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연재 > 김상현의 에세이삼국유사

타오르는 원한의 불길

| | 2008-08-18 (월) 00:00

“반역한 신하[逆臣] 모척(毛尺)의 가족을 절로 몰입(沒入)시켜 노비로 삼았다.”

이것은 <삼국유사> 원종흥법염촉멸신조(原宗興法厭髑滅身條)의 주(註)에 보이는 매우 단편적인 기록이다. 간단한 이 기록만으로는 모척이 어느 때 어떤 인물인지, 그는 어떻게 반역을 시도했으며 또 왜 실패하여 가족까지 절의 노비가 되는 고통을 당해야 했는지 그 어떤 것도 알 길이 없다.

“660년 8월 2일. 신라의 국왕은 모척을 붙잡아 목 베었다. 모척은 본래 신라 사람으로 백제에 도망한 자인데, 대야성(大耶城)의 검일(黔日)과 함께 도모하여 성이 함락되도록 했기 때문에 목을 벤 것이다.”

<삼국사기>의 이 기록으로 모척에 관한 여러 의문이 풀리기 시작한다. 신라의 대야성은 642년 8월에 백제 장군 윤충(允忠)에 의해 함락되었다. 이때 모척은 신라를 배신하고 오히려 백제를 도운 뒤에, 성이 함락되자 백제로 도망해서 살았던 것이다. 퍼즐을 맞추듯, <삼국사기>에 산재하는 기록의 단편을 재구성해 보자. 모척 가족이 절의 노비가 된 사연을 추적하며.

선덕여왕 11년(642) 7월과 8월, 백제의 대대적인 공격을 받은 신라는 매우 위태로운 상황에 직면했다. 백제의 의자왕이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공격해 온 7월에는 미후성(獼猴城) 등 서쪽의 40여 성을 함께 빼앗겼다. 8월에는 다시 장군 윤충(允忠)이 이끄는 1만의 백제군이 대야성을 공격해 왔다. 지금의 합천에 있던 대야성은 김춘추(金春秋)의 사위인 도독(都督) 김품석(金品釋)이 지키고 있었다. 성문을 굳게 지키며 결사 항전을 독려하고 있을 때, 성중의 식량창고에서 불길이 솟았다. 식량창고가 불타버리자 성안의 민심은 일변했고 사기는 순식간에 꺾였다.

이 때였다. 품석의 보좌관 서천(西川)이 성에 올라가 소리쳤다.
“만약 장군이 우리를 죽이지 않는다면 성을 들어 항복하겠다.”
윤충이 큰 소리로 말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그대와 우호를 함께 하겠다. 밝은 해를 두고 맹서하겠다.”
서천이 품석과 여러 장수에게 권하여 성을 나서려 했다. 이 때 품석의 휘하에서 보좌역을 맡고 있던 죽죽(竹竹)이 말리며 말했다.

“백제는 자주 번복을 잘 하는 나라임에 믿을 수 없습니다. 윤충의 말이 달콤한 것은 반드시 우리를 유인하려는 것입니다. 만약 성을 나가면 반드시 적의 포로가 될 것입니다. 쥐처럼 엎드려 삶을 구하기보다는 호랑이처럼 싸우다가 죽는 것이 낫습니다.”

품석이 죽죽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고 문을 열어 병졸을 먼저 내보내 보았다. 백제의 복병이 나타나 모두 죽였다. 먼저 나간 장수와 병졸이 죽었다는 말을 들은 품석은 처자를 죽이고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기록은 조금씩 달라, 검일이 품석 부부를 윽박질러 죽였다고도 하고, 성을 나와 항복하는 품석과 그 처자를 윤충이 죽여 그 머리를 잘라 왕도(王都) 부여에 전했다고도 한다.

아무튼, 품석과 그의 처자의 목은 부여로 보내져 옥중에 묻히는 수모를 당했다. 마치 백제 성왕(聖王)를 참수하여 머리를 돌려주지 않았던 신라의 백 년 전 만행에 대한 앙갚음이라도 하듯이. 죽죽과 용석(龍石) 등은 끝까지 항전하다가 성이 함락되면서 전사했고, 사로잡힌 남녀 1천여 명은 백제군에 의해 서쪽 주현(州縣)에 강제로 옮겨져 살게 되었다. 쉽게 대야성을 함락한 백제 장군 윤충은 그 공로로 말 20필과 곡식 1천 섬을 받았다.

