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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장(法藏)이 의상(義相)에게 보낸 편지

| | 2008-08-06 (수) 00:00

1300년전 법장이 의상에게 보낸 친필편지 唐賢首國師墨寶(卷子本). 일본 천리대(天理大) 소장.크게보기

천 삼백 년을 전해오는 편지 한 통이 있다. 험한 바다 건너 당나라에서 신라로 전해졌던, 지금까지도 원본이 전하는 이 편지는 법장이 의상에게 보냈던 것으로 유명하지만, 우정 어린 내용은 더욱 향기롭다.

당나라 수도 장안(長安) 가까이에 종남산(終南山)이 있었다. 의상(義相 : 625-702)이 종남산 지상사(至相寺) 지엄(智儼 : 602-668)의 문하로 들어갔던 때는 662년이다. 의상과 지엄의 만남에 얽힌 설화가 <삼국유사>에 전한다.

지엄은 의상이 오던 전날 밤에 꿈을 꾸었다. 하나의 큰 나무가 해동(海東)에서 나서 가지와 잎이 널리 퍼져 중국으로 와서 덮었다. 그 위에 봉(鳳)의 둥지가 있기에 올라가서 보니, 마니보주(摩尼寶珠)가 있어서 광명이 멀리 비치고 있었다. 지엄은 꿈을 깬 뒤에 놀랍고 이상하여 소제하고 기다렸는데 의상이 왔다. 특별한 예로 맞아서, “나의 어젯밤 꿈은 그대가 나에게 올 징조였구나.”라고 하면서, 입실(入室)을 허락했다. 의상은 화엄(華嚴)의 미묘한 뜻을 은미(隱微)한 부분까지 분석했다. 지엄은 영질(郢質) 만난 것을 기뻐하며 새로운 이치를 발굴해 내었다. 이야말로 깊은 곳을 파고 숨은 것을 찾아서 남천(藍茜)이 본색을 잃는 것과 같았다.

신라에서 자란 큰 나무의 가지와 잎이 중국을 덮었고, 봉의 둥지에 있던 마니보주가 빛을 발하고 있었다는 꿈을 통해 의상을 큰 그릇의 구도자로 강조하고 있음은 주목된다. 아마도 61세의 지엄은 머나먼 동쪽 나라 신라에서 온 38세의 젊은 구도자를 기쁘게 맞아 각별한 관심으로 가르쳤을 것이다. 청출어람(靑出於藍)할 거목을 기대하면서. 지엄 문하에는 혜효(慧曉), 박진(薄塵) 등 여러 제자가 있었지만, 참으로 걸출한 제자는 의상과 법장(法藏 : 643-712)이었다.

법장은 지엄이 운화사(雲華寺)에서 <화엄경>을 강의할 때 이를 듣고서 입문했는데, 대개 의상이 입실(入室)하던 그 무렵이었다. 당시 20세의 법장은 의상보다 18세 연하였고, 또한 정식으로 출가하지 않은 세속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16세 때 불탑 앞에서 손가락 하나를 태워 공양했고, 그 후 몇 년 동안 태백산의 암자에서 고행하며 불전을 공부했던 열렬한 구도자였다. 같은 스승 문하에서 함께 <화엄경>을 공부했던 의상과 법장의 교유는 진정 우정 깊은 것이었다. 그들의 우정에는 출가자와 세속인이라는 형식도 나이도 문제 되지 않았다.

스승은 제자들의 사람됨이나 장단점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러기에 각자의 장점과 특징을 잘 살리고 펼칠 수 있도록 지도하는 것은 스승의 당연한 도리다. 지엄은 의상과 현수 두 제자에게 각각 의지(義持)와 문지(文持)라는 호를 주었다. 의상은 수행자적인 실천수행에 장점이 있고, 법장은 학자적인 이론 탐구에 뛰어났음을 스승은 간파했던 것이다.

지엄은 돌아가기 전에 도성(道成)과 박진(薄塵) 두 제자에게 당부했다. 대(代)를 잇고 법을 유전(遺傳)할 사람은 오직 법장이라고. 이처럼 지엄이 의상을 제쳐두고 아직 출가도 하지 않은 젊은 법장에게 중국 화엄종의 제3조를 부촉한 것은 법장이 의상 보다 뛰어나다고 판단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어차피 의상은 고국 신라로 귀국할 것을 지엄은 짐작하고 있었을 것이기에.

