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연재 > 김상현의 에세이삼국유사

짐승으로 보이는 사람들

| | 2008-07-08 (화) 00:00

수렵문전크게보기
고대인들에게 사냥은 자연스러운 생활의 일부였다. 유목민은 말할 것도 없지만, 농경사회에서도 수렵은 흔한 일이었다. 신라시대에는 매사냥을 즐기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진평왕(579-632) 때 천진공(天眞公)의 집에서 고용살이하던 우조(憂助)가 주인을 위해 매를 길렀고, 천진공의 아우는 지방관으로 부임하면서 형님이 기르던 좋은 매를 얻어서 근무처로 갔다. 고구려 보덕(普德)의 제자인 명덕(明德)도 출가 전에는 매사냥을 했었다.

<황룡사구층탑찰주본기>에 의하면, 신라의 고승 자장(慈藏)의 출가 동기도 사냥이었다. 자장의 속명은 선종랑(善宗郞), 그는 어릴 때 살생을 즐겨 매를 놓아 꿩을 잡은 적이 있다. 그런데 매에게 잡힌 꿩이 눈물을 흘렸다. 그 눈물을 보는 순간 자장의 마음도 크게 흔들렸다. 이를 계기로 그는 발심하고 출가를 결심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출가 수도를 결심하는 일은 쉽지 않은 일. 인생에 결정적 계기가 닥쳤을 때 구도의 길을 선택하게 되는데, 자장의 경우처럼 생명에 대한 강한 외경(畏敬)이 그 계기가 된 사례들이 있다.

사냥하는 모습이 조각된 굽다리접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크게보기혜통(惠通)은 당나라로 가서 무애(無畏)에게 사사하고 문무왕 5년(665)에 귀국, 7세기 후반인 신문왕(681-692)과 효소왕(762-702) 대에 활동했던 밀교(密敎)의 고승이다. 출가 전에는 그의 집이 남산 서쪽 기슭 은천동(銀川洞)의 동구에 있었다.

어느 날 집 동쪽 시내에서 놀다가 한 마리의 수달을 잡아 죽여 그 뼈를 동산 안에 버렸다. 다음 날 새벽 그 뼈가 없어졌으므로 핏자국을 따라 찾아가 보았더니, 뼈가 예전에 살던 구멍으로 되돌아가 새끼 다섯 마리를 안고 앉아 있었다.

혜통은 그 광경을 바라보며 한참 동안 놀라워하고 이상히 여겼다. 감탄하고 망설이다가 문득 속가를 버리고 출가수행의 길을 택했다.

진표(眞表)는 경덕왕(742-765) 때의 유명한 고승. 그의 고향은 김제, 집안은 대대로 사냥을 하며 살았다. 진표는 나이 10여 세에 이미 날쌔고 민첩했으며, 활쏘기 또한 잘 했다.

개원연간(開元年間 : 713-742)의 어느 날이었다. 진표는 짐승을 쫓다가 잠시 밭두렁에서 쉬었다. 그때 그는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 개구리를 꿰어 꿰미를 만들어 물속에 담가 두었다. 나중에 가져다 반찬을 만들 생각으로. 드디어 산으로 들어가 사냥을 했다. 사슴을 쫓다가 산의 북쪽 길로 돌아서 집으로 가게 됨으로써, 꿰어둔 개구리를 까맣게 잊어버렸다.

이듬해 봄 다시 사냥을 나갔을 때, 개구리 울음소리가 들렸다. 물속을 보니, 지난해에 꿰어둔 30여 마리의 개구리가 그때까지도 살아 있었다. 이 광경을 본 진표는 탄식하며 자책했다.

'괴롭구나. 입과 배가 꿰인 저 개구리들이 해를 지나면서 얼마나 많은 고통을 받았을까?'

이에 버드나무 가지를 끊고 개구리를 가만가만 놓아주었다. 이 일로 인하여 그는 뜻을 발하고 출가하였다. 나이 겨우 12살 때에.

꿩이 흘리는 마지막 눈물을 보았던 자장, 죽여서 버린 수달의 뼈가 살던 곳으로 돌아가 다섯 마리 새끼를 안고 있는 광경을 보았던 혜통, 입과 배가 꿰인 채 살고 있던 개구리들을 보았던 진표, 그들은 자신들이 괴롭혔던 동물의 고통을 보면서 곧 출가를 결심했으니, 생명의 존엄을 누구보다도 사무치게 느꼈기 때문이다.

개와 멧돼지가 조각된 신라토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크게보기

사냥으로 희생당한 동물을 계기로 그 장소에 사찰을 세운 경우도 있다. 영취사(靈鷲寺)와 장수사(長壽寺)가 그런 절이다. 신문왕 3년(683)의 어느 날, 신라의 재상 충원공(忠元公)은 지금의 동래인 장산국(萇山國) 온천에서 목욕하고 왕경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굴정역(屈井驛) 동지야(棟旨野)에서 쉬고 있을 때다. 어떤 사람이 갑자기 매를 놓아 꿩을 쫓았다. 금악(金岳) 쪽으로 날아간 꿩의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공이 매의 방울소리를 듣고 찾다가 굴정현 북쪽 우물가에 이르렀다.

