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연재 > 김상현의 에세이삼국유사

본디 내 것이지만 빼앗긴 것을 어찌 하리

| | 2008-08-26 (화) 00:00

6세기 후반 신라 사량부(沙梁部)에 뛰어난 한 미인이 있었다. 그는 평민이었지만 복숭아꽃처럼 아름다웠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도화랑(桃花娘)이라고 불렀다. 주색에 빠져 음란하기로 이름난 진지왕(眞智王: 576~579)이 소문을 들었다. 궁중으로 불러들여 욕심을 채우고자 했다. 이에 여인은 말했다.
“여자가 지켜야 하는 것은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 일입니다. 그런데 남편이 있는데도 남에게 시집가는 일은 비록 만승(萬乘)의 위엄을 가지고도 맘대로 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왕이 말했다.
“너를 죽인다면 어찌 하겠느냐.”
여인이 대답한다.
“차라리 거리에서 죽음을 당하더라도 딴 데로 가는 일은 원치 않습니다.”
왕은 희롱으로 말했다.
“남편이 없으면 되겠느냐.”
“되겠습니다.”
왕은 그를 놓아 보냈다.
이 해에 왕은 나라사람들[國人]에 의해 폐위되고 죽었다. 나라를 다스린 지 겨우 4년 만에. 그 후 2년 뒤에 도화랑의 남편도 죽었다. 남편이 떠난 지 열흘이 되던 날 한밤중에 그녀의 방에 진지왕이 평상시와 같이 들어와서 말했다.
“네가 옛날에 허락한 말이 있지 않느냐. 지금은 네 남편이 없으니 되겠느냐.”
그녀가 쉽게 허락하지 않고 부모에게 아뢰니 부모는 말했다.
“임금의 말씀인데 어떻게 피할 수가 있겠느냐.”
딸을 왕이 있는 방에 들어가게 했다. 7일 동안 머물던 왕이 사라지자 그녀에게는 태기가 있었다. 달이 차서 낳은 사내아이의 이름을 비형(鼻荊)이라고 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백제에도 미인은 있었다. 도미(都彌)는 평민이었지만 그의 아내는 부덕(婦德)이 있으면서도 아름다워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다. 개루왕(蓋婁王 : 128-166)이 소문을 듣고 그녀를 시험해 보려 하였으나 몸종을 치장하여 몰래 들여보내는 등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 노한 왕은 도미에게 죄를 씌워 두 눈을 뽑고 조그만 배에 태워 강에 띄워 멀리 보내 버렸다. 그 부인을 끌어들여 억지로 간음하려 함에 부인이 말했다.
“이제 이미 남편을 잃어 혼자 몸으로는 스스로를 부지할 수 없사온데 더구나 왕을 모시게 되었으니 어찌 감히 어기겠습니까? 그러나 지금은 제가 월경으로 온 몸이 더러우니 다른 날 목욕을 깨끗이 한 뒤에 오겠습니다.”
왕이 이를 믿고 허락하였다. 그녀는 배를 타고 천성도(泉城島)에 이르러 남편을 만나 함께 고구려의 산산(蒜山)으로 피하여 살았다.
7세기 중반 신라 검일(黔日)의 아내도 미인이었다. 검일은 대야성(大耶城)의 성주(城主)이자 도독(都督)이었던 김품석(金品釋)의 막료(幕僚)였다. 그런데 김품석에게 그의 예쁜 아내를 빼앗겼던 검일의 원한은 깊었다. 선덕여왕 11년(642) 8월 백제군이 대야성을 공격해 오자 검일은 백제군과 내통하고 창고를 불태우고 품석과 그의 부인을 윽박질러 죽게 했다. 백제군은 품석과 그의 부부의 머리를 잘라 부여로 가져가 옥중에 묻었다. 품석의 장인 무열왕은 백제를 정벌한고 승리의 축하연을 벌이던 660년 8월 2일에 검일을 붙잡아 거열형(車裂刑)을 집행하고 찢어진 사지를 강물에 던져 버렸다.
수로는 절세미인(絶世美人)이었다. <삼국유사>의 표현에 의하면 ‘자용(姿容)이 절대(絶代)했다’고 한다. ‘절대’란 아주 뛰어나서 그 당대에는 견줄만한 것이 없음을 의미한다. 당대 최고의 미인 수로의 남편은 강릉태수(江陵太守)를 지낸 순정공(純貞公)이었다. 절세미인을 아내로 둔 남편이라고 행복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깊은 산이나 큰 못을 지나가던 수로부인이 신물(神物)에게 붙들림을 당한 일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성덕왕(702~737) 때에 순정공(純貞公)이 강릉태수(江陵太守)로 부임하던 길에서도 일은 터졌다. 임해정(臨海亭)에서 점심을 먹고 있을 때다. 갑자기 동해의 용이 나타나 부인을 끌고 바다로 들어가 버렸기 때문이다. 남편은 엎어지면서 땅을 쳐보아도 아무런 방법이 없었다. 한 노인이 말했다.
“이 경내의 백성을 모아 노래를 지어 부르면서 막대기로 언덕을 치면 부인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공이 그 말을 따라 여러 사람이 함께 해가(海歌)를 부르도록 했다.
