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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정찬주와 함께 마음기행 떠나요<br>새연재 ‘정찬주의 마음기행’ 경봉선사 편

정찬주 | webmaster@mediabuddha.net | 2011-03-21 (월) 10:31

경봉스님, 무봉사에서 효상좌 원명스님을 만나다

밀양강 건너편에서 아동산에 자리 잡은 영남루와 무봉사를 바라본다. 대나무가 성성한 산자락이 밀양강 찬물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낙엽이 진 초겨울이라 영남루 밑의 대나무들이 더 푸르다. 대숲의 시퍼런 빛깔 때문인지 남강의 촉석루보다 더 또록또록 깨어 있는 풍경이다.

강변을 거닐다 보니 성악을 하는 시명스님이 생각난다. 통도사에서 시명스님과 동행하여 밀양 무봉사를 난생 처음으로 들렀던 것이다. 벌써 십수 년 전의 일이다. 시명스님이 머물고 있는 창녕 삼성암으로 가는 길이었다.

아마도 그 무렵 무봉사 주지스님은 시명스님의 도반이었던 것 같다. 시명스님은 음대를 다니다가 경봉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성악가 스님인데 목소리가 산울림처럼 아주 깊고 맑았다. 시명스님이 무봉사를 들른 까닭도 그 스님의 염불소리가 그리워 그랬을 것 같다. 시명스님이 내게 ‘무봉사 스님이 염불을 한 번 하면 신도들이 모두 눈물을 흘린다.’고 소개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시명스님은 그 스님의 속가가 전라도이고 판소리를 듣고 자라 염불을 잘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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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강 건너편 아동산에 자리잡고 있는 무봉사 전경.

그러나 나는 그 스님의 염불소리는 듣지 못하고 무봉사를 별 기억 없이 떠났다. 대신 삼성암으로 가는 길에 시명스님으로부터 경봉스님의 상좌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 경봉스님의 상좌는 많았지만 그중에서 효(孝)가 지극했던 세 명의 상좌를 꼽자면 6.25전의 벽안(碧眼)스님, 전쟁 후의 원명(圓明)스님, 그리고 1970년대 이후부터 극락암에 주석해온 명정(明正)스님이라고 말했다. 벽안스님이 극락암에 들어오기 전에 출가한 상좌들은 대부분 환속했거나 다른 문중으로 들어가 버렸기 때문이었다.

벽안스님에 대한 경봉스님의 신뢰는 대단했던 것 같다. 경봉스님과 아홉 살 차이밖에 나지 않는 벽안스님은 통도사 부근의 면사무소 직원 출신으로 8.15해방 전에 극락암으로 출가했는데, 다방면에 재주가 출중한 팔방미인이었다고 한다. 면사무소에서 닦은 깔끔한 행정 능력에다 농사일까지 능수능란했고, 심지어는 바느질까지 잘하여 상좌가 들어오면 솜씨 좋은 아낙네처럼 손수 장삼을 만들어 입혔다는 것이다. 그래서 경봉스님은 벽안스님을 대중 앞에서 ‘감자중’이라고 부르곤 했는데, 감자는 체한 기가 있을 때 생즙으로 먹으면 소화제가 되고, 익히면 음식과 반찬이 되고, 썩어도 물에 담가 두었다가 풀로 쓸 수 있는 말하자면 하나도 버릴 게 없는 먹을거리이기 때문이었다. 결혼하여 늦게 출가했지만 벽안스님은 타고난 성실성과 다재다능한 재주로 통도사 안팎에서 탁월한 수완을 발휘했던 것 같다.

스승을 시봉하는 벽안스님의 지극한 정성은 통도사에서는 전설이다. 경봉스님이 팔십이 넘어 기력이 쇠해지자. 벽안스님 자신도 칠순을 넘긴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찬바람이 쌩쌩 몰아치는 날은 물론이고, 자신의 몸이 편치 않은 날에도 매일 오조장삼을 걸치고 통도사 적묵당에서 10여 리 길을 걸어 올라와서 극락암의 경봉스님에게 문안인사를 올렸던 것이다. 경봉스님이 “벽안 수좌, 나이도 있고 하니 그만 다니시게” 하고 여러 차례 만류했지만 소용없었다.

한편, 원명스님이 경봉스님을 만난 것은 6.25전쟁이 인연이 됐다. 원명스님은 15살에 밀양 무봉사로 출가하여 사미승이 돼 있었는데, 서울 선학원에 볼일을 보러 갔다가 전쟁 중이라 오도 가도 못하게 된 경봉스님이 밀양 손씨들의 도움으로 함께 밀양까지 내려왔다가 무봉사로 올라가서 자연스럽게 사미승 원명의 은사가 됐던 것이다.

그 당시 무봉사는 대웅전과 스님들이 머무는 요사 한 채뿐이었지만 어느 큰절 못지않게 많은 스님들이 분주히 드나들었다고 한다. 선객들이 이미 대오한 경봉스님을 찾아와 자신이 공부한 경계를 점검받으러 오가곤 했기 때문이었다.

구천의 구름 고요하니 학이 높이 나는구나

강을 건너 절이 있는 아동산으로 왔으니 차안에서 피안에 이른 느낌이다. 승용차를 영남루 아래 골목길에 세운다. 더 올라갈 수도 있겠지만 무봉사까지 느릿느릿 걷고 싶다. 예전에 없던 산문이 보인다. 경봉스님이 밟던 산길을 지금 내가 오르고 있다고 생각하니 감개가 무량하다. 특히 산문 오른쪽 두 기둥의 주련이 우주의 철리를 드러내고 있는 듯하다.