왜 그랬을까? 왜 갑자기 대야성의 식량 창고에 불이 났을까? 그 불은 백제군과 내통한 검일과 모척이 일부러 지른 것이었다. 사지(舍知) 검일(黔日)은 본래 품석의 막료(幕僚)였다. 그런데 도독 김품석에게 그의 예쁜 아내를 빼앗겼다. 처용(處容)은 아내를 빼앗기고도 “본래 내 것이지만 빼앗긴 것을 어찌 할 것인가?”라고 노래하고 춤추며 물러났다지만, 검일은 그렇지 못했다. 도독 품석을 향한 검일의 분노는 쌓여갔고 한으로 응축되고 있었다. 이럴 무렵 백제가 침략해 왔고, 검일은 백제군과 몰래 내통하고 창고를 불태웠던 것이다. 그것도 식량 창고를. 대야성에 치솟은 불길, 그것은 분노의 불길이었다. 사무친 검일의 원한이 불길로 화한 것이었다.

사위 품석과 딸 고타소랑(古陀炤娘)의 머리를 잘라 부여로 가져갔다는 그 참혹한 소식은 김춘추에게 크나큰 한을 안겨주었다. 하루 종일 기둥에 기대어 서서 사람이 앞을 지나가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그는 깊은 고뇌에 빠졌다. 이 사건을 계기로 김춘추의 적극적인 외교활동은 시작된다. 적지 고구려로 향하고 바다 건너 일본을 오갔던 외교적 노력은 실패했지만, 당 태종을 만나 20만 구원군을 약속받는데 성공했다. 동분서주하기 6년만인 진덕여왕 2년(648)의 일이다.

대야성전투의 패배로 궁지에 몰린 신라는 서부 국경지역의 대부분을 상실한 채 대백제 방어선을 지금의 경산인 압량으로까지 후퇴해야 했다. 압량주(押梁州)를 새로 설치하고 김유신(金庾信)을 군주에 임명하여 전열을 가다듬게 했다. 648년 4월 김유신은 옥문곡(玉門谷)전투에서 크게 이겨 의직(義直) 등 백제 장군 8명을 사로잡았다. 이에 김유신은 사로잡은 백제 장군 8명과 품석 부부의 시신과의 교환을 제의했다. 백제에서는 품석 부부의 뼈를 파내어 관에 넣어 보냈고, 유신은 8명의 백제 장수를 보내주었다.

대야성전투의 패배로 인한 신라의 위기상황, 이를 타개하는 과정에서 김춘추와 김유신은 중요한 정치세력으로 부각되고 654년 3월에는 김춘추가 왕위에 올랐다. 660년 7월 13일. 마침내 백제는 패망했다. 이날 신라 태자 법민(法敏)은 항복한 백제 의자왕의 아들 융을 말 앞에 꿇어앉히고 얼굴에 침을 뱉으면서 꾸짖었다.

“예전에 너의 아비가 나의 누이를 억울하게 죽여 옥중에 묻은 적이 있다. 나로 하여금 20년 동안 마음 아프게 하였는데, 오늘 너의 목숨은 내 손안에 있구나.”

융은 땅에 엎드려 말이 없었다.
그리고 8월 2일. 신라의 왕과 소정방(蘇定方), 그리고 여러 장수들은 대청마루에 앉았다. 의자왕과 그 아들 융은 마루 아래에 앉혔다. 의자왕으로 하여금 술을 따르게 하니 좌평 등 백제의 여러 신하가 목이 메여 울었다. 주연을 크게 베풀고 장병들을 위로하였다. 승리의 축하연을 벌이던 바로 이 날, 백제로 도망쳤던 모척과 검일을 붙잡아 처형했다. 검일과 함께 대야성 함락에 일조를 했던 모척은 참수형(斬首刑)에 처했지만, 주모자 검일은 더 참혹한 거열형(車裂刑)을 집행했다. 우선 검일에게는 죄목을 하나하나 말하였다.

“네가 대야성에서 모척과 모의하여 백제 군사를 끌어들이고 창고를 불 질러 없앰으로서 온 성안에 식량이 모자라게 하여 싸움에 지도록 하였으니 그 죄가 하나요, 품석 부부를 윽박질러 죽였으니 그 죄가 둘이며, 백제와 더불어 본국을 공격하였으니 그것이 세 번째 죄이다.”

