 지난 4월 16일 주최한 ‘혜암선사의 삶과 사상 재조명 세미나’에서 필자는 1994년 조계종 종단 개혁 당시와 1998년 종단분규 사태 당시에 혜암 선사가 중심이 되어 서암, 월하 두 종정스님을 중도에 물러나게 한 것에 대해, 그것이 당신의 본의든 아니든 간에, 아쉬움이 남는다는 점을 논평을 통해 지적했다.

두 종정 스님은 당시나 입적 이후인 지금이나 많은 불자들의 존경을 받는 분들이라는 점에서 혜암 스님의 당시 행보는 아쉬움이 남는다는 소회와 함께 삼고초려를 넘어 열 번, 스무 번이라도 두 종정스님을 찾아뵙고 개혁의 정당성과 종헌종법 질서의 중요성을 설득하는 모습을 보였으면, 설사 실패를 했더라도, 좋았을 것이라는 점을 거론했다.

이 점을 사석에서는 지적하는 분들이 없지 않지만, 공론화하지는 않은 상태에서 나온 첫 발언이라는 점에서 세미나장의 분위기가 일순 변하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민감한 발언, 사실 하기 어려운 발언이라는 점에서 필자 역시 고민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쉬쉬 넘어갈 문제가 아니라는 소신으로 공식 거론을 하게 된 것이다.

이 같은 필자의 논평에 대해 혜암 선사의 상좌이자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다승(茶僧)이기도 한 여연 스님이 답변을 했다. 스님이 내놓은 말씀은 문두(文頭)에서 언급한 ‘배사자립’이었다. 스승이라도 그릇되면 따를 수 없다는 뜻이다. 그것은 당시 종단의 개혁정신을 담은 종헌종법은 종단을 지탱하는 ‘밥’과 같은 것이며, 이 밥을 거역하면 종단은 생명을 잃는다는 월주 스님(개혁종단의 첫 총무원장)의 한 일간지 기고에서 읽었던 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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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암선사의 삶과 사상을 조명하는 첫 세미나 장면.


월주 스님의 회고가 아니더라도, 혜암 선사께서는 이미 생전에 94년과 98년에 두 분의 종정을 ‘부득이하게’ 종정에서 물러나게 한 배경을 신년법어(1999년 1월 1일자 원로회의 의장 새해법어)를 통해 밝힌 바 있다.

“출가인의 삶이란 무엇인가? 근본적인 마음을 요달해야만 스님이라고 한다. 머리를 깎고 먹물 옷을 입어 스님의 모습을 갖추었으면 마땅히 자리이타에 힘써야 하고 유사시에는 이타주의로 나아가야 한다. 우리 부처님께서도 선생을 세 번이나 갈고 필경에 혼자 설산으로 들어가서 정진하셨다. 존장(尊長)이나 선생이라도 적법성의 행위가 아니거나 나에 미치지 못할 때는 존장이나 선생을 따르지 말라, 배사자립(背師自立)하라고 하셨다.

당인불양어사(當人不讓於師)하라. 어진 일을 행할 때는 비록 스승이라 할지라도 양보할 필요가 없다. 왜 그러느냐 하면 스님이 하잔대로 하면 지옥에도 가고 망하기도 하니 본인이 존장과 스님을 도와주기 위하여 책임감을 지켜야 된다. 이 세상에 온갖 물질과 일이 벌어져 있으나 낱낱이 현상 그대로 공한 것이며 모든 차별된 것이 그대로 다 평등하여 실상인 진리인 것이다.”

혜암 선사의 이 같은 법어의 내용은 당시 두 분의 종정을 물러나게 한 것이 바로 사자상승의 한 전통인 배사자립에 해당된다는 것을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배사자립이 평생 장좌불와를 하시고, 수마(睡魔, 졸음)를 완전히 조복 받았으며, 평생 일종식(一種食, 하루 한 끼만 공양을 하는 수행)을 하신 혜암 선사, 종단이 어려움을 당했을 때는 분연히 산문을 나와 종단을 바로잡았던 사자후를 하신 스님의 소신이었음을 새해법어를 통해 분명하게 밝히신 것이다.

혜암 선사의 이 같은 소신은 실제로 개혁종단의 전통과 정통성을 지키고 계승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런데 문제는 종단개혁 20년을 맞는 이즈음, 종단의 모습이 참으로 딱한 모습이 되었다는 데 있다. ‘세모’를 가르친 스승을 답습하지 않고, 세모를 뛰어넘어 ‘네모’를 실천하는 후학들이 다수 배출되어 종단이 건강하고 바르게 우뚝 섰다면, 즉 세속에서 말하는 〈효경〉의 ‘입신양명(立身揚名)’이 되어 혜암 선사의 소신은 마땅히 찬사를 받았을 것이다.

흔쾌하게 동의하는 건 아니지만, ‘개혁이전보다 더 못해졌다’는 자조 섞인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개혁불사에 나름대로 일조했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는 필자는 가슴 한 켠이 씁쓸해짐을 느낀다. 하물며 개인적으로는 형언하기 어려운 ‘아픔’을 무릅쓰고 종단 개혁을 앞장서 견인했던 혜암 선사의 가슴이겠는가.

혜암 선사의 소신이 ‘배사자립’ ‘입신양명’의 평가를 받고자 한다면, 20년 전 선사가 주창했던 종단의 개혁정신을 제대로 선양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 지금의 종단처럼 추하고, 부끄럽고, 차라리 딱한 모습을 갖고서는 결코 혜암 선사의 ‘숭고한’ 뜻과 명예를 되살릴 길이 없기 때문이다.

20년 전(1994년) 종단의 모습이 참으로 암울했을 때, 제대로 된 개혁을 통해 종단을 바로세우는 일에 혜암 선사를 맨 앞에 모시고 헌신했던 분들이 지금이라도 재각성하여 종단개혁의 시동을 걸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리고 그 맨 앞줄에 혜암 선사의 문도들이 서야 함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혜암 선사의 삶과 사상을 ‘학술적으로’ 기리고 선양하는 일도 물론 중요하지만, 종단개혁의 재추진이 먼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