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연재 > 김정빈의 명상이야기

모든 것을 다 의심한다고 해도<br>의심하고 있는 나 자신은 의심할 수 없다

| | 2010-10-04 (월) 12:18

그러나 성자의 가르침은 자기 자신이 직접 본 것이 아니라 남(성자)이 본 것이었습니다. 자기의 이성(경험)으로써 검증한 것이 아니라 가설(종교적 신조)을 믿는 차원이었습니다. 그런 시기가 길게는 수만 년, 짧게는 오천 년 가량이나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르네상스 시기에 이르러 역전 현상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내가 직접 진실을 보아야겠다는 요구.
믿을 것이 아니라 알아야겠다는(이성으로써 증명해야겠다는) 요구.
근현대를 특징짓는 과학(자연과학, 그러나 넓게는 학문 일반)은 이로부터 출발하여 얻어낸 놀라운 성과물이었습니다.
결론지어 말하면 르네상스 이후의 근현대는 이성의 시기(믿음의 시기가 아니라)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상은 시간적 관점에서의 인류 역사에 대핸 개괄입니다만 이제는 공간의 관점에서 생각해 봅시다. 공간의 관점에서 볼 때 근현대는 주체의 시기입니다. 바꿔 말해서 근현대인은 고대인에 비해 자기 자신이 인생의 주인이라는 생각이 명확하다는 의미입니다(여기에서의 공간이란 세계(사회, 타자)와 나 자신 간의 관계를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고대인은 그렇지 않았단 말인가, 라는 의문이 들 수도 있습니다. 물론 고대인이라고 해서 자기의 인생이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리는 없겠지요. 그렇지만 그 분명성의 면에서 볼 때 고대인은 현대인에 비해 자신이 인생의 주체이며 주관자라는 의식이 매우 박약하였습니다.
고대인에게 있어서 내가 태어난다는 것은 개인으로서 태어난다는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고대인에게 있어서 어떤 한 인간의 출생은 개인이 아니라 누구의 아들(딸), 어느 집안의 핏줄임과 동시에, 그가 속한 종족· 마을· 사회· 국가· 교회(종교 조직)의 일원으로 태어난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이 말은 그가 자기가 속한 외연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그가 부모· 가문· 종족· 마을· 사회· 국가· 교회와 다른 생각을 하거나 그들의 이익에 반하는 행동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점, 우리 대한민국 사람들의 마인드(생각-바탕)에는 아직도 고대적인 면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서양인에 비해 우리나라를 포함하는 동북 아시아인들의 의식(마인드)의 특성 중의 하나는 그들이 개인을 중심으로 세계를 보는데 비해 우리는 관계를 중심으로 세계를 본다는 점입니다.
전자를 개인-주의적 마인드라고 한다면, 후자는 우리-주의적 마인드라고 말할 수 있는데, 저는 전자의 마인드를 바탕으로 형성된 자아를 ‘ 개별자아(個別自我), 후자를 바탕으로 형성된 자아를 ‘연대자아(連帶自我)’라 부르고 있습니다.
개별자아에 충실한 서양인들은(그렇다고는 해도 모든 서양인이 다 그렇거나, 그들의 개별자아가 100% 충실한 것만은 아닙니다) 언어에 있어서도 “내 집”, “내 아내”, “내 나라” 등으로 말하는데 비해, 개별자아와 함께 연대자아를 겸하고 있는(연대자아를 가진 사람의 경우는 대개 개별자아와 연대자아를 저마다 자기만의 혼합한 상태에 있습니다. 전적으로 개별자아를 가진 사람이 귀하듯이 전적으로 연대자아를 가진 사람도 귀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지금 제가 쓴 말에서도 보듯이 “우리나라”, “우리 마누라”, “우리 집” 등으로 말합니다.
그렇긴해도 우리나라 사람들 또한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내 인생의 주인은 나”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간단한 생각을 고대인들은 감히(!) 하지 못하였습니다.
알고 보면 정몽주 선생의 고려 왕조에 대한 일편단심이나 사육신의 단종에 대한 충성심도 연대자아를 기반으로 나타난 것으로서, 당시의 시대적 패러다임(마인드)을 전제로 하지 않고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사실입니다. 임진왜란 때에는 온 국민이 벌떼처럼 의병으로 일어났던 우리 민족이 지금은 왜 고위 공직자들까지도 국가의 이익보다는 자기 이익을 먼저 챙기기에 바쁜가 하는 것 또한 이같은 자아관이 달라져 온 시대적 패러다임의 변화와 함께 음미해 보면 쉽게 이해가 될 것입니다.
