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연재 > 김상현의 에세이삼국유사

골품제의 그 견고한 굴레조차도<br>부처님 법력 앞에는 무릎 꿇었다

| | 2009-06-08 (월) 12:48

신라사회는 골품제도로 규제되고 있었다. 큰 재주가 있고 뛰어난 공이 있어도 골품의 한계를 넘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출세간의 종교인 불교에는 이러한 한계가 없었다. 일찍이 인도에서 이미 그랬듯이, 신라에서도 신분이 출가에 장애가 되지는 않았다. 진골귀족으로부터 노비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남녀의 구별도 없이 누구나 승려가 될 수 있었다. 비록 낮은 신분 출신일지라도 수행을 쌓아 고승이 되었을 경우, 사회적인 존경을 받기도 했다. 흥륜사금당십성(興輪寺金堂十聖) 중의 한 분이었던 혜공(惠空)은 원래 천진공의 집에서 고용살이 하던 노파의 아들이었다. 그의 어릴 적 이름은 우조(憂助). 우조는 신통(神通)이 있었다. 그는 7살 때 주인의 몹쓸 종기를 쉽게 고쳐준 일이 있다. 장성해서는 주인의 속마음을 헤아릴 수 있을 정도였다.

이에 주인 천진공은 우조에게 말했다.

“나는 지성(至聖)이 우리 집에 의탁하고 있음을 모르고 광언(狂言)과 비례(非禮)로 욕했으니, 그 죄를 어떻게 씻겠습니까? 이후로는 원컨대 도사(導師)가 되시어 나를 인도해 주십시오.”
그리고 주인은 우조에게 절을 했다. 자기 집의 젊은 노비에게 절하며 도사가 되어 자기를 인도해 주기를 부탁하고 있는 천진공의 모습에는 신분보다 종교를 더 중요하게 인식하고 있던 당시의 분위기가 서며있다.
출가 전의 지통(智通) 또한 이량공(伊亮公)의 가노(家奴)였다. 문무왕 원년(661) 어느 날, 까마귀가 와서 울면서 지통에게 말했다.
“영취산으로 가서 낭지(朗智)의 제자가 되도록 하라.”
지통은 낭지가 산다는 영취산을 향해 집을 나섰다. 겨우 7세의 어린 나이로. 낭지를 찾아가는 길에 7세의 지통은 현신(現身)한 보현보살(普賢菩薩)로부터 계를 받았고, 처음 만난 낭지로부터는 예(禮)를 받았다고 한다. 이 설화에는 지통의 총명과 구도심(求道心)이 신비화되고, 신분은 더 이상 굴레가 되지 못하고 있다.
낭지는 당시 유명한 고승이었다. 그는 영취산에서 135년 이상을 살았을 뿐만 아니라, 구름을 타고 당나라를 왕래했다고 할 정도로 법력(法力)은 뛰어났고, 그의 명성은 나라 안팎으로 드러났을 정도였다. 일찍이 원효도 영취산의 반고사(磻高寺)에 있던 젊은 시절, 낭지의 지도를 받은 적이 있는데, 원효로 하여금 <초장관문(初章觀文)>과 <안신사심론(安身事心論)>을 저술하게 한 것도 낭지였다.
앙지의 문하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지통, 훗날 그는 의상의 처소로 옮겨 화엄교학(華嚴敎學)을 배웠다. 아마도 의상이 부석사를 창건한 문무왕 16년(676) 이후에 태백산을 찾았을 것인데, 이때 지통은 22세의 청년 승려였다. 고승 낭지로부터 이미 많은 것을 배운 이후에 의상의 문하를 찾은 지통이 의상의 여러 제자 중에서도 출중했을 것임은 쉽게 짐작된다. <삼국유사>에는 지통을 원효와 함께 큰 성인으로 표현하고 있을 정도다.