과연 의상은 670년에 신라로 귀국했고, 이 해에 법장은 측천무후(測天武后)가 세운 태원사(太元寺)의 주지로 임명되면서 정식으로 수계했다. 법장이 측천무후를 위하여 화엄의 십현연기(十玄緣起)를 강의하고 지은 <금사자장(金師子章)>은 유명하다. 중국 화엄종의 제3조 법장은 일생 동안 <화엄경>을 30여 회나 강설했고, 화엄교학 연구에 주력, 많은 저술로 화엄학(華嚴學)을 집대성 했다. 그를 존경하는 많은 사람들은 그의 자(字)를 따라 현수(賢首)라고 불렀고, 황제는 국일법사(國一法師)라는 명예로운 호를 부여하기도 했다.

의상이 귀국한 뒤에도 두 도반은 깊은 우정을 나누었다. 바다를 사이로 멀리 떨어져 살았지만, 마음으로는 매우 가깝게 교유했던 것이다. 신라 승려 효충(孝忠)이 당나라로 갈 때 의상은 금 9푼을 그 편에 보내어 법장에게 전하도록 했던 일이 있다. 두 사람의 아름다운 인연이 이어지고 있었음을 알려주는 사례다. 법장 문하로 가서 화엄을 공부한 신라 승려도 있다. 곧 승전(勝詮)의 경우다. 아마도 승전의 유학은 의상이 추천했을 것이다. 의상이 분황사의 승려 순범(純梵)을 법장에게 보내어 ‘극과회심지의(極果廻心之義)’에 대한 법장의 생각을 물어보도록 했던 경우도 있다. 이렇게 두 사람의 교유는 계속되고 있었다. 그 무렵 신라와 당나라는 전쟁 중에 있었다. 전쟁의 와중에도 구도의 길은 열려 있었고, 진리의 벗은 서로 마음의 문을 닫지 않았다.

일본 고잔지(高山寺)에 소장된 의상 진영.크게보기7세기의 동아시아는 전쟁의 시대였다.

한반도는 전쟁의 먼지가 사방을 덮었고, 당나라와 일본까지도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의상이 도당 유학길에 올랐던 661년은 백제가 망한 이듬해였다. 그리고 그가 당나라로부터 귀국을 서둘렀던 것도 당의 신라 침공 계획을 신라 조정에 알리기 위함이었다. 당나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정복한 뒤에 한반도의 정복과 통치라는 본래의 야욕을 들어내자 신라와의 충돌은 피하기 어려운 상황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신라에서는 문무왕 9년(669) 5월에 김흠순(金欽純)과 김양도(金良圖)를 사신으로 당나라에 파견했다. 이듬해 1월 당 고종은 김흠순의 귀국만을 허락하고, 김양도는 옥에 가두었다. 사신을 옥에 가둘 때부터 당의 신라 침략 계획은 구체화되었다. 즉 군사 50만 명을 훈련하여 설방(薛邦)을 장수로 삼아 신라를 공격하려는 음모였다.

김흠순 등은 종남산의 의상에게 사람을 은밀히 보내어 당의 신라 침공 계획을 알려주고 서둘러 귀국할 것을 권유했다. 이 때문에 의상은 귀국을 서둘렀고, 그가 귀국한 670년부터 개시된 나당전쟁은 676년(문무왕 16)까지 계속되었다.

670년 4월 4일 말갈과 연합해서 공격해 오는 당군을 신라군이 대파, 목을 베고 사로잡은 수를 다 셀 수 없을 정도였다. 671년 6월 부여 임천 동쪽 석성(石城) 일대의 전투에서 신라군은 당나라 군사 5천 3백 명 살상. 10월 6일 당의 조운선 70여 척 격파. 675년 9월 신라 장군 문훈 등은 당의 설인귀군을 천성(泉城)에서 격파, 1천 4백 명을 베고 전마 1천 필 노획. 같은 달 신라군은 이근행의 당군 20만과 매초성에서 싸워 전마 3만 3백 80필 노획. 676년 11월 금강 하구 기벌포에서 설인귀군 격파, 신라군 크고 작은 22회의 전투에서 승리하고 당군 4천 명을 참살. 676년 세력이 꺾인 당군이 평양에 있던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요동성으로 옮겨감으로 나당전쟁은 끝나고 한반도에는 평화의 기운이 돌기 시작했다. 참으로 오랜 전쟁 뒤에 얻은 평화였다.