이 점만 보면 개별자아 쪽으로 이동하고 있는 현대적 패러다임에 큰 문제점이 있는 것같이도 여겨지지만 그렇지는 않습니다.
먼저, 문제가 있고 없고는 둘째 치고 모든 인간은 저마다 구별되는 개인(저는 이런 의미의 개인을 ‘개별자(個別者)’라고 부릅니다)이며, 개인에게는 저마다 결코 남이 침범할 수 없는 자유가 있다는 것은 실제적 사실(진실)에 속합니다.
다만, 그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것을 알아, 한 개인으로서, 또는 사회의 일원, 국가의 일원으로서의 의무를, 첫 번째로는 외부로부터 강제로 요구되는 법적 의무, 두 번째로는 내부의 양심에서 요구되는 내적 의무를 다하는 것, 그것이 민주시민으로서의 건전한 삶이자 현대의 군자(신사, 기사)로서의 훌륭한 삶일 터입니다.
알고 보면 현대에 이르러 모든 국가가 채택하고 있는(북한 등 일부 국가는 예외이지만) 민주주의 제도는 이같은 개인주의 의식(개별자아)을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개별자아의 확립은 현대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합내다. 이를 기반으로 우리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나 남(사회)에 대해서 책임있고 당당한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점과 관련하여 우리는 어쩔 수없이 데카르트(Descartes)를 생각하게 됩니다. 잘 알려진 것처럼 데카르트는 근대의 초석을 놓은 철학자이고, 데카르트 하면 떠오르는 말이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명제입니다.
그렇다면 이 명제가 왜 중요하며, 왜 이 명제가 근대를 놓은 초석으로 인정받고 있을까요? 저는 데카르트 철학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것이 없습니다만, 전국 지도적으로 이것만은 압니다.
데카르트는 철학적 제1기초를 세우고 싶어 하였습니다. 즉, 그는 너무나 자명(自明: 스스로 명백함)하여 아무도 의심할 수 없는 것을 첫 번째 명제로 세운 다음, 그 명제로부터 출발하여 두 번째, 세 번째 명제를 확립하고 싶어 하였습니다.
이렇게 되면 모든 것을 의심해야 합니다. 모든 것은 그 자체로서 스스로 명백한 것이 아니라 어떤 것에 의지하여 명백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모든 것이, 눈에 보이는 것, 귀에 들리는 것, 생각에 떠오르는 것 등 모든 것이 다 의심의 안개 속에 묻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가운데 마지막에 남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의심하고 있는 나 자신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데카르트는 외쳤습니다. “나는 지금 의심하고 있다. 이 말은 모든 것을 다 의심한다고 해도 의심하고 있는 나 자신만은 의심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명제는 철학적 제1기초라고 해야 한다.”
이로써 제가 지금까지 말해 온 기나긴 말들, 즉 현대인은 고대인과 달리 자기 자신을 인생의 주체로 여긴다는 것이 어떻게 데카르트의 명제와 맞닿는지를 아시겠지요? 바꿔 말하여 데카르트의 명제는 인간을 연대자아로부터 개별자아로 구별한 것이며, 인간을 믿음이 아닌 이성으로부터 출발시킵니다.
그리고 그 기초로부터 근대가 시작되고, 근대를 이어받아 현대가 발전하고 있는 것이니, 데카르트 철학이 근대를 열었다고 하는 평가는 지당한 것이라 하겠습니다.<<strong>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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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이것이 2016-09-03 07:0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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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와는 다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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