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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으로 가는 통천(通天) 길을 걷다

| | 2008-06-05 (목) 00:00

노승과 몇마디 대화 나눈 처녀가 잉태를 하다

대웅보전을 나와 왼편으로 오르면 성모전(聖母殿)이 나온다. 도신대사의 어머니 주(周)씨를 봉안한 전각인데, 절에 스님의 어머니가 모셔져 참배의 대상이 되고 있음은 아주 드문 일이다. 상식을 뛰어넘는 출생의 비밀이 있거나 분명 그럴 만한 곡절이 있을 터이다.

그렇다. 홍인은 보통사람과 달리 어머니의 성(姓)을 따르고 있다. 결혼해 본 적이 없는 동정녀(童貞女) 주씨가 잉태하여 난 아들이기 때문이다. 그 사연은 사조 도신이 파두산에서 정진하고 있을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파두산에는 이름 없는 한 노승이 살고 있었다. 그는 틈나는 대로 소나무만 심었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재송도자(裁松道者)라고 불렀다. 어느 날 그 노승이 도신을 찾아가 ‘불법을 깨쳐 널리 펴 보이겠다’며 설법을 청했다. 그러나 도신은 노승에게 아이로 태어나 다시 찾아오라며 거절했다.

“그대는 이미 늙었으니 다시 태어나 찾아오시오. 그래도 늦었다고는 생각하지 마시오.”

도신과 헤어진 노승은 산을 내려와 시냇가에서 빨래하는 처녀를 만났다. 마침 날이 저물고 있었으므로 노승이 말했다.

“하룻밤 묵어갈 수 있겠소.”

“저의 아버님께 부탁해 보셔요.”

“그대가 허락하니 그리하겠소.”

노승은 그렇게 해서 하룻밤을 보낸 뒤 떠나갔다. 그런데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처녀가 노승과 몇 마디 주고받았을 뿐인데 아이를 잉태한 것이었다.

처녀 아버지 주씨는 막내딸인 처녀를 의심하며 집에서 내쫓았지만 처녀는 갈 곳이 없었으므로 동네를 떠나지 않았다. 낮에는 길쌈 품팔이를 하며 밤에는 길손들이 자고 가는 객사에서 잠을 잤다.

그러기를 10달 만에 처녀는 사내아이를 낳았다. 그러나 처녀는 갓난아이를 도저히 키울 수 없어 몰래 마을 앞의 개울에 내다버렸다. 그런데 기이한 일이 또 벌어졌다. 갓난아이가 물에 떠내려가지 않고 오히려 거슬러 올라오고 있었다. 할 수 없이 처녀는 갓난아이를 건져 올려 키웠으나 동네사람들은 성이 없는 아이, 즉 아버지가 없는 아이라는 뜻으로 무성아(無姓兒)라고 놀렸다.

홍인의 성이 '불성'이 된 의문 성모전 앞에서 풀리다

처녀는 아이가 말을 할 때쯤 노승의 얘기를 해주었다.

“너는 성이 없는 무성(無姓)이 아니라 스님과의 인연으로 태어났으니 네 성은 불성(佛性)이다.”

성모전에 있는 홍인의 어머니 주씨가 내게도 그렇게 말하는 듯하다. 일찍이 도신대사가 7살의 어린 홍인에게 “너의 성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어린 홍인이 “불성입니다.”라고 대답하여 지금까지 궁금하고 아리송했는데 이제야 의문이 풀리는 느낌이다.

진신전(眞身殿)에는 1985년에 조상(造像)한 홍인대사의 진신상이 있다. 그러나 홍인대사의 진신인 등신불은 아니다. 그 진신상은 1927년에 훼손되었고 그 마저도 문화혁명 때 홍위병들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어 현재의 모상(模像)이 조상됐다고 한다. 그러니까 1927년 전에는 앉은 채 입적한 홍인대사의 등신불이 진신전에 봉안돼 왔다고 한다.

인간은 창조도 하고 파괴도 한다. 창조는 순리(順理)지만 파괴는 역리(逆理)이기에 반드시 그 업보를 받는다. 지금의 중국인들은 전통문화를 말살시키려 했던 홍위병의 존재를 거론하는 것조차 부끄러워하고 있는데, 어쨌든 그 상처는 너무 깊다.

육조전(六祖殿)으로 가는 회랑에는 홍인의 회상에서 신수와 혜능의 일화들이 그림으로 그려져 있다. 다시 보아도 두 분의 드라마는 극적이고 흥미롭다. 아마도 선종의 역사 가운데 가장 극적인 장면이 아닐까 싶다.

혜능대사가 행자 때 사용했던 방아 크게보기

육조전의 방아를 보니 혜능의 행자시절 떠올라

육조전에는 혜능이 행자 때 사용했던 방아를 재현해 전시하고 있다. 혜능은 키가 작고 몸이 가벼워 허리에 무거운 돌을 매달고 방아를 찧었던 것이다. 혜능은 출가해서 홍인의 지시대로 줄곧 방아만 찧었다. 그것도 방아를 더 잘 찧기 위해 허리에 돌을 매달고 움직였다. 홍인은 많은 행자들 중에서 왜 혜능에게만 힘든 일을 시켰을까.

