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연재 > 김정빈의 명상이야기

“나부터 닦자, 향기 가득한 사람이 되자<br>그러면 남들에게도 이익이 미칠 것이다”

| | 2010-08-28 (토) 09:55

4. 위기주의(爲己主義)로서의 불교
앞에서 저는 동양의 길들은 먼저 자기 자신부터 돌아보도록 하는 체계를 갖고 있다고, 그것은 불교뿐아니라 공자님의 사상 또한 그러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공자님의 사상에 비할 때 불교는 훨씬 더 강력하게 자기 자신을 먼저 돌아볼 것을 요구합니다. 공자 사상에서는 수기가 안인에 우선하기는 하지만 수기의 비중은 절반 정도에서 그칩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그것이 시작이자 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자기 자신을 돌아볼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어떤 분들은 불교에서도 하화중생(下化衆生: 아래로 중생을 교화함)을 말하지 않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불교는 하화중생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 전제로서의 상구보리(上求菩提: 위로 깨달음을 구함)를 말합니다. 그러니 얼핏 볼 때에는 불교의 상구보리는 공자님의 수기에, 하화중생은 공자님의 안인에 배대될 수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지만 공자님과 불교의 간에는 미묘한 상이(相異)가 있는 듯합니다. 적어도 제가 알기로는 공자님에게 있어서 수기는 안인에 이르러 완성됩니다. 그렇지만 불교에 있어서 상구보리는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완성입니다. 바꿔 말해서 공자님의 경우 안인 없는 수기는 반쪽이지만 불교의 경우 하화중생 없는 상구보리는 그 자체로서 이미 완성품인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깨달음을 성취하고나서 45년 동안 하화중생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부처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아 부처님과 동일한 해탈을 성취한 당대의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흔히 ‘1250인’으로 일컬어지는 아라한(阿羅漢: 부처님의 제자로서 해탈을 이룬 분)들이 그 분들인데(그 분들 말고도 아라한은 무수히 배출되었습니다) 그 분들 중에는 10대 제자들처럼 많은 이들에게 가르침을 베풀어 이익을 주신 분들도 있지만 깨달음을 성취하자마자 곧바로 반열반(般涅槃: 깨달은 분들의 죽음)을 하신 분들도 있습니다.
이 경우 전자와 후자 사이에 차등이 있을까요?
공자님의 경우로 보면 차등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공자님은 어느 때는 수기를 극도로 강조하고, 그 말씀만으로만 보면 수기는 그 자체로 완성품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지만 어느 때는 달라집니다. 공자님 당신 자신부터 남이 당신의 능력을 인정하여 직책을 맡아달라고 초청하자 내심 기쁨을 감추지 못한 적이 있을 정도입니다. 따라서 저는 공자님의 경우 수기와 안인이 반반의 비율로 보는 것이 옳지 않나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불교는 다릅니다. 불교에서는 상구보리는 그 자체만으로 이미 완성입니다. 바꿔 말해서 불교에서의 하화중생은 해도 좋고 안 해도 좋은, 또는 저절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부차적인 일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습니다(부처님께서 제시하신 올바른 삶의 길로서의 팔정도(八正道)는 수행자가 자기 자신을 어떻게 하는 내용일 뿐 남을 어떻게 하는 내용이 아닙니다. 공자님의 가르침에서는 사회(가정· 국가· 천하)에 대한 언급이 많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에서는 이런 언급이 적고, 있더라도 특별히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지는 않습니다).
일단 깨달음을 성취했다면 만 명을 교화한 아라한이나 깨닫자마자 반열반에 드신 아라한이나 아무런 차등이 없습니다. 적어도 내적으로는, 자신이 누리는 지복과 평화만으로는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본질입니다. 자기 자신이 먼저 지복으로서의 평화에 안착하는 것, 이것이 불교적 수행관의 시작이고 또 끝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남(사회)은요?”하는 질문을 하시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이에 대한 대답은 “저절로 남을 위하게 된다.”입니다. 즉, 참다이 깨달음을 성취한 분이라면 당신이 굳이 남을 위하려고 하지 않더라도 그 분을 만나고 접촉하는 모든 이들이 무언가 높은 가치를 지닌 것을 받아가게 마련입니다.
결국 마찬가지가 아니냐구요?
마찬가지이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합니다.
형식으로만 보면 마찬가지입니다. 그렇지만 그 순수성에서 다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 가운데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만, 깨달은 분들의 행위가 바로 그런 행위, 즉 지극히 순수한 행위입니다.