치열했던 신라와 당나라와의 전쟁도 끝난, 문무왕 16년(676)에 부석사를 창건한 의상은 화엄사상을 두루 펴기 시작했다. 소문을 들은 많은 사람들이 부석사로 찾아들었고, 국왕도 의상을 존경했다. 어느 날 의상은 법장이 보낸 편지를 받았다. 법장의 문하에서 공부하다가 귀국하는 신라 승려 승전(勝詮)의 편에 법장이 자신의 저술과 함께 부처 보낸 편지였다. 종남산을 떠나온 지 20여 년의 세월이 흐른 뒤인 690년-692년 무렵이었다. 692년이었다면, 의상은 68세, 법장은 50세였다.

당 서경 숭복사승(唐西京崇福寺僧) 법장은 해동 신라 대화엄법사(大華嚴法師) 시자(侍者)에게 글월을 드립니다.

한 번 작별한 지 20여년, 사모하는 정성이 어찌 마음머리에서 떠나겠습니까? 더욱이 연운(烟雲) 만리(萬里)에 바다와 육지가 첩첩히 쌓였으니 일생에 다시 만나 뵙지 못할 것을 한하니, 회포 연연하여 어찌 말로서 다 할 수 있겠습니까?

전생에 인연을 같이했고 금생에 업(業)을 같이했으므로, 이 과보를 얻어 대경(大經)에 함께 목욕하고, 특히 선사(先師)로부터 이 심오한 경전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우러러 듣건대, 상인(上人)께서는 고향으로 돌아가신 후 <화엄경>을 개연천명(開演闡明)해, 법계무애연기(法界無碍緣起)를 선양하여 겹겹의 제망(帝網)으로 불국(佛國)을 새롭고 또 새롭게 하여 크고도 넓게 이익을 끼치신다고 하니 기쁨이 더욱 더 하고, 이로써 부처님 멸후(滅後)에 불법을 빛내고 법륜(法輪)을 다시 굴려 불법을 오래 머물게 할 이는 오직 법사(法師)임을 알았습니다.

법장(法藏)은 진취(進趣)함에 이룸이 없고, 주선(周旋) 또한 적어, 우러러 이 경전을 생각하니 선사(先師)에게 부끄럽습니다. 분(分)에 따라 수지(守持)하고 버리지 않아 이 업(業)에 의해 미래의 인연 맺기를 원합니다. 다만 화상(和尙)의 장소(章疏)는 뜻은 풍부하나 글이 간략하여 후인이 그 법문(法門)에 들어가기가 매우 어려우므로 스님의 미묘한 말씀과 미언묘지(微言妙旨)를 자세히 기록하여 <의기(義記)>를 이루었습니다. 근일에 승전법사(勝詮法師)가 베껴 고향에 돌아가 그것을 그 땅에 전할 것이오니, 청하옵건대, 상인은 그 잘잘못을 상세히 검토하셔서 가르쳐 주시면 다행이겠습니다.

엎드려 원하옵건대, 당래(當來)에는 이 몸을 버리고 다시 몸을 받아 함께 노사나불(盧遮那佛)의 회상(會上)에서 이와 같은 한량없는 묘법(妙法)을 청수(聽受)하고, 이와 같은 한량없는 보현행원(普賢願行)을 수행하여 남은 악업(惡業)이 하루아침에 떨쳐버릴 것을 바랍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상인은 과거의 교분을 잊지 마시고, 어떠한 상황에 있더라도 정도(正道)로써 가르쳐 주시고, 인편과 서신이 있을 때마다 존몰(存沒)을 물어주소서.

이만 갖추지 못합니다.

법장(法藏) 화남(和南)

정월 28일.

이상은 법장이 의상에게 보낸 앞뒤가 잘 갖추어진 편지다. 편지를 쓴 해를 생략한 채 월일만을 기록한 것은 아쉬운 일이지만. 법장이 별도로 봉해서 보냈던 또 다른 서신 별폭(別幅)도 있었다. 이 서신은 <삼국유사> 승전촉루조(勝詮髑髏條)에 인용되어 전하는데, 다음이 그것이다.

