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善도 생각 말고 惡도 생각하지 말라

| | 2008-07-29 (화) 00:00

비 나리는 날 혜능의 흔적 찾아 광주에 오다

밤 열차로 무한에서 광주로 왔으니 편안한 순례길이다. 하룻밤을 1실 4인용 침대칸에서 보낸 것이다. 자정을 넘기면서까지 장 화백과 능여(能如) 거사, 경희대 양 교수 내외분, 그리고 월간 불광의 류 주간과 다담을 나누었다. 늘 느끼는 감회이지만 마음에 맞는 도반과의 순례는 기쁨이 더 크다.

역사에 내리자 굵은 빗방울이 순례 일행을 맞이해준다. 광동성의 선찰(禪刹) 순례는 우중(雨中)이 될 것임을 예감케 한다. 불가에는 비와 관련된 단어가 많다. 법우(法雨), 혜우(慧雨), 우안거(雨安居) 등이 그것이다.

일행이 광주에 온 것은 광효사(光孝寺)와 대감사(大鑑寺)를 참배하면서 육조 혜능의 흔적을 찾아보기 위해서다. 광효사는 혜능대사가 오조사에서 홍인대사에게 의발을 전수받고 나서 15년을 산중에서 은둔한 후 저잣거리로 처음 내려와 삭발 수계한 도량이고, 대감사는 소주(현재의 소관시) 자사 위사군의 청으로 <단경(壇經)>을 설한 장소이다.

광효사(당시는 法性寺)에 오기 전 혜능의 행적은 <법보단경>과 <조당집>에 상세히 나와 있다. 주로 <법보단경>을 참고해서 당시 상황을 재현해 보면 이렇다.

비내리는 광효사크게보기

보리에 나무 없고
거울 또한 거울이 아니다.
본래 한 물건 없나니
어느 곳에 티끌이 일어나랴.

방앗간지기 혜능이 쓴 게송을 보고 대중들이 놀랐다.

“기이한 일이다. 겉모양만 보고 사람을 알 수 없는 일이구나! 어찌 우리가 저런 육신보살을 방앗간지기로 부렸던가!”

그런데 오조 홍인은 대중들이 보는 앞에서 신발로 게송을 문질러버렸다. 혹시나 혜능을 해치려는 사람이 있을까 염려되어서였다. 뿐만 아니라 홍인은 퉁명스럽게 한 마디 했다.

“이 게송 또한 견성이 아니다.”

비로소 대중들이 혜능에 대한 놀라움을 풀었다. 홍인은 다음날에야 방앗간으로 찾아가 혜능을 보았다. 혜능은 여전히 등에 추요석(墜腰石)을 지고 방아를 찧고 있었다.

“도를 구하는 사람은 법을 위하여 몸을 잊는 것이 이와 같아야 하느니라. 방아는 다 찧었느냐.”

“방아는 다 찧었습니다만 아직 키질을 못했습니다.”

홍인, 야반삼경에 혜능에 의발을 전하다

홍인은 지팡이로 방아를 세 번 치고는 나가버렸다. 삼경에 오조당을 찾아오라는 뜻이었다. 혜능은 삼경이 되어 오조당에 들어가 홍인 앞에 엎드렸다. 홍인은 대중이 볼까봐 문에 가사를 둘러치고 혜능에게 <금강경>을 설했다. 혜능은 강설을 듣던 중 ‘마땅히 머문 바 없이 마음을 낼 지니라(應無所住 而生其心).’는 구절에 이르러 대오했다.

홍인은 혜능이 본성을 깨쳤음을 알고 곧 그대가 장부(丈夫)요, 천인사(天人師)요, 불(佛)이라고 말했다. 이때가 삼경이었으므로 아무도 홍인의 전 (傳法)을 알 수 없는 시각이었다. 이윽고 홍인이 혜능에게 돈교(頓敎; 단박에 깨치는 법)와 의발을 전하면서 말했다.

“이제 너를 육조로 삼겠노라. 그러니 잘 호렴하고 널리 중생을 제도하여 앞으로 법이 끊어지지 않게 하라. 내 게송을 잘 들으라.”

유정이 와서 종자를 심으니
인지에서 도리어 결과가 생긴다.
무정은 이미 종자가 없으니
성품도 없고 남(生)도 없다.
有情來下種 因地果還生
無情旣無種 無性亦無生

이때가 661년의 일로 혜능의 나이 불과 23세 때의 일이었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사건이었다. 대중들이 모두 신수를 추종하고 있었으므로, 홍인은 남방인인 데다 글을 모르는 혜능의 신변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광효사 향크게보기홍인이 말했다.

“저 옛날 달마대사께서 처음 이 땅에 오셨을 때는 사람들이 아직 믿음이 없었으므로 이 가사를 전해서 믿음의 신표로 삼아 대대로 이어져 왔거니와, 법인 즉 마음으로 마음을 전하여 누구나 깨치고 스스로 알게 함이니 예로부터 부처와 부처가 이 본체를 전하였고, 조사와 조사가 서로 은밀히 전한 것이 바로 본심이니라. 가사는 다툼의 실마리가 될 터이니 너에게서 그치고 뒤로는 전하지 말라. 만약 가사를 전한다면 목숨이 실낱에 매달린 것과 같으리라. 너는 어서 빨리 떠나거라. 사람들이 너를 해칠까 염려스럽다.”

“어느 곳을 향하여 떠나리까.”
“회(懷)를 만나거든 머물고, 회(會)를 만나거든 숨어라.”
의발을 받아든 혜능이 물었다.
“제자는 본시 남중인(南中人)이라 이곳 산길을 알지 못합니다. 강구(江口)는 어느 곳으로 가야 합니까.”
“걱정하지 마라. 내가 너를 보내주겠다.”