그에 비할 때 깨닫지 못한, 아직 중생으로서의 속성을 갖고 있는(이 경우에 한정하여 말할 경우 ‘남과의 관계성을 완전히 떨쳐버리지 못한 마인드’를 가지고 있는) 한 그의 선한 행위는 반드시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아는’ 수준에서 머물게 됩니다.
《금강경》의 주요한 가르침인 무주상(無住相)의 정신, 즉 머무름이 없는 마음가짐 또한 마음의 순수성에 대한 가르침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법구경》에 보이는 다음의 말씀은 어떻습니까?
깨달은 사람은 남의 말을 믿지 않는다.
닙바나(nibbana, 열반)는 빔(空)이요 자취 없음,
그는 다만 해탈에만 안주하나니,
아, 새들이 허공을 날아도 자취가 없듯이
그들이 가는 길에도 자취가 없다.
이로써 우리는 불교가 남에게 이익을 베푸는 것, 또는 남과의 관계맺음의 중요성 못지 않게, 아니 그보다 더 먼저, 그보다 더 힘주어 정신적 순수성을 강조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불교는 ‘먼저’ 자기 자신을 청정히 하고, ‘다음에’ 남에게 이익을 베푸는 길인 것입니다.
이 ‘먼저’가 바로 상구보리이며, 그 결과가 하화중생, 또는 이익중생(利益衆生)입니다. 이에 대해 “그렇다면 결국 불교는 이기주의를 가르치는 것이로군요?”라는 반론이 있을 듯합니다. 실제로 저의 향기와 벌나비 이론을 말씀드리면 많은 분들이 이런 반론을 제기합니다.
그렇지만 불교는 이기주의에 기반을 둔 체계가 아닙니다. 불교의 기반은 이기주의(利己主義)가 아니라 위기주의(爲己主義)입니다. 제가 지금 사용한 ‘위기’라는 말은 공자님의 용어입니다만, 저는 이 말이 너무나 좋아서 자주 인용하고 있습니다(이미 보신 것처럼 공자님의 사상은 불교를 이해하는 초석으로서 심대한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공자님은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옛적의 현명했던 이들은 자기를 위해 공부했는데, 요즘의 비루한 자들은 자기 자신을 위해 공부한다(r고지학자 위기 금지학자 위인: 古之學者 爲己 今之學者 爲人).”
이게 무슨 말인가, 싶을 겁니다. 그동안 우리는 남을 위한 것이 선이고, 나를 위한 것은 악이라고 배워 왔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공자님은 거꾸로 옛적의 현명했던 사람은 자기 자신을 위해 공부했다고, 지금의 어리석은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위해 공부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때 지금의 어리석은 사람들의 공부를 위인지학(爲人之學)이라고 하고, 옛적의 현명했던 사람들의 공부를 위기지학(爲己之學)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둘의 상이점은 어디에 있을까요?
위기지학은 남의 평판을 얻으려고(또는 결과만을 위해서), 지금까지 말해온 논의에 대입한다면 ‘타자(타물)에 의지하여’ 하는 공부입니다. 남의 인정, 그 인정으로부터 얻게 되는 물질적· 정신적 이익이 이 공부의 목적입니다. 그에 비해 위인지학은 다릅니다. 위인지학은 공부를 통해 나의 내적인 즐거움이 자라나는 것을 목표로 삼습니다.
두 길의 중요한 상이점은 전자의 공부가 욕망을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후자의 공부는 욕망을 비우는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점입니다. 이때 전자의 공부가 이기적인 것은 당연하다 치고 후자는 어떨까요? 그 공부가 과연 이기적인 것일까요?
수양을 통해 나의 욕망을 줄이는 것이 이기적인 것입니까? 아닙니다. 내가 욕망을 줄임으로서 누가 해를 입는 것이 아니니까요.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내가 욕망을 줄이면 누군가가 나의 적어진 욕망 때문에 덕을 보게 됩니다. 그는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저절로 남을 위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불교 공부는 바로 그런 위기지학으로서의 공부입니다. 나의 탐진치를 마음의 독소로 보고 그것을 줄여나가는 공부, 그럼으로써 나에게도 이익이 되고 남들에게도 이익이 되는 공부, 그 공부가 바로 불교 공부인 것입니다.
이때 내가 얻는 이익은 나의 마음이 평화로워지고 가벼워지는 정신적인 것이고(한 바퀴 돌아 물질적인 이익으로 돌아오기도 합니다), 남이 얻는 이익은 첫 번째로는 물질적으로 내가 덜 가진 것을 가질 수 있는 점, 두 번째로는 정신적으로 나의 평화와 가벼움을 보고 그 또한 평화와 가벼움을 느끼고 배우게 되는 점입니다.
마음이 잘 수양된 사람 곁에 있으면 나의 마음 또한 자연히 평화롭고 가벼워지게 마련입니다. 또한 그런 이들에게서는 인생의 깊은 지혜가 우러나오게 마련입니다. 하물며 해탈을 성취한 성자야 재론의 여지가 없겠지요. 이런 식으로 불교는 위기주의로(이기주의가 아닌) 출발하여 이타주의(利他主義)로써 끝나는 체계입니다.
불교는 이를 자리이타(自利利他)라고 표현합니다만, 저는 이 말 한가운데 즉(則)자를 넣고 싶습니다. 그러면 자리즉이타(自利則利他)가 되는데 자리즉이타는 “내가 참다운 이익(공자님의 경우라면 즐거움)을 얻게 되면 저절로 남들에게도 이익을 주게 마련이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향기와 벌나비 이론이라는 것은 결국 위기주의 바로 그것입니다. 위기주의로서의 향기와 벌나비 이론은 결국 “나부터 닦자, 그럼으로써 내면에 향기가 가득한 사람이 되자. 그러면 먼저 나 자신이 행복해질 것이고, 자연스럽게 남들에게도 이익이 미칠 것이다.”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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