사해의 물결 평온하니 용이 편하게 잠들고

구천의 구름 고요하니 학이 높이 나는구나.

四海浪平龍睡穩 九天雲鶴飛高

인간을 소우주라고 하니 우리 마음이 바로 사해의 물결이고 구천의 구름일 것 같다. 마음이 평온하고 고요하면 영혼이 편하게 높이 날지 못할 바 없으리라. 바로 이러한 경지가 근심 걱정이 사라진 안빈낙도(安貧樂道)가 아닐까 싶다. 그런 생각이 들자, 산문을 들어서는 내가 문득 초라해진다. 나는 아직도 탐진치에서 자유롭지 못한 중생인 것이다.

그 무렵 경봉스님을 시봉하던 사미승이 통도사 방장스님이 되어 자애로운 회상을 이루고 있다고 생각하니 발걸음이 조심스러워진다. 그 사미승이 영축산의 큰 어른이 될 줄 누구 알았을까. 그러나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필연이 연출한 모습일지도 모른다. 이 세상 모든 일은 인연 따라 생멸할 뿐인데, 눈 뜨지 못한 우리가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할 따름인 것이다. 올봄에 누군가가 보내준 원명 방장스님의 ‘立春大吉’이란 글씨가 내 산방의 부엌문에 붙여진 까닭도 그러하지 않겠는가.

원명스님을 처음 뵌 것은 내가 경봉스님의 일대기 소설을 집필하기 위해 취재하던 무렵이었다. 다소 포근한 겨울날이었다. 원명스님이 주석하시던 비로암을 오르는데 눈이 내리고 있었다. 극락암과 비로암은 지척의 거리였지만 어느 새 내 어깨에는 흰 눈이 쌓였다. 그날의 풍경을 복기해 보니 다음과 같이 그려진다.

원명스님의 첫인상은 강직했다. 짙은 눈썹과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율사 같은 기운이 서려 있었다. 그러나 언뜻 흘리는 미소 뒤에는 노승의 자비 같은 너그러움이 느껴졌다. 내가 “스님께서 무봉사에서 사셨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하고 말하자 금세 환한 미소를 띠었다.

“아니, 내가 무봉사에서 살았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소?”

“큰스님의 상좌 분에게 들었습니다.”

“맞아요, 무봉사는 내게 고향 같은 절이오. 1951년 내 나이 15살 음력으로 4월에 무봉사로 갔지요. 그때 주지스님은 62세 진갑을 맞은 대월(大越)스님이었어요. 처음 가보니까 사명스님 동상을 만들고 있었어요. 좌대 너비는 어른 다섯 사람 정도가 팔을 벌린 정도였고, 높이는 30자 정도였어요. 3년 동안 진흙으로 다섯 토막을 만든 후 석고를 부었어요. 그런데 석고는 완성됐지만 전쟁 후 비구 대처 싸움이 심해 중단되고 말았지요. 대월스님은 대처 편에서 싸우면서도 시골로 돌아다니며 화주와 징 깨진 것, 놋그릇 등을 여러 차례 모았고 완성된 석고 다섯 토막을 서울로 보냈는데 그후 어찌됐는지 몰라요.”

피난 왔던 경봉스님도 영남루 앞에 사명스님 동상이 서 있다면 부산 서울을 오가는 기차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사명스님을 볼 수 있었을 텐데, 하며 아쉬워했다고 덧붙여 얘기했다. 나는 동상 얘기보다는 경봉스님에 대한 얘기를 듣고 싶어 화제를 돌렸다.

“큰스님 법문 중에 어떤 것이 기억나십니까.”

“난 노장님 회상에서 특별히 법문 들은 것은 없어요. 전국의 수좌들이 몰려드는 극락암 선방 외호만 했으니까. 전생에 노장님에게 빚이 많아 그 빚 갚고 산다는 생각밖에 없었어요. 다만, 하나 있긴 해요. 나에게는 최고의 법문이었어요. 원주생활이 빛도 안 나고 내 공부 좀 하고 싶어 노장님께 ‘스님, 제가 좀 쉬어야겠습니다.’ 하고 말했어요. 그러니까 노장님께서 ‘선방 원주를 하려면 팔지보살이 아니면 못한다’고 그러셨지요. 그러시며 나를 인자하게 한동안 쳐다보시더니 ‘너 알고 내 알고 삼세제불이 알면 됐지 딴 사람이 알아준다고 한들 뭐할 것이노. 그러니 알아주느니 못 알아주느니 하지 말고 더 참고 하그래이’ 하시는 거라요. 중생이 알면 뭐하겠느냐는 말씀인데 이보다 멋진 법문이 어디 있겠소.”

원명스님은 크게 웃고 난 뒤 시자에게 지필묵을 꺼내 먹을 갈게 하더니 모지랑붓을 들어 한 호흡에 써 내렸다.

‘瑞氣滿堂’

서기만당. ‘상서로운 기운이 가득한 집’이라는 뜻의 네 글자였다. 당신의 은사스님의 일대기를 소설로 쓴다고 하니 격려 차원에서 휘호를 선물하신 듯했다. 물론 그 인연은 방장스님이 되시기 전의 일로 비로암에 주석하시고 계실 때였다.

스님께서 출가한 절 무봉사 무량문(無量門)에서 여러 스님들을 다시 생각하고 있다니 헤아릴 수 없는 무량한 시공 속에서 귀한 인연 한 자락이 새벽의 별빛처럼 드러난 느낌이다.(계속)

*이 연재는 통도사보 '보궁'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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