지통은 의상의 문하로 옮긴 후 부석사 사십일회(四十日會), 소백산의 추동구십일회(錐洞九十日會), 태백산 대로방(大蘆房) 등지에서 스승 의상의 강의를 친히 들었다. 균여(均如)의 <석화엄교분기원통초>에는 지통에 대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태백산 전경크게보기

지통이 태백산 미리암굴(彌理嵓窟)에서 화엄관(華嚴觀)을 닦고 있을 때의 일이다. 하루는 갑자기 큰 돼지가 굴의 입구를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지통은 평상시와 같이 목각존상(木刻尊像)에게 정성을 다해 예했더니, 그 상(像)이 말했다.
“굴 앞을 지나간 돼지는 네 과거의 몸이고, 나는 곧 네 미래 과보로서의 불(佛)이다.”
지통은 이 말을 듣고 ‘삼세(三世)가 곧 일제(一際)’라는 법문을 깨달았다고 한다. 즉 과거 현재 미래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일이 있은 후 지통은 스승 의상을 찾아 이를 아뢰었는데, 스승은 그의 그릇이 이미 완성되었음을 알고 마침내 법계도인(法界圖印)을 주었다고 한다. 스승으로부터 인가(認可)를 받기도 했던 지통, 그가 의상의 십성제자(十聖弟子), 혹은 의상 문하 사영(四英) 중의 한 사람으로 평가되었던 것은 당연하다. 그는 분명 의상의 상족 제자였다. 의상이 입적한 702년에 지통은 48세였으니, 그는 8세기 전반에도 활동했을 것이지만, 전하는 기록이 거의 없다.
의상이 제자 진정(眞定) 망모(亡母)의 명복을 빌기 위해 90일 동안이나 <화엄경>을 강의했던 소백산 추동(錐洞), 즉 송곳골은 지금의 풍기읍 영전동(靈田洞) 그 좁은 골짜기에 있었다. 의상의 강경(講經) 내용을 제자 지통이 정리했던 <추동기(錐洞記)> 2권은 유명했다. 책 이름 <추동기>는 추동이라는 지명에서 취한 것이고, 또 이를 정리한 지통의 법명을 따라 <지통기(智通記)>로 불리기도 했다. <추동기>는 의상의 강의를 따라서 그 내용을 기록한 것이기에 문장이 잘 다듬어지지 않았고, 신라의 방언이 섞여 있기도 했다. 이 때문에 고려의 의천(義天)은 “당시 이 책을 엮은이가 문체에 익숙하지 못해서 문장이 촌스럽고, 방언이 섞여 있어서 장래에 군자가 마땅히 윤색을 가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실제로 이장용(李藏用 : 1201-1272)은 이 책에 윤색을 가하여 <화엄추동기(華嚴錐洞記)>라는 제목으로 유통시키기도 했다. 이처럼 <추동기>는 고려 후기까지 전하고 있었지만 그 이후의 유통 기록은 없다. 다만 균여(均如)의 저서와 <법계도기총수록(法界圖記叢髓錄)>에 <추동기>가 15회 정도 인용되어 그 단편적인 일문(逸文)이 전할 뿐이었다.
일본에는 당나라 법장(法藏 : 643-712)이 지었다는 <화엄경문답(華嚴經問答)> 2권이 고대로부터 전해오지만, 이 책의 저자에 관한 여러 의문이 있었다. 필자는 <화엄경문답>이 곧 <지통기>의 이본(異本)이라는 사실을 10여 년 전에 밝힌 바 있다. 균여의 저서 및 <법계도기총수록>에 인용되어 전하는 <추동기>의 일문을 <화엄경문답>과 대조해 보았더니, 균여의 저서 등에 인용되어 전하고 있는 <추동기>의 일문 15회 모두를 <화엄경문답>에서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전해온 <화엄경문답>은 법장의 저술이 아니라 의상이 강의하고 제자 지통이 기록․정리했던 <추동기> 바로 그 책이다.
의상이 <화엄경>을 강의한 내용의 165 문답이 그대로 수록된 <추동기>의 이본이 현존하고 있음은 다행스럽고도 반가운 일이다. 지엄(智儼)과 의상(義相)의 화엄사상을 밝히는 데 이 책은 귀중한 자료일 뿐만 아니라, 이 책이 법장의 저술이 아니라는 사실의 확인으로, 법장 화엄사상의 정확한 이해에도 도움을 받게 되었다. 이 책에 수록된 165 가지 문답에는 의상의 자상한 가르침이 넘쳐난다. 의상은 제자들을 향해 말했다.
“보이는 것을 따라 가면서 마음을 집착하지 말라. 들리는 것을 따라가면서 들은 대로 취하지 말라.”
“무상보리심(無上菩提心)을 내는 것을 ‘싹이 난다(芽生)’고 하고, 무상보리심을 내지 않는 것은 등짐[背]이 되니 ‘싹이 난다’고 하지 않는다(發無上菩提心乃名爲芽生 不發無上菩提心者 爲背不名芽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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