거북아. 거북아. 수로부인을 내놓아라.
남의 부녀를 빼앗아 간 죄가 얼마나 큰가.
네가 만약 거역하고 내놓지 않으면
그물로 잡아 구워 먹으리라
중구삭금(衆口鑠金). 여러 사람의 말은 쇠같이 단단한 물건도 녹일 수 있다고 하지 않는가. 여러 사람들이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부르는 노래 소리. “남의 부녀를 빼앗아 간 죄가 얼마나 큰가.” 용도 여론에 밀려 부인을 데리고 나와서 바쳤다.
사람들은 미인을 꿈꾼다. 그러기에 여자들은 자주 거울을 본다. 아름답고 예쁜 자신의 모습이 거울에 비치기를 희망하면서. 그러나 미인이라고 해서 모두 행복한 것은 물론 아니다. 오히려 미인박명(美人薄命)이니, 홍안박명(紅顔薄命)이란 말이 있을 정도로 팔자가 사나운 미인도 많았다. 예쁜 꽃으로 향하는 시선은 너무 많다. 그리고 그 꽃 꺾고 싶어 하는 사내들 또한 한두 명이 아니다. 그러기에 미인은 피곤하고 고달프다. 남편 도미에게 죄를 씌워 추방하고 그 아내를 기어이 욕보이려 했던 백제의 개루왕이나 죽은 뒤에 혼령이라도 기어이 도화랑을 찾아가는 진지왕을 보면, 그들의 욕망이 어떠한 것인지 짐작된다. 어디 그 뿐인가. 깊은 산이나 못 속에 사는 신물(神物)이나 동해의 용까지도 미인을 탐내지 않는가?
미인을 아내로 둔 남편들은 어떤가? 도미는 개루왕에게 두 눈을 뽑혔고, 검일은 사지가 찢기는 참혹한 변을 당했다. 천하일색(天下一色) 수로부인을 동해용에게 빼앗기고 엎어진 채 땅을 치던 순정공의 모습도 역시 처량하기는 마찬가지다. 모두 미인을 아내로 두었다는 그 인연 때문이었다.
헌강왕(憲康王 : 875-886)이 어느 날 개운포(開雲浦)에 행차하여 놀 때다.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자욱이 몰려와 길을 잃었다. 동해용의 조화이기에 좋은 일로 풀어야 할 것이라는 일관(日官)의 건의에 따라 왕은 용을 위해 근처에 절을 짓도록 명했다. 곧 구름과 안개가 걷혔기에 그곳을 개운포라 했다. 일곱 아들을 거느린 동해용이 왕의 앞에 나타나 기뻐하면서 왕의 덕(德)을 찬양하여 춤을 추고 음악을 연주했다. 그중의 한 아들인 처용(處容)이 왕을 따라 서울로 와서 정사(政事)를 도왔다. 왕은 아름다운 여자로 처용의 아내를 삼도록 하고, 급간(級干)이라는 직관(職官)도 주었다. 처용의 아내는 매우 아름다웠다. 그녀를 흠모한 역신(疫神)이 사람으로 변하여 밤에 그 집에 가서 남몰래 동침했다. 밖에서 돌아온 처용이 두 사람이 누워 있는 것을 목격했다.
역신은 돌림병을 퍼뜨린다는 귀신이다. 미인을 탐내기로는 귀신도 사람과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아내의 불륜을 목격한 남편, 그 순간의 처용에게도 수많은 생각이 스쳐갔을 것이다. 이 일을 어떻게 할 것인가? 잠시 머뭇거리던 처용은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면서 물러나왔다.
서울 밝은 달 아래
밤늦도록 노닐다가
들어와 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어라.
둘은 내 것인데
둘은 뉘 것인고.
본디 내 것이었다마는
빼앗은 것을 어찌하리오.
이것이 향가 처용가다. 아내의 불륜 장면을 직접 목격하고도 춤을 추며 물러날 수 있다니. 보통 상식으로는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모습이다. 미워할 것인가? 화를 낼 것인가? 미워하고 화를 내면 옛 사랑이 다시 돌아올 것인가?
부처님께서 기원정사에 계실 때, 한 천자(天子)에게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성낼 곳에서 성내지 않으면
마음은 깨끗하여 번뇌 없으리라.
만약 미움을 미움으로 대하면
그 악은 자기에게 되돌아오느니라.
바람을 마주하여 먼지를 떨면
먼지는 다시 자기에게로 오듯이
미움을 미움으로 대하면
그 미움은 반드시 자기가 받느니라.
미워하는 사람이나
미움을 미움으로 대하는 사람이나
그 누구도 재앙을 벗어나지 못하나니
원망을 원망으로 갚지 않아야만
스스로 큰 원수를 항복 받으리라.
사람들은 말한다. 참아야 된다고. 그러나 일에 닥쳐서 어디 그렇게 쉽게 참을 수 있단 말인가? 참지 않으면 또 어쩌란 말인가? 원효는 말했다.“참기 어려운 것을 능히 참으면 그것이 보살행이다.”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참기 어려움을 참는 것이 진실한 참음이요
누구나 참을 수 있는 것을 참는 것은 일상의 참음이다.
