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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룡은 또다시 올 것인가

| | 2008-10-27 (월) 10:14

절들은 별처럼 벌여 있고(寺寺星張), 탑들은 기러기 행렬인양 연이어 서 있다(塔塔雁行).

이처럼 신라 왕경 서라벌에는 사찰도 많았다. 그 중에서도 황룡사는 더욱 크고 중요한 절이었다.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이 절에 관련 기록이 적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다. <삼국유사>에는 가섭불연좌석, 황룡사장육존상, 황룡사구층탑, 황룡사종 등의 항목이 있고, <삼국사기>에도 20회에 가까운 기록이 보인다.

진흥왕 14년(553) 2월, 왕이 명하여 월성 동쪽 용궁(龍宮) 남쪽에 새로운 궁궐을 짓도록 했다. 그런데 그곳에 황룡(黃龍)이 나타났다. 이를 의아하게 생각한 왕은 원래의 계획을 바꾸어 사찰로 개조하고 절 이름을 황룡(黃龍)이라고 했다. <삼국사기>에는 진흥왕 27년(566)에 황룡사가 준공되었다고 했는데, <삼국유사>에는 진흥왕 30년에 공사를 마쳤다고 했다. 아마도 중요한 건물을 세우고 난 뒤에도 담장을 쌓는 등 마무리 공사까지는 더 많은 시간이 걸렸던 것 같다.

새로운 궁궐을 짓는 곳에 황룡이 나타났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천인감응(天人感應)의 상서였다. 천인감응을 강조하는 <회남자(淮南子)>에 의하면, 성인은 하늘의 마음을 품고 엄정하게 천하를 움직이고 변화시키는 자이기에 정성이 안에서 느껴지고 형기가 하늘에서 움직이면, 상서로운 별이 나타나고 황룡이 내려오며, 상서로운 봉황이 이른다고 한다. 이처럼 황룡이 나타나기 위해서는 하늘과 사람이 서로 통해야 한다. 진시황(秦始皇)이 천하를 병합하여 황제가 되니, 혹자가 말했다고 한다. “황제는 토덕(土德)을 얻었으므로 황룡과 큰 지렁이가 나타났다.”라고.

황색도 용도 왕권의 상징이다. 그러기에 황룡사(黃龍寺)와 황룡사(皇龍寺)는 같은 의미로 통했다. 새로운 궁궐을 짓고자 하는 장소에 황룡이 나타났다고 하는 것은 진흥왕의 덕을 한껏 찬양한 것이다. 그의 정성은 하늘과 통하는 것이라고. 그런데 진흥왕은 왜 짓던 궁궐을 사찰로 바꾸었을까? 궁궐과 사찰의 융합, 그것은 곧 세속적인 정치권력과 종교적 신성의 결합을 의미한다. 궁궐이라는 세속적인 공간을 사원이라는 성스러운 공간으로 전환시킴으로서 교묘하게 정치와 종교를 결합시킨 것이다. 흔히 황룡사를 신라의 국가 불교적 성격과 관련지어 설명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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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룡사는 전불(前佛) 시대의 절터였기에 이 절에는 가섭불연좌석(迦葉佛宴坐石)이 전해왔다고 한다. 가섭불은 과거불이다. 가섭불이 앉아서 참선하던 돌이 가섭불연좌석이다. 불전 뒤에 있던 연좌석은 5-6척이나 높이 솟아 있고, 그 위는 평평했다고 한다.

진흥왕 35년(574) 3월에 장육상(丈六像)을 주성해서 황룡사 금당에 봉안했다. 석가여래로 두 협시보살을 거느린 입상(立像)이었다. 이 불상은 본래 인도의 아육왕이 조성하려던 것이었다. 아육왕은 황철 5만 7천근과 황금 3만분을 모아서 석가삼존상을 주조하려했지만 세 번이나 실패했다. 이에 그는 철을 배에 실어 바다에 띄워 보내면서 인연 있는 나라에 가서 이루어 달라고 기원하면서 하나의 불상과 두 개의 보살상도 함께 실었다. 이 배는 남염부제(南閻浮提) 16대국과 5백 중국과 7천 소국, 8만 촌락을 두루 다녔지만, 불상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 배가 신라로 왔다. 신라에서는 잠깐 사이에 훌륭한 불상을 주성할 수 있었다. 무게가 3만 5천 7근이나 되는 장육상을. 신라는 참으로 불교와 인연 있는 나라였던 셈이다. 그리고 아육왕도 주성하지 못했던 불상을 진흥왕은 아주 손쉽게 만들었던 것. 7백 년의 세월은 문제되지 않았다. 아육왕의 못 다한 꿈을 진흥왕은 단숨에 이룸으로서 두 왕은 인연의 끈으로 연결되었다. 그리고 진흥왕은 아육왕과 같은 전륜성왕(轉輪聖王)을 꿈꾸었다.