이미 마음속으로 혜능을 법제자로 점지해 놓고, 혜능의 근기를 시험해 보면서 복덕을 심어주고자 그랬을까. 혜능이 날마다 쉬지 않고 찧은 쌀로 1천여 명의 대중이 공양했으니 결코 그 복덕(福德)이 적다고만은 할 수 없을 것이다. 육조전에 재현해 놓은 혜능의 방아를 보고 있자니 혜능의 출가 전후가 떠오른다.

출가 전, 혜능은 몹시 가난하게 살았다. 아버지가 일찍 타계했으므로 혜능은 홀어머니를 잘 모시기 위해 저잣거리에서 나무를 팔았다. 그날도 혜능은 안도성(安道誠)의 집까지 나무를 져다 주고 나무값을 받았다. 마침 그때 안도성은 <금강경>을 외웠고, 혜능은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추었다.

<금강경>의 ‘마땅히 머문 바 없이 그 마음을 낼지니라(應無所住 而生其心)’라는 구절에 혜능은 마음이 크게 상쾌했다.

“그게 무슨 책입니까.”

“<금강경>이오.”

“어디서 그 책을 구했습니까.”

“기주(蘄州) 황매현 빙모산으로 가서 홍인대사에게 설법을 듣고 나서 대사로부터 받았소. 그때 대사께서 <금강경>을 받아 지니면 부처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소.”

순간 혜능은 홀어머니가 걱정되었다.

“홀어머니가 계신지라 제가 집을 떠나면 모실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자 안도성이 혜능에게 은전 1백냥을 주면서 지체하지 말고 황매현으로 가 홍인대사를 참례하라고 격려했다. 혜능은 홀어머니에게 안도성에게 받은 돈을 맡긴 뒤 홍인대사를 찾아갔다. 홍인이 혜능의 절을 받자마자 물었다.

“그대는 어디서 무엇을 구하러 왔는가.”

“신주에서 왔는데 부처가 되려고 왔습니다.”

“신주는 오랑캐들이 사는 땅이다. 그러니 너는 불성이 없다.”

당시 장안의 관리들은 키가 작고 글을 모르는 변방 사람들을 오랑캐라고 비하해서 불렀던 것이다.

“사람이 사는 땅은 남북이 있지만 불성에는 남북이 없습니다.”

“신주는 사냥이나 하는 오랑캐 땅인데 어찌 불성이 있겠는가.”

“여래장의 성품은 개미에게까지 두루 있습니다. 어찌 오랑캐라고 없겠습니까.”

“너에게도 불성이 있다면 어찌 나에게서 뜻을 구하려고 하는가.”

홍인은 혜능을 기특하게 여겨 행자로 맞아들였다. 그런데 혜능이 맡은 소임은 절에서 가장 힘든 일 중에 하나인 방아 찧기였다. 많은 행자들 가운데 수행자로서 자질이 단연 뛰어났지만 홍인은 오히려 혜능에게 가장 힘든 방아 찧기를 맡겼다.

이 부분에서 머릿속을 스치는 것은 사자가 어린 새끼사자를 절벽으로 밀어뜨리는 장면이다. 사자는 절벽을 타고 기어오르는 새끼사자만 기른다고 하는데, 바로 그 얼음장 같은 엄혹함이 느껴진다.

하늘로 가는 통천길은 곧 깨달음으로 가는 길

성모전 안의 홍인대사 어머니 동정녀 주씨크게보기

다시 진신전, 성모전을 지나 위로 난 산길을 드니 이른바 삼불교(三佛橋)가 나타난다. 원오 극근, 태평 혜근, 용문 청원 등 삼불(三佛)로 불리던 세 도인이 법담(法談)을 나누던 다리라 하여 삼불교라고 하는데, 실제 다리 이름은 길상교(吉祥橋)이다.

길상교를 지나니 대숲을 스치는 청량한 바람소리가 마음을 비질해 해준다. 산길의 이름도 통천로(通天路)다. 하늘로 통하는 산길이라니 분에 넘치는 호사를 누린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그런 호사도 잠시다.

마침내 대만보탑(大滿寶塔)에 이르자 눈앞의 정경에 우울해진다. 홍인대사의 탑치고는 너무 초라하다. 홍인대사의 진신상이 홍위병들 손에 파손됐을 때 수습한 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급조한 탑이기 때문에 그런지 위의(威儀)가 없다. 당 대종(代宗)이 대만선사(大滿禪師)라는 시호를 내리고 묘탑을 조성하도록 명했을 당시만 해도 저렇게 조악한 모습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저것도 오조사의 업이라면 받아들여야 한다. 눈앞의 인연에 연연할 필요는 없다. 순례자의 일이란 조사(祖師)의 법신(法身)을 향해 향 사르고 차 한 잔 올리며 조사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조사의 법문을 듣고 실천하는 것이니까. 그것이 바로 깨달음으로 가는 통천(通天)이 아닐까.

정찬주(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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