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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성과 쇄신’이란 관점 보다는<br>‘생존과 번영’이 더 절실하지 않은가

윤남진소장 | stupa21@hanmail.net | 2011-05-31 (화) 10:08

크게보기지난 해 겨울 구제역 바이러스가 전국을 전염시켜 가축들이 산채로 매장된 곳이 3천여 곳에 달하고 희생된 가축 수는 무려 348만 마리라고 한다. 안동의 어느 농가의 소수의 가축이 최초의 감염을 일으켰고 감염인자는 이동하는 각종 물체에 달라붙어 순식간에 전국으로 전염되었다. 이처럼 사소한 것이 극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데까지 이르게 되는 그런 전염이 사회현상에도 적용된다.

그 대표적인 것이 범죄전염이론인 ‘깨진 창문 이론’이다. 만약 한 창문이 깨져있고 그것을 수리하지 않고 내버려 둔다면, 지나가던 사람들은 ‘이 집에는 이런 문제에 관심이 없고 책임지는 사람이 없구나’ 하는 결론을 내리고 더 많은 창문이 깨지게 되고 무정부 상태가 거리로 전파 된다는 것이다. 무슨 짓을 하든 상관없다는 신호가 전달된 것이다.(『티핑포인트』,말콤 글래드웰, 2004)

사회적 전염에는 소통(메시지와 네트워크)가 중심

필자는 지난 글에서 결사운동의 성공을 위해서는 지도자들의 진정성이 중요하다고 주장한 바 있다. 왜냐하면 대중이 판단할 때 그것이 가장 강력한 신호역할을 할 것이고 좋은 전염의 정점을 만드는 필수요소가 될 것이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도자의 진정성 문제는 어디까지나 리더십에 관한 문제로 국한된다. 전염을 일으키기 위해서 리더십만큼 중요한 요소가 있는데, 사회운동에서는 ‘메시지와 네트워크’가 특히 중요하다. ‘메시지와 네트워크’는 ‘소통(유통)을 위한 핵심적 기제’이다. 사회적 차원의 운동은 처음부터 끝까지 소통(메시지의 생산과 전파) 그 자체가 중심이기 때문이다.

우선, 메시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이런 질문을 던져보자. 현재의 결사운동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현재의 결사운동에서는 자성, 쇄신, 생명(환경), (종교)평화, 수행, 나눔, (민족)문화 등의 단어가 대표적으로 제시되고 있다. 그리고 자성과 쇄신의 결사 실천선언에는 ‘한국불교의 자존(自尊)을 지키고 본연의 모습을 되찾고자’, ‘종교적 가르침으로 사회를 맑게 하고, 종교적 감동으로 국민과 함께 하는 종교 단체로서 거듭나기 위하여’라고 쓰고 있다. 그러나 이들 단어나 문구들에서 절박감 또는 강력한 성취욕, 흡인력을 유발하지 않는다. 메시지의 고착성이 없다. 그저 ‘늘 중요한 것이고 항상 해야 하는 것’이라는 느낌을 벗어나지 않는다.

메시지에 대해서 또 하나의 질문을 던져보자. 현재의 결사운동은 무엇을 하자는(하라는) 것인가? 물론 계획서를 자세히 읽어보면 훌륭한 실천강령, 실천과제, 실천지침들이 죽 열거되어있다. 그러나 분명하게 전달되는 메시지, 비쥬얼하게 머릿속에 그려지는 메시지, 그럼으로써 머리 속에 착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메시지가 없다.

결사운동은 고착성 있는 한 줄의 문구를 찾아내는 과정일 수도

독자들도 모두 알고 있을 지난 역사 속의 결사의 메시지를 보자.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백장청규), ‘마땅히 명리를 버리고 산림에 은둔하여 달인을 본받아 살자’(정혜결사), ‘부처님 법대로, 부처님 계율대로 살자’(봉암사결사) 어떤가? 한 시대, 한 나라의 불교를 구했다고 평가 받는 운동의 모토다. 물론 사회적 과제와 연결되고 사부대중이 함께 하는 차원이 아니기 때문에 지니는 제한성이 있지만 출가대중에게는 어떻게 하자는 메시지가 분명하지 않은가.

현재의 결사운동은 이상의 두 가지 질문, 무엇을 위한 것이고 무엇을 하자는 것인지가 명료하게 그려지는 어떤 간명한 메시지를 새롭게 창안하여 제시할 필요가 있다. 어쩌면 대중의 기억 속에 고착되어서 어떤 의도한 행동을 유발시키는 단 한 줄의 문구, 그것을 찾아내고 합의하는 과정이 결사의 과정일지도 모른다.

