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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발은 끝내 다시 검게 변하기 어렵고<br>붉은 모래로는 황금을 만들 수가 없네

| | 2009-08-31 (월) 10:01

獨坐悲雙鬢(독좌비쌍빈)

空堂欲二更(공당욕이경)

雨中山果落(우중산과락)

燈下草蟲鳴(등하초충명)

白髮終難變(백발종난변)

黃金不可成(황금불가성)

欲知除老病(욕지제로병)

惟有學無生(유유학무생)

홀로 앉아 희끗희끗한 양 귀밑털을 슬퍼하노라니
텅 빈 마루에 어느덧 야밤 이경이 되어 오네.
산중엔 비 내리는 가운데 산과실 떨어지고
등잔 밑에선 가을 풀벌레 구슬피우네.
백발은 끝내 다시 검게 변하기 어렵고
단사(丹砂)로 황금을 만들어 낼 수 없네.
생로병사 고통을 제거하는 이치를 터득코자 한다면
오직 불생불멸의 불도를 배우는 길뿐이네.

*한자풀이

(독): 홀로. (좌):앉다. 端坐(단좌): 단정히 앉다. 宴坐(연좌): 참선. 獨坐(독좌): 혼자 앉아서 참선을 하다. (비):슬프다, 슬퍼하다, 슬픔, 비애. (쌍): 쌍, 짝이 되다. (빈): 귀밑털, 살쩍. 雙鬢(쌍빈): 양쪽 귀밑털. (공): 텅 비다. (당): 집, 터를 돋우어 지은 큰 집, 문지방, 마루, 당당하다. 空堂(공당): 텅 빈 마루(문지방). 欲(욕): 하고자 하다, 하려고 하다, =할 것 같다, 바라다. (이): 둘(두). (경 ․ 갱): 고치다(경), 밤 시각(하룻밤을 5등분한 것의 하나), 다시(갱). 二更(이경): 하룻밤을 5등분한 시각 중 두 번째 시간 즉, 밤 9시부터 11시. (우): 비. (중): 가운데. 雨中(우중): 비가 내리고 있는 가운데. (산): 산(뫼). (과): 실과, 나무의 열매. 산과(산과): 산에서 나는 과일, 산과일. (락): 떨어지다. (등): 등, 등불. (하): 아래, 밑. 燈下(등하): 등잔 밑, 등잔 아래. (초): 풀. (충): 벌레. 草蟲(초충): 풀벌레. (명): 울다, 날짐승이 울다, 소리를 내다. (백): 흰빛, 희다. (발): 머리털, 터럭. 白髮(백발): 흰 머리털. (종): 끝나다, 마침. (난): 어렵다. (변): 변하다, 달라지다. (황): 누른 빛, 누르다. (금): 황금, 돈, 쇠(금속 광물의 총칭), 성씨(김). 黃金(황금): 누른 황금. (불): 아니다, 말라(금지). (가): 옳다, …할 수 있다(가능), 인정(수긍)하다. 不可(불가): 옳지 않은 것, 할 수 없다. (성): 이루다, 이루어지다. 不可成(불가성): 이루어질 수 없다. (지): 알다, 깨닫다, 분별하다. 欲知(욕지): 알려고 하다. (제): 덜다, 제거하다, 없애다, 깨끗이 쓸다, 재앙을 물리치다. (로); 늙다, 늙은이, 쇠하다. (병): 병, 질병. 老病(노병): 생로병사의 줄임말. 除老病(제로병): 생로병사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다. (유): 오직, 생각하다. (유): 있다, 존재하다. (학): 배우다. (무): 없다, 말라(금지). (생): 나다, 낳다, 태어나다. 無生(무생): 모든 현상은 변화하는 여러 요소들이 인연에 따라 일시적으로 모였다가 흩어지고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데 불가할 뿐 생기는 것이 없다는 뜻. 번뇌나 미혹이 일어나지 않는 열반의 경지. 분별하는 인식 주관의 작용이 끊어진 상태. 무생무멸의 세계. 無生無滅(무생무멸): 모든 현상은 변화하는 여러 요소들이 인연에 따라 일시적으로 모였다가 흩어지고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데 불가할 뿐 생기는 것도 없고 소멸하는 것도 없다는 뜻. 無生法忍(무생법인): 불생불멸(不生不滅)의 진리를 확실하게 인정하고 거기에 안주하여 마음을 움직이지 않음. 무생선(無生禪): 생멸(生滅)· 동정(動靜)이 없는 불생불멸의 이치를 닦는 선. 무생심(無生心): 분별 망상 등의 잡념이나 집착을 일으키지 않는 마음. 불생심(不生心). 공심(空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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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끗희끗한 귀밑털을 바라보면 절로 인생무생 절감
인생의 생로병사 과정을 겸허히 받아들이자는 교훈

<해설> 인생의 무상(無常)을 읊조리기는 늦은 가을밤이 제격이다. 새 싹이 나서 꽃이 피는 봄을 지나 녹음이 우거지고 태풍이 불고 천둥이 치는 여름을 겪으면, 오곡백과가 익는 황금빛 가을이다. 가을은 축복의 계절이다. 그러나 가을의 수확을 하고 나면 추운 겨울을 준비해야 한다.

