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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왕의 政敎가 밝지 못하면<br>長城으로도 재앙 막지 못하리

| | 2009-05-04 (월) 21:14

의상이 태백산에 부석사(浮石寺)를 창건한 것은 문무왕 16년(676)이었다. 부석사는 의상이 화엄대교(華嚴大敎)를 전할 복된 터전을 찾아 산천을 두루 편력한 뒤에 자리 잡은 중요한 터전이었다. 궁벽한 산속에 밝힌 법등(法燈), 그 등불은 무진등(無盡燈)으로 빛났다. 의상이 켜든 화엄의 불빛은 곧 신라사회로 퍼졌고, 그의 명성 또한 바람처럼 번졌다. 해동화엄초조(海東華嚴初祖), 부처님의 후신(後身) 등으로 추앙되어 왔고, 또한 성인(聖人)으로 존경되기도 했던 의상법사. 그가 이처럼 존경받을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는 이 땅에 화엄대교(華嚴大敎)를 전함으로써, 그 밝은 화엄의 빛을 신라 사회에 두루 비춰주었던 은혜 때문이다. 최치원이 그의 ‘전등묘업(傳燈妙業)’을 찬양했던 것도, 일연이 의상전교(義湘傳敎)라는 제목을 붙였던 것도 모두 이 때문이었다. 부석사를 중심으로 전개한 의상의 전교 활동은, 신라뿐만 아니라, 당나라에까지도 소문이 퍼질 정도로, 그리고 훗날 일본에도 영향을 준, 실로 눈부신 것이었다.
의상에게는 많은 제자가 있었지만, 십대제자는 더욱 유명했다. 오진(悟眞), 지통(智通), 표훈(表訓), 진정(眞定), 진장(眞藏), 도융(道融), 양원(良圓), 상원(相源), 능인(能仁), 의적(義寂) 등 십대제자는 모두 아성(亞聖)으로 불렸고 각기 전기가 있었다고 한다. 십대제자는 ‘십성제자(十聖弟子)’로 불리기도 했다. <송고승전> 중의 의상전에서는 지통(智通), 표훈(表訓), 범체(梵體), 도신(道身) 등을 등당도오자(登堂都奧者)라고 하면서, 이들은 모두 큰 알 속에서 껍질을 깨고 날아간 가유라조(迦留羅鳥)와도 같다고 했다. 범체의 경우는 의상의 직제자로 보기 어렵다. 법융(法融)의 제자인 그는 부석사에서 9세기 전반에 활동한 승려기 때문이다. 도신은 <송고승전>에만 보일 뿐, <삼국유사>에는 빠져 있다. 그래도 도신이 의상의 직제자였음은 확실한데, 그는 의상의 강의를 기록한 <도신장(道身章)> 2권을 남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최치원은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에서 진정, 상원, 양원, 표훈 등을 특별히 의상의 사영(四英)이라고 했다. 일본의 응연(凝然)(1240-1321)도 그의 <화엄법계의경(華嚴法界義鏡)>(1295년)에서 “의상에게는 진정, 상원, 양원, 표훈 등 사영이 있었는데, 이들을 상족(上足)이라 한다”고 했다.

부석사 전경.크게보기

의상은 제자 교육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태백산의 부석사와 대로방(大蘆房), 그리고 소백산의 추동(錐洞) 등지에서 화엄교(華嚴敎)을 전했다. 어떤 때는 그가 지은 <법계도(法界圖)>를 가르치고, 또 어떤 때는 <화엄경>을 강의했으며, 법장이 보내온 <탐현기(探玄記)>를 해석하기도 했다. 부석사에서 사십일회(四十一會)를 개최하기도 했고, 추동(錐洞)에서는 90일 동안이나 <화엄경> 강의에 전념하기도 했다. 제자들이 도움을 청해서 물어올 때면, 그는 급히 서두르지 않았고, 그들의 마음이 조용히 가라앉을 때를 기다려서 살핀 다음 의문 나는 점을 술술 풀어 의문의 여지를 남기지 않게 계발해 주었다. 그리고 그는 제자들에게 항상 훈계했다.