매는 나무 위에는 앉아 있고, 꿩은 우물 속에 있는데, 물이 마치 핏빛처럼 붉었다. 꿩은 두 날개를 벌려 새끼 두 마리를 안고 있었고, 매도 그것을 측은히 여기는지 잡지 않고 있었다. 이 광경을 본 공은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그 땅을 점쳐 본 결과 절을 세울 만했다.

왕경으로 돌아온 공은 왕에게 아뢰어 굴정현청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 그리고 그 곳에 절을 세워 영취사라고 했다.

김대성(金大城 : ?-774)이 주로 활동했던 시기는 8세기다. 그의 아버지는 재상 김문량(金文亮)이었고, 그 자신도 745년(경덕왕 4) 5월부터 750년 1월까지 중시(中侍)였다. 그는 젊은 날 사냥을 좋아했다. 어느 날 토함산에 올라가서 곰 한 마리를 잡고 산 아래 마을에서 유숙했다. 그날 밤 꿈에 곰이 귀신으로 변해서 시비를 걸어 왔다.

“네가 어째서 나를 죽였느냐? 내가 도리어 너를 잡아먹겠다.”
대성은 두려워하며 용서해 주기를 청했다. 귀신은 말했다.
“네가 나를 위해 절을 세워주겠느냐?”
대성은 맹서했다.
“좋습니다.”

꿈을 깨자 땀이 흥건히 흘러 자리를 적셨다. 그 후로는 사냥을 금하고 곰을 잡았던 그 자리에 장수사(長壽寺)를 세웠다. 그로 인해 마음에 감동이 있어서 자비의 원이 더욱 더해갔다. 그래서 그는 시중직에서 물러난 751년부터 불국사와 석불사(石佛寺) 창건에 여생을 바쳤다. 김대성이 불국사와 석굴암을 창건하게 된 것도 곰 사냥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피를 흘리면서도 새끼를 끝까지 보호하던 꿩의 모습, 나무 위에 앉아서 우물 안의 그 처연한 광경을 바라보고만 있던 매, 순식간에 전개된 이 상황을 본 충원공은 감동했다. 굴정현의 청사를 다른 곳으로 옮기면서까지 그곳에 굳이 절을 지었던 것은 피를 흘리면서도 날개를 펼쳐 새끼를 보호하고 있던 꿩의 모습을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이리라.

김대성에게 잡혀 죽었던 토함산의 곰은 그날 밤 김대성의 꿈에 나타나 덤벼든다. 그리고는 대성으로부터 자신을 위해 절을 지어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낸다. 영취사와 장수사는 성소(聖所)에 해당한다. 매에게 쫓긴 꿩이 새끼를 보호하며 피했던 곳과 그리고 김대성이 곰을 잡았던 장소는 꿩과 곰이 지적해준 신성 지역이다. 고구려에서 흰 사슴이 나타났던 곳에 가람을 세우고 백록원사(白鹿薗寺)라고 했던 경우도 마찬가지다. 모두 동물에 의해서 들어난 성소였다는 점에서.

여러 종류의 새. 신라토우.크게보기

진평왕(579-632) 때의 화랑 구참공(瞿旵公)은 사냥을 즐겼다. 어느 날 승려 혜숙(惠宿)이 함께 사냥에 동행할 수 있기를 요청해서 승낙을 받았다. 젊은 날 낭도(郎徒)의 한 사람으로 한 때 풍류도(風流道)를 수행한 적이 있는 혜숙은 옷을 벗어 제치고 이리 뛰고 저리 달리며 사냥을 했다. 그리고 잡은 사냥감으로 고기를 굽어 서로 권하며 먹었다. 승려 혜숙도 조금도 꺼리는 기색 없이 잘 먹었다.

혜숙이 말했다.
“여기 맛있는 고기가 더 있습니다. 좀 더 드시겠습니까?”
공이 좋다고 답했다.
혜숙은 다른 사람을 물리치고 자신의 다리 살을 베어 소반에 담아서 드렸다. 옷에 피가 줄줄 흘렀다. 공이 깜작 놀라며 말했다.
“왜 이럽니까?”
혜숙이 말했다.

“처음에 내가 생각하기로는 공은 어진 사람지라 능히 자기를 미루어 동물에까지도 미치리라 하여 따라 왔습니다. 그러나 지금 공이 좋아하는 것을 보니 오직 살육에 몰두하여 남을 해쳐서 자기를 살찌울 뿐이니, 이것이 어찌 어진 사람 군자(君子)가 할 일이겠습니까? 우리의 무리는 아닙니다.”

혜숙은 박차고 일어나 가버렸다. 공은 크게 부끄러워하며 그가 먹은 것을 살펴보니, 소반에는 고기 살점이 그대로 있었다.