새로운 메시지를 찾아내고자 한다면 필자는 이제 ‘자성과 쇄신’이란 관점 보다는 ‘생존과 번영’이라는 목표지향적인 관점에 섰으면 하는 바람이다. ‘생존’은 무언가 절박한 상황을 공유하는 메시지를 찾는 관점이다. ‘번영’은 결사운동을 통하여 좁게는 한국불교 넓게는 우리사회와 민족이 화평하게 번영하는 그런 미래지향적 성취 지향의 관점에선 메시지를 찾아보자는 것이다. 과거 지향적인 것보다 미래지향적인, 의지지향적인 것보다 구체적이고 목표지향적인, 대중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 쪽 보다는 무언가 해보자는 의욕을 고취하는 그런 메시지를 송출하는 것이 더 호소력과 고착성을 가질 수 있다고 본다.

‘다짐서’가 아니라 ‘계획서’가 필요하다.

그리고 실천과제 또한 목표를 명료히 드러내 주는 것으로 바꿔야 한다. ‘함께 나누고’, ‘강화’하고, ‘구성’하고, ‘정체성’을 강화하고, 활동이나 사업을 ‘전개’하고 하는, 이 모든 용어들은 명료하지 않은 표현들이다.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나 달성된 상태가 명료히 그려지지 않는 표현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해당 조목을 실천과제로 선정 할 때에 구체적인 수치화된 목표, 실천전략, 프로세스 등을 세밀하게 검토하지 않았다는 것에 대한 반증일 수 있다. 하겠다는 ‘다짐’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언제까지, 몇 개를, 몇 %를, 측정기준은 무엇 등과 같은 ‘계획’이 필요한 것이다. 바로 그것 ‘계획화된 목표’를 송출하고 유통시켜야 한다.

필자는 결사운동의 전염 포인트를 만들려면 고착성 있는 메시지와 더불어 ‘신뢰로운 네트워크’가 필요하다고 전제했다. 네트워크에는 메시지가 송출, 연결, 전파되는 인적(조직적)네트워크 뿐만이 아니라, 공동의 실천을 조직하는 것(이것을 상징적 ‘행동네트워크’라고 하자)도 중요하다.

‘신뢰로운’이라는 말을 붙인 이유는 관성적으로 기존의 행정조직라인을 그대로 결사운동의 중심 네트워크로 삼기보다는 재조직 차원의 사고를 가져야 하며, 실천 단위 집합의 규모도 친밀감을 유지할 수 있는 규모로 진행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참고로 인간의 진화 역사에서 친밀감을 가질 수 있는 최대의 집단 규모 즉 사회적 수용한계능력은 150명 수준이라고 한다. 이런 점도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전략 수립에 참고할 만하다.

필자가 직접 이름을 지어 제안하는 ‘상징적 행동네트워크‘란 어떤 캠페인이나 프로그램의 취지나 목적을 잘 이해하지도 못하고 또 그에 공감하지 않는 사람조차도 어떤 특정한 상징적인 행동에는 같이 할 수 있다. 단, 그 행동은 쉽고 주기성이 있어야 한다. 매일 또는 어느 날에 모두가 함께 하는, 결사의 일환으로 진행되는 공동의 상징적 행위를 개발, 실천하는 것도 네트워크 형성과 확장의 중요한 기제다.

필자는 과거 월주스님이 총무원장이던 시절에 주창한 '깨달음의 사회화운동'의 담당자로 일한 경험이 있다. 스님의 의욕이 대단해서 필자가 팜플렛 문구를 초안해서 가지고 가면 직접 한두 용어는 반드시 당신이 쓰고자 하는 것으로 바꿨다. 이 운동이 비록 종단정치의 시비거리가 되기도 했지만 불교의 열악한 사회활동을 단기간에 활성화시킨 중요한 점화 포인트 역할을 했다고 본다.

당시 일종의 사회적 쇼라고 할 수 있지만, 종로거리 일대에서 스님들이 발우를 들고 가면 동원된 불자들이 보시금을 채워 넣는 식으로 ‘자비의 탁발’ 행사를 했는데, 필자는 그런 퍼포먼스가 행동을 촉진하고 자신감을 불어넣어주는 역할도 없지 않았다고 본다. 지금의 모습이 그때보다 더 진화한 사고이며 더 진화한 계획이고 실천이라고 할 수 있을까? <<STRONG>계속> <<STRONG>NGO리서치 소장>

※다음에는 결사운동의 확산과 성공을 위해 중앙(총무원) 차원에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다루어 보고자 한다. 현재 조계종 홈페이지에 게시된 계획서에 의하면 종단실천과제로 ‘종단과 사찰운영에 사부대중 공동체 실현’ 등 4개의 과제를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이처럼 종단의 종무행정과제 중에서 해야 할 과업들도 있지만, ‘결사운동 그 자체’ 혹은 다른 단위의 활동을 촉진(지원)하는 차원에서 종단이 수행해야 할 전략적 실천과제가 별도로 선정되어야 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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