참을 수 없는 것을 참는 것이 수행의 덕이다.
부처님의 말씀을 통해서 원효가 한 말의 의미를 분명히 이해할 수 있다. “누구나 참을 수 있는 것을 참는 것은 일상의 참음이다.” 처용의 참음은 보통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상적인 참음은 아니었다. 이것이 역사 기록에 남은 이유다. <잡보장경>의 이 구절을 처용에게 적용할 수 있지만, 그가 언제 수행을 했단 말인가? 그래도 처용은 꾹꾹 참았다. 참을 수 없는 것을 참았다.
그리고는 춤추며 노래했다. “본디 내 것이었다마는 빼앗은 것을 어찌 하리오.” 흔히 사람들은 체념을 말하고 초월을 강조하며 집착으로부터의 해방을 말한다. 그러나 그것이 어찌 말처럼 그렇게 쉽단 말인가? “빼앗은 것을 어찌하리오.”라고 쉽게 체념하고 초탈할 수 있단 말인가? 체념하지 않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미 변해버린, 이미 떠나 버린 아내의 옛사랑을 어떻게 돌릴 수 있단 말인가?
부처님께서 기원정사에 계실 때였다. 어느 날 사왓티에 사는 한 바라문의 집을 방문하여 말씀하셨다.
“바라문이여, 왜 그렇게 낙담하고 슬퍼하시는가?”
“고따마시여, 제가 강가에서 경작지를 개간하고 파종한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제 밤에 홍수가 나서 그 곡식을 모두 쓸어버렸습니다. 하도 억울하고 분해서 이렇게 병이 들어버렸습니다.”
“바라문이여, 참 안 되었습니다만, 그러나 당신이 슬퍼한다고 이미 쓸려간 곡식들이 되돌아옵니까?”
“고따마여, 그렇지는 않겠지요.”
“그렇다면 더 이상 비통해 하고 있을 수만 없지 않습니까? 이 세상의 재물이나 곡식이란 것들이 내 것이 될 때도 있고 그렇지 못할 때도 있지 않습니까? 이미 가버린 것은 내 것이 아닙니다. 인연으로 이루어진 것들이란 덧없이 무너지는 것이니, 너무 그렇게 슬픔에 매달리지 마십시오.”
비록 “참 안 되었습니다.”라고 위로의 말씀을 하시기야 했지만, “당신이 슬퍼한다고 이미 쓸려간 곡식들이 되돌아옵니까?”라고 묻고 계신 부처님의 말씀은 차가우리만큼 현실적이고 합리적이다. 인연으로 이루어진 것들이란 덧없이 무너지는 것. 그러기에 인연으로 이루어진 사랑도 덧없이 무너지는 날도 있음을. 처용은 알았을까? 홍수에 쓸려간 곡식들이 되돌아올 수 없듯이, 이미 떠나버린 아내의 사랑도 돌아오기 어려움을. “집착하지 않음으로써 초월하게 되며, 초월함으로써 해방되는 것이다.” 부처님의 이런 교훈을 마음에 새기기라도 했을까?
처용이 너울너울 춤추며 순순히 물러나고 있을 때, 그때 역신이 본래의 모습을 나타내어 처용의 앞에 꿇어앉아 말했다.
“내가 공의 아내를 사모하여 이제 잘못을 저질렀으나 공은 노여워하지 않으니 감동하여 아름답게 여기는 바입니다. 맹세코 이제부터는 공의 모양을 그린 것만 보아도 그 문 안에 들어가지 않겠습니다.”
이 일로 해서 나라 사람들은 처용의 형상을 문에 그려 붙여서 사귀(邪鬼)를 물리치고 경사스러운 일을 맞아들이게 되었다.
김상현(동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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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들떨어진학생 2008-09-03 16:0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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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죽었는데, 왕이 찾아왔고, 또 왕의 아이를 배다니.,.이 설화의 숨겨진 뜻은 뭡니까. 그걸 풀이해 주셔야죠 교수님!!!
옹녀 2008-08-27 10:23:51
답변  
교수님 ! 옹녀 자숙 또 자숙 해야 겠습니다. 서양애들이 오죽하면 무쇠로 된 정조대를 채우고 전투나 출장을 갔겠습니까 ? ㅎㅎㅎ 그러나 변강쇠 같은 교수님이 계시는한 사랑의 역사는 계속 될 것 같습니다. ㅋㅋㅋ
신라의달밤 2008-09-03 16:0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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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영화로 만들면 진짜 멋진 옴니버스 러브스토리가 될텐데....신라 천년의 사랑, 질투, 배신, 분노...진짜 멋지지 않을까요.
하늘 2008-09-05 20:3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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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옛날에는 꿈속에서 만나 운우의 정을 나누어도 아이가 태어나고 ..꿈속에서 현몽하는 자리에서 부처님이 땅속에서 솟아나오고 ..그래서 말그대로 설화가 아닌가?  몽중설중이라  원래 지난 시절을 되돌아 보면서 우리는 꿈같은 시간이었다고 되뇌이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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