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김진호
zeenokim@naver.com 2010-11-08 (월) 08:59안성시 죽산면에 위치한 칠장사. 가을이 서둘러 물러나던 일요일, 칠장사를 찾았다.
칠장사로 들어서는 마을 풍경이 예사롭지 않다. 극락마을과 묵언마을이라는 마을 이름도 그렇고 도로 가에 세워진 수백 개의 만장이 가로등에 걸린 휘장처럼 바람에 휘날리고 있는 모습도 그랬다. 아마도 이곳은 예로부터 불심이 지극한 동네가 아니었나 싶다.
늦가을 황금빛 낙엽을 오소소 털어낸 은행나무 가지가 앙상하게 늘어선 칠장사 입구에 도착했다.
'칠현산 칠장사'. 파란 가을 하늘과 함께 선 일주문의 현액을 올려 보다보니 살짝 비켜가는 현기증. 일주문도 나도 어질어질, 쓰러질듯 하다. 파란 하늘에 흰구름이 지나갈 때 높은 곳을 올려다보면 일어나는 착시현상이다.
황금빛 은행나무 잎이 수북이 쌓인 길섶을 걸어 칠장사 경내로 들어선다.
칠장사는 칠장산에 있는 절집이지만 칠장산의 모산이 칠현산이기에 칠현산 칠장사로 불린다. 칠현산은 고려 때 혜소국사가 일곱 명의 악인을 교화하여 현인으로 만들었다는 설화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노란 은행잎을 밟으며 오르니 넓은 주차장이 나오고 다시 석축 위로 절집의 전각들이 단아한 모습으로 가을 하늘을 떠받치고 있다. 그 중간중간 아직 여운이 남은 단풍나무들이 붉은빛 곱게 여백을 채우고 있다.
칠장사는 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의 말사로 신라시대 선덕여왕 당시 자장율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다시 고려시대에 혜소국사가 현종의 명을 받아 중창을 하였고 조선시대로 넘어와 인조 당시 크게 중수하여 지금의 가람의 모습을 하게 되었다. 또, 고려 우왕 9년에는 왜구의 침입으로 충주 개천사에 있던 고려의 역조실록을 이곳 칠장사로 옮겼을 정도로 칠장사는 옛날에도 불교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었던 절집이라고 전한다.
금강문을 지나 대웅전 앞에 이른다. 한눈에도 무척이나 오래되어 보이는 목조건물은 이제는 단청마저 희미한 빛깔로 남아 있다. 이럴 때 쓰는 말이 고색창연이 아니던가. 그야말로 예스럽고 오래된 풍치가 그윽할 뿐이다.
칠장사는 천년고찰답게 전해져 오는 전설도 많다. 태봉국을 세운 궁예가 이곳에서 열 살 때까지 활쏘기를 하며 자랐는데 그 활터가 남아있기도 하고 의적 임꺽정이 갓바치 스님 병해대사에게 전해 준 꺽정불 이야기도 전해진다.
또, 무엇보다 이곳 칠장사를 유명하게 만든 이야기는 바로 암행어사 박문수에 관한 이야기다.
박문수가 32세가 되도록 과거에 급제를 못하고 있었는데, 1723년에 실시하는 증광시에 응시하러 갈 때의 이야기라고 한다.
박문수 어머니가 내일 과거 길을 떠나는 아들을 불러놓고 “문수야. 내가 들으니 칠장사에 나한전이 있다고 하는데 그곳에 기도를 드리면 한 가지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하니 너도 이번에 급제를 하도록 은덕을 내려달라고 빌고 가거라.”고 말했다. 이에 문수가 한양 과거 길에 칠장사에 들러 하루를 묵어 기도를 드리게 되었다. 기도를 드린 그날 밤 꿈에 나한전 나한님이 나와 과거에 나올 시제를 알려주겠다고 하며 총 여덟 줄 중 첫째 줄부터 일곱째 줄까지를 알려주고, 나머지 한 줄은 스스로 생각하여 쓰도록 하라고 일러주고 사라졌다.
박문수가 한양에 올라가 과거 날 성균관 과장에서 시제를 접하고 보니 칠장사 나한전에 빌고 꿈속에서 얻은 시험 문제가 고스란히 나왔다. 문수는 자신 있게 일곱 문장을 쓰고 나머지 한 문장 역시 가장 잘된 문장으로 평가 받아 장원급제를 하게 되었다.
박문수가 급제한 시험을 몽중등과시라 일컫기도 하며 이 때문에 지금도 칠장사는 많은 응시자들과 가족들이 찾아와 기도를 올리는 기도명소로 유명해진 것이다.
대웅전에서 참배를 드리고 보물 제983호인 안성 봉업사 석불입상에도 참배를 드렸다. 그리고 원통전을 돌아서 오르니 사람들이 왁자하다. 바로 어사 박문수의 이야기가 전해져오는 나한전이다.
‘그러고 보니 수능이 얼마 안 남았구나.’ 작은 법당 안에는 정성을 가득 담아 기도를 하고 있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그리고 그 옆으로는 보물 제488호인 혜소국사비가 있는 비각이 서 있었다. 혜소국사는 칠장사 중창에 크게 기여했으며 83세 그의 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으로 비신 양측에 새겨진 쌍용은 극히 뛰어난 솜씨를 자랑한다.
은행잎 소복한 길을 따라 칠장사를 빠져 나온다. 황금빛 은행잎에 머물던 늦가을 햇살이 파르르 떨다가 이내 낙엽 속으로 숨어버린다. 칠장사는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가득한 오래 곰삭은 장맛 같은 절집이다.
토하는 듯 넘어가는 붉은빛은 푸른 산에 걸려있고
기러기는 자로 잰 듯 흰 구름 사이로 사라지며
나루를 찾는 나그네의 독촉은 응당 급해지고
절로 돌아가는 스님의 지팡이는 한가롭지 않으며
초원에서 풀을 뜯는 소의 그림자는 허리 가운데로 들어가고
댓돌 위에서 서방을 기다리는 아낙의 쪽이 뒤로 젖혀지며
고목으로 저녁 짓는 푸른 연기가 남쪽마을 계곡으로 올라가고
나무를 하는 떡 거머리 총각이 즐거운 듯이 풀피리를 불며 돌아간다
위의 시는 박문수가 장원급제 할때 부처님께서 가르쳐 준 몽중등과시다. 이 아름다운 시구는 분명 부처님께서 지어주신 선시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