인생도 50대 초반이 되면 지난 세월을 반추(反芻)해 보며 아름다웠던 추억을 회상하게 된다. 희끗희끗한 귀밑털을 바라보면서 얼마 남지 않은 노년을 생각하면 불교 경전을 보지 않아도 절로 인생무상을 깨닫게 될 것이다.

<가을밤에 홀로 선정에 젖음>의 시는 왕유가 50대 초반에 방천별장에서 홀로 좌선(坐禪)하고, 늦은 가을밤의 풀벌레소리를 들으며 인생무상과 학불(學佛)의 돈독한 불심을 읊은 7언율시이다.

인생은 무상한 것이요, 덧없는 것이다. 시간적 측면에서 보면 쉼 없이 변화하는 무상(無常)이요, 공간적(존재론) 측면에서 보면 나라고 할 수 있는 고유한 성질이나 실체가 없는 공(空)한 존재 즉, 무아(無我)이다. 석가모니가 깨달은 진리의 내용이 바로 이것이다. 무상하고 무아인 나의 존재의 실상(實相)을 깨닫는 것이 불교의 목표이다. 이 진리를 깨달은 사람을 부처라고 한다. 무상의 진리를 아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고, 모르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인간은 세상에 태어나면 늙고 병들고 결국은 죽음에 이르는 생로병사의 과정(四相)을 피할 수가 없다.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인생무상의 교훈을 일깨우기 위해서 《아함경》에서 ‘흰 쥐와 검은 쥐의 비유(黑白二鼠, 岸樹井藤)’를 설하였다.

왕유는 가을밤에 홀로 텅 빈 방에 앉아 자신의 늙어감을 슬퍼하고 있다. 어느덧 귀밑털이 허옇게 변했다. 가을비에 산 속의 과일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적막한 가을밤을 더 무겁게 짓누른다. 가을밤 벌레울음소리는 더욱 구슬프고 처량하게 시인의 마음을 고독과 무상의 경지로 몰고 간다. 고요함과 적막함이 동적(動的)으로 변화하여 세월이 무상하게 흘러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이것이 율시(律詩)의 특성인 음성미(音聲美)이다. 한자 성조(聲調)가 갖는 균제미(均齊美)가 잘 나타나고 있다. 왕유는 음악과 미술에 조예가 깊은 달인이다.

왕유의 시에서 ‘산과락(山果落, 과일 떨어지는 소리)’, ‘초충명(草蟲鳴, 풀벌레우는 소리)’ 소리가 성율(聲韻)과 압운(押韻)를 잘 나타내는 신운(神韻)이고, ‘백발(白髮)’과 ‘황금(黃金)’ 색깔이 대구를 이루어 색성오도(色聲悟道)의 완벽한 선적(禪的) 세계를 구가하고 있다. 시불(詩佛)의 경지이다.

경련(頸聯, 3련, 轉聯)에서는 시의 내용이 극적인 전환(轉換)을 이루고 있다. “백발은 끝내 다시 검은 머리로 변화하기 어렵고(白髮終難變), 단사(丹砂)로 황금을 만들어 낼 수 없네(黃金不可成)” 늙음을 되돌려 젊음으로 변화할 수 없고, 붉은 단사를 누런 황금으로 변화시킬 수 없는 만고의 진리를 선언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인생의 생로병사에 대한 과정을 겸허히 수용하고 있다. 부정해 봐야 소용없다.

싯다르타가 6년 고행으로 얻은 지혜가 생로병사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해탈의 길이다. 생사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우리의 삶이 ‘무상과 무아의 바다’에 포위되어 있는 ‘고해(苦海)임을 먼저 인식하야 한다. 이것이 3법인(三法印)에서 말하는 일체개고(一切皆苦)이다.