“긴 말이 필요하지 않다. 마땅히 마음을 잘 쓰도록 하라. 그리고 언제나 깊이 생각하도록 하라.”
표훈과 진정 등 10여 명 제자가 스승 의상에게 <법계도>를 배울 때였다. 그는 제자들을 향해서 범부 오척(凡夫五尺)의 이 몸이 곧 법신불(法身佛)이라고 강조했다. 그러자 어느 제자가 질문했다.
“움직이지 않는 내 몸이 곧 법신 자체라고 하신 뜻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이에 의상화상은 곧 사구게(四句偈)로 답했다.
諸緣根本我 모든 인연의 근본은 나고
一切法源心 일체법의 근원은 마음이다.
語言大要宗 가장 요긴한 종지를 말하면
眞實善知識 진실이 곧 선지식이다.
그리고 그는 제자들을 향하여 말했다.
“자네들은 마땅히 마음을 잘 써야 한다.”
어느 날 제자 표훈이 스승 의상화상에게 물었다.
“어떤 것을 무주(無住), 즉 머무름이 없다고 합니까?”
화상이 말했다.
“곧 우리 범부 오척(五尺)의 몸이 삼제(三際)에 움직이지 않는 것을 머무름이 없다고 한다.”
또 물었다.
“만약 삼제에 따라 나눈다면 여러 종류의 오척이 됩니까?”
화상은 답했다.
“이는 인연으로써 된 오척이기에 하나를 원하면 곧 하나가 되고 많은 것을 원하면 많은 것이 된다.”
의상은 어느 날 도신을 비롯한 여러 제자들에게 말했다. 도신은 스승의 가르침을 다음과 같이 기록해서 전했다.
“만약 정해진 것이 옛날부터라고 한다면, 곧 연기(緣起)에 성품이 있게 되어서 자재(自在)하지 못할 것이다. 연기란 자성(自性)이 없는 것이며, 자성이 없는 것은 머무름이 없는 것이고, 머무름이 없는 것은 하나에 치우치지 않는 것이며, 하나에 치우치지 않는 것은 타당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소백산 추동(錐洞)에서 개최한 90일 동안의 <화엄경> 강경법회, 이 법회에서 의상은 말했다. 다음과 같이.
“보이는 것을 따라 가면서 마음을 집착하지 않는 것이 바로 반정(返情이)이다. 들리는 것을 따라가면서 들은 대로 취하지 말라. 그러면 그것으로 말미암은 바를 능히 이해할 수 있고, 또 존재의 참다운 본성을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은 제자 지통이 스승의 강의를 기록하여 남긴 <지통기(智通記)> 중의 한 구절이다. 의상은 태백산에 밝힌 화엄교의 등불이 신라에 두루 비칠 것을 염원했고, 그 법등이 오래오래 전해지도록 노력했다. 그 노력은 교단의 조직과 확대, 제자 교육 등으로 전개되었다. 그 결과 태백산에서 밝힌 그 하나의 등불 백이 되고 천이 되고 만이 되어 세월의 바람에도 꺼지지 않고 타는 무진등이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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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왕도 당연히 의상을 공경했다. 국왕은 토지와 노비를 부석사에 시납(施納)하여 공경의 뜻을 표하고자 했다. 그러나 의상은 국왕의 호의를 사양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들의 불법(佛法)은 평등하여 높고 낮은 것이 함께 균등(均等)하고, 귀하고 천한 것이 같은 도리를 지니고 있습니다. 󰡔열반경(涅槃經)󰡕에는 여덟 가지 부정한 재물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전장(田莊)이 필요하고, 어찌 노복을 거느리겠습니까? 빈도(貧道)는 법계(法界)로써 집을 삼고 바릿대로 농사지어 익기를 기다립니다. 법신(法身)의 혜명(慧命)이 이를 의지해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의상은 불교의 평등사상을 강조하면서 국왕의 제의를 거절했던 것이다.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엄격한 골품제사회에 살면서, 국왕의 호의를 마다하고 인간의 평등을 주장하는 일은 참으로 용기 있는 일이었다. 그의 문하에서 노비 출신인 지통(智通)이나 가난한 평민 출신인 진정(眞定) 같은 제자 함께 수행할 수 있고, 훗날 이들도 십성(十聖)제자로 존경받을 수 있었던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은 여러 성을 쌓고 궁궐을 장엄하고 화려하게 단장했다. 특히 21년(681) 6월. 왕경(王京)을 새롭게 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관리에게 명했다. 도성(都城)을 새롭게 축성한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부석사의 의상(義相)은 왕에게 글을 올려 간(諫)했다. 다음의 내용으로.

의상의 화엄일승법계도.크게보기

왕의 정교(政敎)가 밝으면, 비록 풀밭에 선을 그어서 성(城)이라고 하더라도 백성이 감히 넘지 못하고 재앙을 씻어 복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정교가 밝지 못하면, 비록 장성(長城)이 있다 하더라도 재앙이 없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의상의 이 글을 접한 문무왕이 역사를 중지하였다. 국왕은 7월 1일에 돌아갔다. 이와 같은 내용이 <삼국사기>에도 전한다. 물론 <삼국사기>에는 왕이 경성(京城)을 일신(一新)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이에 관해 의상에게 자문을 구했다고 했음에 비해 <삼국유사>의 기록은 의상이 스스로 왕에게 글을 올려서 간한 것으로 되어 있다. 문무왕이 의상에게 자문을 구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이 사실이었을 것이다. 사람들을 수고롭게 하여 성을 쌓는 일보다는 좋은 정치를 펼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는 의상의 건의를 접한 국왕은 이에 따라 곧 공사를 중지하게 했다니, 문무왕이 의상을 어느 정도 공경했는지, 또 의상의 영향력이 얼마나 컸는지를 짐작해 볼 수 있다.
하가산(下柯山), 즉 안동의 학가산 골암사(骨嵒寺)에 살던 제자 오진(悟眞)은 밤마다 팔을 뼡여서 스승이 계시는 부석사의 석등에 불을 켰다고 한다. 그렇게 부석사 무량수전 앞의 석등은 장명등(長明燈)으로 빛을 발하고 있었던 것이다.
김상현(동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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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관음행 2009-05-05 02:06:04
답변  
교수님 반가워요. 오랜만에 글을 만나니 이산가족 상봉한 것 같아요. 교수님 사랑해요.^^
© 미디어붓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