<탐현기(探玄記)> 20권, 그 중 2권은 미완성이고, <교분기(敎分記)> 3권, <현의장(玄義章)> 등 잡의 1권, <화엄범어(華嚴梵語)> 1권, <기신소(起信疏)> 2권, <십이문소(十二門疏)> 1권, <법계무차별논소(法界無差別論疏)> 1권을 모두 승전(勝詮)법사가 초사(抄寫)하여 돌아갈 것입니다. 지난번 신라 스님 효충(孝忠)이 금 9푼을 전해주면서 상인(上人)이 부친 것이라고 하니, 비록 서신은 받지 못했지만 감사하기 그지없습니다. 지금 서국(西國)의 군지조관(軍持澡灌) 하나를 보내어 적은 정성을 표하오니 살펴 받아주시기 원하며, 삼가 아뢰옵니다.

한 스승의 문하에서 함께 동문수학하는 인연은 크다. 특히 바다를 건너서 만난 도반은 더욱 깊은 인연. <화엄경>이라는 대경(大經)에 함께 목욕한 인연은 참으로 아름답고 부러운 것. 그들 화엄행자(華嚴行者)가 생각하던 수행은 보현행원(普賢願行), 그리고 천명하고자 하던 사상은 법계무애연기(法界無碍緣起)의 화엄사상. 제망(帝網)은 제석천궁(帝釋天宮)의 보배 거물인 인드라망. 세상의 모든 존재들은 거물처럼 모두가 얽혀있다.

지금 필자가 쓰고 있는 이 원고가 얼굴도 모르는 많은 독자와 인터넷을 통해 얽히고 있듯이. 무한히 거대한 세계로부터 무한히 작은 세계에 이르기까지 세상의 모든 것들은 서로 연기한다. 그것이 제망이고 법계무애연기다. 붓다는 말씀하셨다. “연기(緣起)를 보는 자 그는 법(法)을 본다. 법을 보는 자 그는 연기를 본다.” 의상과 법장은 행복했다. 그들은 법계무애연기를 보고 있었으니.

법장의 많은 저서는 알뜰한 제자 승전이 필사하여 신라에 전했다. 법장의 글을 본 의상은 스승 지엄화상의 교훈이 귀에 들리는 것 같았다. 이에 열흘 동안이나 문을 닫고 탐구했다. 문을 열고 나온 의상은 뛰어난 제자 진정(眞定) 상원(相元), 양원(良圓) 표훈(表訓)으로 하여금 <탐현기>를 각기 나누어 강의하라고 했다. 그리고 말했다. 나의 식견을 넓혀 주는 이는 장공(藏公)이다.

법장 친필의 이 편지는 원래 신라로 전해졌을 것이다.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에 이 편지의 한 구절이 인용된 것도, 대각국사 의천(義天 : 1055-1101)이 편찬한 <원종문류(圓宗文類)>에 전문이 수록된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편지는 1147년 이전 어느 때에 송나라에 복귀(復歸)하여 전해지고 있었다. 의천이 송나라로 갔던 1085년에 가져다 전했을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두루마리로 되어 있는 이 편지 원본 뒤에는 이 진보(珍寶)를 수장했던 원말명초(元末明初) 12명의 제발(題跋)과 청말(淸末)의 여러 제발이 붙어 있다. 이 편지가 베이징의 유리창에 그 모습을 나타낸 것은 1816년. 오영광(吳榮光)이 이를 발견했고, 후에 건륭제(乾隆帝)의 황자(皇子) 성친왕(成親王)에게 귀속되었다가 다시 몇 사람 호사가의 소장을 거쳐 타이완으로 건너갔다가 1955년경 바다를 건너 일본에 이르렀고, 지금은 일본의 천리대학(天理大學) 도서관에 귀중하게 보관되어 있으니, 다시 천년 뒤에도 전해질 것이다. 필자도 이 친필 편지를 배관(拜觀)하는 행운을 얻은 적이 있다. 2000년 5월의 일이다. 대구MBC의 특집 다큐멘타리 ‘의상’의 취재를 위해서 동행했던 인연으로. 1,300년 오랜 세월에도 이 편지는 온전하게 보존되어 아직도 묵향이 풍겨오는 듯 했다.

김상현(동국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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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궁금이 2008-08-09 03:5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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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천이 왜 이 편지를 송나라에다가 갔다 주었을까요? 일종의 뇌물이었던가요?
청련화 2008-08-07 23:5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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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우주속 지구에 태어나고 또 한스승의 밑에서 동문수학과 불법을 만남 ~~ 이 거룩하고 아름다운 이야기 !.... 교수님이 아니면, 누가 이러한 인연의 소중함과 연기의 도리를 가리켜 배울수 있겠습니까? 정말 감사 드립니다. ㅅ ㄹ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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