선덕왕 14년(645) 3월, 황룡사에는 목조 9층탑을 건립되었다. 자장의 건의를 받아들여 세운 탑이었다. 이 탑에는 자장이 모셔온 불사리를 봉안했고, 일통삼한(一統三韓)의 기원을 담기도 했다. 경덕왕 13년(754)에는 황룡사의 종을 만들었다. 길이 1장 6촌, 두께는 9촌, 무게 49만 7천 5백 81근이나 되는 매우 큰 종이었다. 봉덕사종의 4배나 되는 거대한 종을 시주한 이는 효정(孝貞) 이간과 삼모(三毛)부인이고 장인은 이상택(理上宅) 하전(下典)이었다. 이 무렵 유명한 화가 솔거(率居)는 황룡사 벽에 노송을 그렸다. 나무의 체간이 거칠게 비늘지고 지엽이 구불구불한 것이 마치 살아있는 듯하여 가끔 새들이 날아들다가 떨어지곤 할 정도였다. 또 이 절에는 8세기 초의 대표적인 화랑인 사선(四仙)의 무리가 세운 우화문(雨花門)이 있어서 고려 전기까지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황룡사는 국왕이 행차하여 백고좌법회(百高座法會)에 참석하거나 혹은 관등(觀燈)하는 절이었다. 경문왕은 6년(866) 정월 15일에 황룡사에 거둥하여 연등을 보고 백관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진성여왕도 4년(890) 정월 15일에 황룡사에 거둥하여 연등을 관람하였다. 아마도 해마다 정월 보름이면 황룡사에 연등회가 열리고 국왕이 행차했던 것 같다. 진평왕이 44년(622) 정월에 황룡사에 거둥했던 것도 관등과 관련 있었을 가능성이 많다. 연등회는 고려 초까지도 정월 보름에 열렸지만, 차차 2월 15일로 바뀌었고, 고려 무신정권시기에 이르러 4월 8일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진평왕 35년(613) 7월에 수나라 사신 왕세의(王世儀)가 오자 황룡사에 백고좌를 설하고 원광(圓光) 등 법사를 맞아다가 경을 강하였다. 백고좌법회는 백 명의 고승을 청해 법문을 듣는 법회로 <인왕반야경(仁王般若經)에 그 배경이 있다. 이 경의 호국품(護國品)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span>

그대들 제왕(諸王)은 도량을 잘 꾸미고 백 개의 불상과 백 개의 보살상과 백 개의 사자좌를 놓고서 백 명의 법사를 청하여 이 경을 해설하라. 그 앞에는 갖가지 등을 밝히고 갖가지 향을 태우며, 갖가지 꽃을 뿌려라. 필요한 일체를 공양하고 매일 두 번씩 이 경을 강독하라. 만약 왕과 대신과 비구니, 우바쇄 우바이가 그것을 듣고 간직하며 독송하며 법대로 수행하면 재난이 곧 사라지리라. 대왕들의 국토 안에 있는 무수한 귀신들이 이 경을 듣는다면 국토를 지켜 주리라.

이처럼 <인왕경>을 토대로 하는 백고좌강회는 신라 하대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었다. 선덕여왕 5년(636) 왕의 병에 의술조차 효험이 없자 황룡사에 백고좌회를 열어 <인왕경(仁王經)>을 강의하고 100명의 출가를 허락했다. 헌강왕은 2년(876) 2월 황룡사에서 승려들에게 공양을 베풀고 백고좌를 열어 경을 강하게 하고 그도 친히 참석하여 이를 들었다. 헌강왕 12년(886) 6월 왕의 병환이 있자 황룡사에 백고좌회를 베풀고 경을 강설케 했다. 정강왕도 2년(887) 정월에 황룡사에 백고좌법회를 베풀고 친히 행차해서 청강하였다. 진성여왕도 즉위년(887) 7월에 황룡사에 백고좌법회를 베풀고 친히 행차해서 청강하였다. 경애왕도 즉위하던 924년 2월 29일에 황룡사에서 백고좌회를 개최토록 하고 왕이 친히 향을 피우고 불공을 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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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룡사에서는 흔히 당대의 대표적인 고승이 경을 강의하곤 했다. 중국에 유학하던 자장은 선덕여왕 12년(643)에 귀국했다. 자장은 황룡사에서 7일 동안 밤낮으로 <보살계본(菩薩戒本)>을 강의한 적이 있다. 이때 하늘에서 단비가 내리고 구름 안개가 자욱이 끼어 강당을 덮었으므로 사부대중이 모두 그의 신기함에 탄복했다고 한다. 황룡사에서 행한 원효(617-686)의 <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 강의는 유명하다. 원효는 신라 왕실의 특별한 부탁을 받고 <금강삼매경>을 주석하고 있었다. 병으로 고통 받고 있는 왕비의 쾌유를 빌기 위한강경법회에 강의를 부탁 받은 거이었다. 약속한 날이 거의 되었을 때, 박덕한 무리가 원효가 새로 지은 소, 즉 <금강삼매경론> 5권을 훔쳐갔다. 이에 원효는 3일을 연기하고, 다시 3권을 집필했는데, 오늘날까지 전하고 있는 <금강삼매경론> 3권이 바로 그것이다. 강경(講經)의 날이 되자 왕과 신하, 그리고 도속(道俗) 등 많은 사람이 구름처럼 황룡사의 법당을 가득 메웠다. 원효의 강의가 시작되었다. 그의 강론에는 위풍이 있었고, 논쟁이 모두 해결될 수 있었다. 그를 찬양하는 박수소리가 법당을 가득 메웠다. 이때 원효는 말했다.