마침내 검일의 사지를 찢어 강물에 던졌다. 사지(四肢)를 네 수레에 각각 매달고 말을 달리게 하여 사지를 찢는 가장 잔혹한 형벌이 거열형이다. 거열형이 집행된 검일의 사지는 백마강에 버려졌던 것이다.

검일의 사지가 던져진 백마강크게보기

642년 8월의 대야성전투, 이 전투는 삼국항쟁의 여러 전투 중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신라를 압도하게 된 백제의 의자왕은 자만심에 빠지게 되었고, 위기에 몰린 신라는 자구책(自救策)으로 당나라와의 군사동맹을 맺게 되었다. 김춘추와 김유신이 삼국통일의 주역으로 활동하는 계기를 마련해 준 것도 대야성의 함락이었다. 이처럼 중요한 역사적 사건의 배경에는 막료의 아내를 빼앗은 도독 품석의 패륜과 예쁜 아내를 빼앗긴 검일의 분노가 엉켜있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검일과 미모의 아내. 남의 아내를 탐낸 도독 품석. 분노하는 검일. 백제군의 대야성 공격. 검일과 모척의 배신. 목이 잘려 백제의 옥중에 묻힌 품석 부부. 김춘추의 한이 된 딸 고타소랑의 참혹한 죽음. 나당연합군의 백제 정복. 모척을 참수하고 검일의 사지를 찢어 강물에 던짐. 이 모두가 활활 타는 분노와 원한의 불길이었다. 그 불길은 전쟁이 되고 전쟁의 불길은 다시 사람들을 삼키고 있었다.

“보라 모든 것은 지금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다. 눈이 타고 있다. 눈에 비치는 형상이 타고 있다. 그 형상을 인식하는 생각도 타고 있다. 눈으로 보아서 생기는 즐거움도 괴로움도 모두 타고 있다. 그것은 무엇으로 인해 타고 있는가? 탐욕의 불, 노여움의 불, 어리석음의 불로 인해 타고 있는 것이다.”

세상은 이렇게 타고 있는 것일까? 부처님의 말씀처럼.

백마강에 던져진 검일의 찢어진 사지. 둥둥 강물 따라 떠내려가고 있었다. 마치 나무토막처럼. 하늘은 여전히 푸르고 아무 일 없었다. 불길 꺼짐에 모든 것은 끝났다. 아내와의 그 행복했던 옛 추억도, 아내를 빼앗기고 불같이 일어나던 분노의 마음도, 아아, 이제는 다 끝나버렸다. 아우성, 전쟁의 아우성도 끝나고, 사지가 찢어지는 그 고통도 사라지고, 승자의 웃음소리도 패자의 눈물도 모두 역사의 강물에 떠내려가고 있었다. 역사의 강, 백마강을 따라서.

김상현(동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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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동백소 2008-08-20 09:47:18
답변  
백마강에 고요한 달밤아
고란사에 종소리가 들리어 오면
구곡간장 찢어지는 백제꿈이 그립구나
아~ 달빛 어린 낙화암의 그늘속에서
불러보자 삼천궁녀를
캬~이 노래가 절로 나옵니다.
연화심 2008-08-19 18:17:08
답변  
인생무상 제행무상 열반적정 일까요! 교수님 ...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사아 본사 석가모니불...
historia 2008-08-22 15:34:05
답변  
작은 원한이 큰 원한이 되고, 큰 원한이 백제를 삼켰네요. 그런데 패자가 망하는 것이 업력이라면, 승자가 이기는 것도 업력일까요. 저는 삼국에서 신라가 이기고, 그들의 한반도의 주인이 되었다는 사실이 업력이나 업보만으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납득이 잘 안돼요. 교수님, 그 비밀이 무엇일까요.
옹녀 2008-08-20 22:04:12
답변  
교수님 ! 옛날이나 지금이나 남의 마누라 보고 침흘리는 놈이 있었나 봅니다. 참혹한 전쟁은 여자 때문에 일어난다 하더니 삼국유사도 말하고 있군요! 옹녀 근신중입니다.~ 참으로 역사는 교훈입니다..좋은글에 감사 드립니다.
청련화 2008-08-25 01:05:17
답변  
historia 님 !  교수님의 글 11에 신라의 비밀병기가 출토되어 발표ㅋㅋㅋ, 현대병기로 말하면 핵탄두 미사일 정도의 위력일까? 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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