제자 위해 노 젓는 스승의 미소가 세상을 밝히네

홍인과 혜능은 밤길을 걸어 구강역(九江驛)에 도착했다. 마침 포구에는 배가 한 척 떠 있었다. 홍인은 혜능을 위해 친히 노를 잡았고 혜능은 민망하여 노를 달라고 하였다.

“스승이시여, 앉으십시오. 제가 노를 젓겠습니다.”
홍인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
“내가 마땅히 너를 건네주리라.”
혜능은 몸 둘 바를 몰랐다.

“미혹한 때는 스승께서 저를 건네주셨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스스로 건너겠습니다. 건넌다는 말은 하나이지만 그 쓰임은 다르옵니다. 저는 변방에서 태어나서 말조차 바르지 못하였습니다만 스승의 법을 받아 깨쳤사옵니다. 이제는 다만 자성으로 건널 뿐입니다.”

홍인은 혜능을 아끼는 마음으로 또 다시 당부했다.

“네 말이 옳다. 불법이 너로 인해 크게 흥할 것이니라. 네가 떠난 3년 후에 나는 세상을 떠날 것이니 부디 잘 가거라. 빨리 남쪽으로 가되 설법을 서두르지는 말라. 법난(法難)이 이르리라.”

남쪽으로 가되 설법을 서두르지 말라

홍인은 오조사로 돌아가 며칠 동안 법상에 오르지 않았다. 이상하게 여긴 한 제자가 홍인에게 나아가 환후(患候)가 있는지 물었고, 홍인은 가사와 법이 남쪽으로 갔다고 말했다. 다시 제자가 누구에게 갔는지 물었고, 홍인은 ‘능(能)한 자가 얻어갔다’고 대답했다.

한편, 혜능은 홍인과 작별한 지 2달 보름 만에 대유령(大庾嶺)에 이르렀다. 오조사 대중 수백 명이 자신에게서 의발을 뺏으려고 쫓아오는 것도 모르고 남방으로 넘어가는 대유령에 도착했던 것이다. 수백 명의 무리 중에는 출가 전에 사품(四品) 장군이었던 혜명(惠明)도 있었다. 성질과 행동이 거친 그가 가장 먼저 혜능을 가까이 추격했다.

이에 혜능은 홍인에게 물려받은 가사와 발우를 바위에 놓고 한 마디 하며 숲속에 숨었다.

‘이 가사와 발우는 믿음의 표시인데 어찌 힘으로 다툴 수 있겠는가.’

혜명이 달려와 곧 가사와 발우를 거두려 했지만 바위에 붙어버린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혼신의 힘을 다해 가지려고 했지만 마찬가지였다. 그러자 혜명이 두려워하며 소리쳤다.

광효사의 기도하는 여인크게보기“행자시여, 저는 법을 위하여 왔습니다. 의발 때문에 온 것이 아닙니다.”
혜능은 혜명이 절절매고 있는 것을 보고는 숲속에서 나와 반석에 앉았다. 갑자기 순해진 혜명이 절하며 법문을 청했다.
“바라옵건대 행자시여, 저에게 가르침을 주십시오.”
“너는 법을 위하여 왔다. 이제 모든 번거로운 인연을 쉬고 한 생각도 일으키지 말라. 내가 너를 위하여 법을 설할 것이니라.”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도 생각하지 말라

혜능은 잠시 침묵에 잠겼다가 말했다.

“선(善)도 생각하지 말고, 악(惡)도 생각하지 말라. 바로 이러한 때 어떤 것이 명(明) 상좌의 본래면목인가.”

혜명은 단박에 자신의 본래면목을 깨달았다. 그리고는 곧 스승이 된 혜능의 권유로 홍매로 돌아가 이름을 도명(道明)으로 바꾼 뒤 홍인을 시봉했다.

이후, 혜능은 대유령에서 조계(曹溪)에 이르렀으나 이곳에서도 악한 무리에 쫓기어 사회현(四會縣) 산중으로 들어갔다. 깊은 산에 든 혜능은 사냥꾼들과 15년을 함께 생활했다. 살생을 일삼는 사냥꾼들의 근기에 맞게 법을 설했지만, 무지한 사냥꾼들은 혜능에게 짐승 잡는 그물을 지키게 했다. 그러나 혜능은 그물에 걸린 생명들을 모두 놓아주었고, 끼니때는 사냥꾼들의 고기 삶는 솥에 자신의 공양거리로 채소를 넣어 익혀 먹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비로소 혜능은 법을 펼 때가 왔음을 알고 산을 내려오게 된다. 혜능의 나이 40이 가까워진 때의 일이었다. 혜능은 봉두난발의 모습으로 날마다 수많은 대중이 모인다는 법성사, 즉 오늘의 광효사로 들어섰다. 당시 법성사에는 인종(印宗) 법사가 구름처럼 모인 대중 앞에서 <열반경>을 강의하고 있었던 것이다.

현재 시내 중심가에 자리한 광효사의 위치는 상징적이다. 광효사는 광주의 역사와 함께 발전해 왔기 때문이다. 남북조시대인 397년에서 420년 사이에 매년 가람들이 건립된 광효사는 영남불교의 총본산일 뿐만 아니라 광주 사람들이 예부터 마음으로 의지했던 도량이었던 것이다.

비가 쏟아지는데도 광효사 천왕문을 지나치는 향객들의 발길은 끊임이 없다. 순례를 해온 여느 지역보다도 광주 사람들의 믿음이 절절한 것 같다. 한 여인이 퍼붓는 비를 아랑곳하지 않고 향로 앞에 앉아 기도하고 있다. 우산을 쓰고 대웅보전을 기웃거리는 발걸음이 부끄러울 정도다.

정찬주(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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