공의 이치를 깨달아서 진리의 실상(實相)을 관찰하면 생사는 본래 없다. 오고 감이 없다. 우리 본래 마음자리인 불성(자성)의 세계는 중도(中道)의 세계로 불생불멸(不生不滅)이고, 불구부정(不垢不淨)이고,부증불감(不增不減)이고, 불거불래(不去不來)이고, 불일불이(不一不異)의 세계이다. 따라서 삶도 죽음도 없고 오고 감이 없는 공(空)의 세계이다. 우리의 삶은 인연 따라 하늘의 구름처럼 온 곳이 없이 나타났다가, 간 곳이 없이 사라질 뿐이다.

생사가 없고 오고 감이 없는 무생(無生)이 실상의 모습이고, 공의 모습이고, 선의 오도(悟道)의 경지이다. 이 도리를 깨달아야 생사의 집착과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이 세계가 반야 공관(空觀)의 세계이며, 이것을 깨달은 것을 반야 지혜 또는 반야바라밀다라고 한다.

왕유는 미련(尾聯, 結聯)에서 다음과 같이 시를 마무리 하고 있다. “생사의 고통을 벗어나고자 하거든 오직 불생불멸 무생(無生)의 불도를 배우는 길 뿐이다”라고 하였다. 왕유 자신의 생의 철학과 불심을 엿볼 수 있다.

고려시대 보조 지눌국사는 《수심결》서두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삼계를 윤회하는 중생의 고통은 불난 집 속에 있는 것보다도 더한 법이다. 윤회를 벗어나려면 부처를 찾는 길밖에 없다. 부처를 어디서 찾을 것인가? 부처는 곧 마음이다. 마음을 어찌 멀리서 찾을 것인가? 이 몸을 떠나 따로 있지 않다.”

선사들은 마음만 찾으면 생사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강조한다.·

<가을밤에 홀로 선정에 젖음>은 선의 언어를 통해 선의 고요한 정적이 흐르는 선시의 백미이다. ‘독좌(獨坐)’, ‘공당(空堂)’, ‘무생(無生)’은 선의 언어이다. ‘쌍빈(雙鬢)’, ‘백발(白髮)’, ‘노병(老病)’은 무상의 의미를 나타내는 시어이다.

‘욕지(欲知)’, ‘제로(除老)’, ‘유학(有學)’은 구도자의 학불(學佛) 의지를 나타내는 시어이다.

이 시는 고요한 정적을 나타내는 ‘독좌(獨坐)’, ‘공당(空堂)’에서 교묘하게 ‘우중산과락(雨中山果落)’과 ‘등하초충명(燈下草蟲鳴)’의 동적인 시어를 통해 고요함과 적막감을 더욱 심화시켜서 인생의 무상함을 고조시키고 있다.

압운자 빈(鬢), 경(更), 명(鳴), 성(成), 생(生)의 신운(神韻)을 찾아서 압운하여 완벽한 명품 선시를 완성하였다. 백발(鬢)이 다시(更) 슬픔(鳴)을 이기고 무생(生)을 완성(成)해가는 절묘한 글자를 배치하였다. 무상한 인생이 다시 무생의 깨달음을 얻는 기쁨이 물씬 나는 시(詩)이다.

*그동안 필자 김형중 법사의 건강 등 여러 사정으로 연재가 오랫동안 중단되었습니다. 독자 여러분의 깊은 양해 바랍니다. 앞으로는 정기적(월 4회 기준)으로 독자 여러분께 옥고를 전달해드릴 예정입니다. 거듭 이 연재에 관심과 사랑을 당부드리며, 많은 관심과 호응 바랍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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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aaaa 2009-09-12 11:26:58
답변  
법사님 글 애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광팬
의덕 2009-09-15 16:41:43
답변  
왕유의 선시에 몰입하여 너와나가 둘이 아닌 그 경지에서 왕유보다  더 멋지고 알기쉽게 표현하여주심에 감사드리고 오늘도 왕유선시의 세계에서 불교의 깊은 가르침을 배우고 갑니다.
법사님1 2009-09-01 00:35:13
답변  
몸은 다 나으셨나? 옥체 보존 잘 하셔요.
시불 2009-09-01 17:31:05
답변  
왕유가 왜 시불인지를 알아가고 있어요. 감사합니다. 법사님.
김형중 2009-08-31 23:44:54
답변  
오랫만에 인사드립니다. 앞으로는 명품선시100선 원고를 1차적으로 쓰겠습니다.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법사님 2009-09-01 00:34:28
답변  
오랜만입니다. 너무 반갑습니다. 자주 뵈었으면 해요. 좋은 원고 정말 고맙습니다. 잘 읽고 갑니다.
ABCD 2009-09-02 21:18:44
답변  
항상 좋은 글 감사합니다.
ABCD 2009-09-19 18:10:52
답변  
앞으로도 좋은 글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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