“지난날 백 개의 서까래를 구할 때에는 내 비록 참여하지 못했지만, 오늘 아침 대들보를 가로지름에 당해서는 오직 나만이 가능하구나.”

원효는 백고좌법회에 초청받지 못한 적이 있었던 것 같다. 높은 법좌에 앉은 고승을 서까래에 비하면서 자신은 하나의 대들보라고 자부하고 있기에. 원효의 일갈에 모든 명성 있는 승려들이 고개를 숙이고 부끄러워하며 가슴 깊이 참회했다고 한다.

경덕왕은 재위 13년(754) 여름에 법해(法海) 대덕을 황룡사로 초청해서 <화엄경>을 강하게 하고 그도 친히 가서 향을 피웠다. 왕은 조용히 법해에게 말했다.

“지난 여름에 태현 법사가 <금광명경(金光明經)>을 강의하니 우물이 일곱 길이나 솟아났습니다. 이 분의 법도는 어떠합니까?”

이에 법해는 동쪽의 연못이 넘치고 바닷물이 감은사에까지 이르는 이변을 연출함에 왕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일어나 절하고 존경했다.

황룡사가 배출한 고승 또한 한두 명이 아니다. 신방(神昉), 연기(緣起), 정수(正秀), 지해(智海) 등은 모두 황룡사 출신의 승려였다. 신방은 당나라 현장 문하의 뛰어난 제자 중의 한 명으로 유명했다. 그가 황룡사 출신이었음은 원신(源信)의 <일승요결(一乘要訣)>에 ‘신라 황룡사 사문 신방’이라는 기록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신방은 <십륜경소(十輪經疏) 등 6종의 저서를 남긴 유식학승이다. </span>

8세기 중반에 화엄사를 창건했던 승려 연기(緣起)도 황룡사 출신이다. 그가 경덕왕 13년(754) 8월에 시작하여 이듬해 2월에 완성한 <화엄경> 사경은 지금 국보로 전하고 있다. 그는 <화엄경>과 <기신론>에 두루 통한 화엄학승으로. <화엄경개종결의(華嚴經開宗決疑)> 30권을 비롯한 5종의 저서를 남기기도 했다. 8세기 후반의 황룡사에는 지해(智海)가 있었다. 지해는 원성왕(785-799)의 초청을 받아 궁궐에서 50일 동안이나 <화엄경>을 강의했다. 그도 뛰어난 화엄학승이었던 것 같다. 길거리에서 아이를 낳고 얼어 죽게 된 거지 여자에게 옷을 벗어주어 목숨을 구했던 정수도 황룡사 승려였다. 이 일로 해서 그는 애장왕(800-809) 때 국사(國師)에 봉해졌던 고승이다.

황룡사는 몽고군에 의해 1238년에 불탔다. 그로부터 770년 세월이 흐른 지금 황룡사 복원을 위한 논의가 본격화 되고 있다는 소식이 있다. 반가운 일이다. 웅장했던 건물과 9층탑은 세울 수 있을 것이지만, 국왕의 행차와 백고좌회와 고승의 법문은 역시 흘러간 역사가 되고 말 것이다. 그래도 황룡사는 우리들 집단 기억에라도 남았지만, 잊혀져간 과거의 문화유산이 얼마나 많은가.

김상현(동국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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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연화심 2008-10-31 23:46:03
답변  
황룡사를 복원하여 남북통일과 세계평화를 해야 겠습니다. 교수님 !! 그러면 황룡이 다시 돌아와 대한민국 국운상승이 될까요!  황룡사 복원되면 개원 법회에 교수님을 초대해서 강의를 하시면 신라 원효스님이 강의 하시던 모습이 떠 오를 것 같습니다... 그러면 연화심 법회에 참석하면 깨달음이 오겠는지요?...
청련화 2008-11-01 17:02:07
답변  
황룡사 구층탑의 추억을 통하여 모든것이 무상함을 가르쳐 주시더니 이제 새로운 기운의 힘찬 황룡의 부활을 통하여 우리에게 희망을 전해 주십니다. 경제가 어렵고 시절이 하수상한 시절에 정말 좋은글 감사드립니다. 정말 살 용기가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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