신효거사(信孝居士)는 공주(公州)에 살면서 효성으로 어머니를 봉양했다. 고기가 아니면 식사를 하지 않는 어머니. 그 날도 거사는 어머니를 위하여 활을 메고 집을 나섰다. 그리고 다섯 마리의 학을 발견하고는 힘껏 활을 쏘았다. 학은 모두 날아가 버리고, 오직 깃 하나가 떨어졌다.

그는 학이 떨어뜨리고 간 깃을 주어서 돌아왔다. 그리고 그 깃으로 눈을 가리고 행인들을 보았더니 모두가 짐승의 모습으로 보였다. 사람이 아닌 짐승만을 골라서 활을 쏠 수가 없게 된 상황에서 고기를 얻을 수가 없게 되었다. 근심하다가 자신의 넓적다리 살을 베어서 어머니를 봉양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국왕은 1년에 백 석의 쌀을 주어서 어머니를 봉양토록 했다. 효도를 마친 신효는 집을 희사하여 원(院)으로 삼고, 효가원(孝家院)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출가했다.

경주지방을 두루 다녀 보았지만 살만한 곳을 찾지 못한 그는 해변을 따라 명주(溟州)지방에 이르렀다. 학의 깃으로 눈을 가리고 보았다. 모두 사람의 모습이었다. 마침내 머물러 살 생각으로 오대산의 성오평(省吾坪) 골짜기로 들어갔다. 일찍이 자장(慈藏)이 띠 집을 짓고 살았던 곳, 지금의 월정사(月精寺)에서 거사도 살았다. 이곳에 머문 지 얼마 후에 다섯 분의 승려가 와서 물었다.

“그대가 가지고 온 가사(袈娑) 한 폭은 어디에 있습니까?”
거사가 어리둥절해 하자, 다시 말했다.
“그대가 집어서 사람을 보던 깃이 그것입니다.”

이에 그 깃을 내어 주자, 한 스님이 그것을 가사(袈裟)의 빈 곳에 갖다 대니 서로 꼭 들어맞았다. 그것은 깃이 아니라 베였다. 승려들이 돌아간 뒤에야 그들이 오류성중(五類聖衆)의 화신임을 알았다.

오대산(五臺山)은 동서남북과 중앙의 다섯 곳에 솟아 있는 봉우리로 인해 생긴 이름. 이 산의 오대에는 각각 불보살(佛菩薩)이 항상 머문다고 한다. 즉 동대의 관음보살, 서대의 대세지(大勢至)보살, 남대의 지장보살, 북대의 석가모니불, 중대의 문수보살 등이 각각 상주(常住)한다는 것이다. 이를 오류성중이라고 했다.

오대산의 오류성중은 다섯 마리의 학으로 화신했고, 깃 하나를 떨어뜨려 고기만을 고집하는 어머니와 그 어머니를 위해 매일 사냥에 나서는 신효를 깨우쳤던 것이다.

나는 과연 군자일 수 있을까? 남을 해쳐서 자기를 살찌울 뿐인 사람은 군자(君子)가 아니라고 했으니. 나는 과연 사람의 모습으로 보일까? 누군가 학의 깃으로 눈을 가리고 나를 본다고 할 때. 오히려 걱정이 많다.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자기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다.
그와 같이 다른 사람에게도 자기는 더 없이 소중하다.”
김상현 교수(동국대 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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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왕비호 2008-07-11 17:01:03
답변  
삼국유사는 우리에게 가장 큰 거울임에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요즘 짐승으로 보이는 사람들 많죠. 국민에게 값싼 소고기를 먹여주기 위해서 고심하신 청와대에 계신 분이나, 그 소고기(이거 국민의 세금으로 산거임) 먹고 한우보다 더 맛있다고 외치는 딴나라당 분들이나, 광화문에서 미국산 소고기 안먹겠다는 사람들을 군화발로 짓밟는 불쌍한 어느집 아들들이나, 걔네들보고 눈이 확 뒤집혀 쇠파이프 드는 시민들. 그 사람들이 오늘날 신삼국유사의 또다른 모델들이네요.
그나저나 교수님 강의는 정말 재밌습니다. 어느 한부분도 현실을 천근하게 비추지 않으면서도, 2008년 7월 한국의 모습을 이보다 더 아프게 지적하는 글 또한 없는 듯 합니다.
국민교수 김상현 forever~!!!
연화심 2008-07-12 23:37:55
답변  
교수님 왕비호님의 이야기대로 어느나라가 외국 소고기 홍보 모델로 대통령 총리 집권여당 경제인까지 미국산 소고기 쳐먹기 모델로 나서는 곳이 있습니까? 미국이 우리자동차 사고 안난다고 백악관 집권 상원 하원 부통령 미국 경제인이 시승하면서 홍보합니까? 몰래 뇌 숭숭 고기 먼저 많이 먹은것 같아요 ! 교수님을 국회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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