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게보기2002년 8월 26일, 제가 일본에 온 날입니다. 그러니, 법적으로 비자가 만료되는 날은 8월 25일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가득 채워서 있을 수는 없습니다. 8월 25일부터는 2학기 강의를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23일 가기로 한 것입니다. 24일 하루는 머리도 깎고, 학교에 가서 연구실 청소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과연 그 동안 일본에서 무엇을 보면서, 무엇을 느꼈고, 무엇을 공부하였던가? 한 마디로 나는 이국에서의 1년을 어떻게 살았던 것일까? 그리고 그런 과정을 통해서 어떤 변화가 있었던 것일까? 이 글은 그러한 질문에 대한 해답으로서, 제 스스로를 위해서는 “정리”가 될 것이며, 저를 응원해 준 모든 분들께는 “보고”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애시당초 분명한 계획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인도를 처음 갈 때도 그랬습니다만, “일단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강했지요. 물론, 유학을 못한 까닭에 가졌던 열등감의 극복, 외국어 하나라도 해야겠다는 절박감, 앞만 보고 달렸던 학교생활에서 쌓였던 심신의 피곤함 --- 등. 이 모두를 일거에 해소할 수 있는 탈출구는 “연구년”이었고, “해외진출”이었습니다.(이제 어느 정도는 해소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인도로 가려고 했습니다만, 중간에 계획을 급거 변경해서 일본으로 왔습니다. 이 계획의 변경에는 몇 가지 이유들이 있습니다만, “만약 일본에 오지 않고 인도로 갔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분명 여러 가지 인연이 다르기 때문에 많은 차이를 가져왔으리라 생각됩니다만, 역사에 있어서 가정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순간순간 최선을 다하고 살 수 밖에 없는 것이겠지요.

이 약속을 과연 지켜냈던 것으로 평가할 수 있을까? 우선, “1년 동안에 한국에 오지/가지 않겠다”는 약속을 한 가장 현실적인 이유는 “일본어”에 있습니다. 하루라도 일본에서 오래 살아야 한 마디라도 더 알아들을 수 있고, 한 마디라도 더 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또는 외형적으로 보면 이 약속은 “지켰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솔직히 고백하면, 한번 들어가려고 마음먹었던 적이 있습니다. 결국, 가족들의 반대(“들어오지 말라”, “약속을 지켜라”)로 타율적으로 서원을 지킨 셈이 되었습니다만, 이 해프닝을 통해서 제가 얻은 교훈은 정말 “약속은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좀더 해야 하는데요. 우선, 제가 “1년 동안 한국에 오지/가지 않겠다”는 서원을 세운 것은 현실적으로는 “일본어”에 있었지만, 그보다 더 깊이는 “세계학계에서 학문 활동을 하고 싶다”는 원(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귀국 해프닝이 벌어졌던 데에는, 이 생각을 좀 놓아버리게 된 것에 더 큰 이유가 있었지 않나 생각됩니다. 거기에는 저 나름의 “종교적 체험”(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스님들 법문 들어보면 매양 하시는 말씀이 “탐․진․치 삼독을 버리자”는 것입니다. 『관음시식(觀音施食)』에 보면, “몰록 탐․진․치를 버리고 나면 업의 불길이 이내 서늘하게 된다.”(頓捨貪瞋癡, 業火頓淸凉)이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저희 은사스님께서는 특히 이 구절에 대한 법문을 많이 하셨습니다. 늘 듣는 이야기였지만, 내 이야기가 아니었지요. 그런데, 저는 어느 날 “탐․진․치 삼독심을 버리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그때의 일을 시로 적어보았습니다. 「卒業」이라 제목을 부쳤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무슨 도를 통했다는 이야기가 결코 아닙니다. 저는 아직 멀었습니다. 앞이 캄캄 합니다. 다만, 이러한 작은 체험 역시 우리들을 종교적 세계로 이끌어주는 하나의 실마리가 될 수 있지 않은가 싶을 뿐입니다. 물론, 그날 이후로도 삼독이 완전히 일어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일어납니다. 여전히 ----. 그러나, 저로서는 「졸업」 이전과 이후가 다른 느낌을 현재까지도 확연히 갖고 있습니다. 가장 큰 차이는, 삼독심이 훨씬 줄어든 것도 사실이지만, 일어난다 하더라도 그것을 다스리기가 그 이전보다 훨씬 수월해 졌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여전히 “돈사(頓捨)”만이 아니라 “점사(漸捨)”라고 하는 끝없이 이어져야 할 수행이 필요한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입니다.(돈수/頓修 만이 아니라 점수/漸修가 필요한 것같이.) 어쨌거나, 저로서는 이제 부처님 말씀을 확연히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수행해야 한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재인식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무렵 저는, 앞에서 이미 말씀드렸습니다만, “구하지 않는 것이 가장 위대한 종교라”고 하는 인식을 얻어서 실로 마음 속에 여러 가지 망상을 내다 버리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런 중에 “1년 동안 한국에 오지/가지 않겠다”는 서원의 밑바닥에 있었던 학자로서의 국제적인 활동욕(活動慾)마저도 내다 버리게 된 것입니다. 그런 생각이 있었기에 어떤 외부적 일을 핑계로 서원을 어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이때 이런 저를 붙들어 준 것이 아내와 아들입니다.

이렇게 부처님께 참회드렸으며, “세계학계에서 학문활동을 하고 싶다”는 의지를 욕심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의무의 차원에서 행해야겠다고 다시금 마음먹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의무”는 일체 욕심이 없기에 솟아나는 행위의 동인을 말합니다. 따라서 그것은 하기 싫은데도 억지로 해야 한다는 뜻에서의 의무와는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는 개념입니다. 이 “의무” 개념은 『기타』를 이해하는 핵심적인 개념의 하나인데, 그 의미 역시 일본에서 새롭게 깨달은 것입니다.) 땅바닥에 떨어질 뻔했던 서원을 다시 주워담았습니다.

둘째 서원은 명백하게 지켜내지 못했습니다. 다른 데는 특별한 문제가 없었습니다만, 문제는 치통이었습니다. 그때 쓴, 「齒痛」이라는 제목의 시입니다.

두 가지 서원의 지계(持戒) 여부는 이러했습니다. 이제 공부이야기로 들어가 보기로 하지요. 역시 먼저 이야기해야 할 것은 “일본어”입니다. 일본어가 얼마나 늘었는가? 우리 일어선생님들이나 오노다 선생님같은 분은 “빨리 늘었다”고 하시지만, 저로서는 “아직 아직”입니다. 여전히 “말하고자 할 바 있어도 다 말하지 못하는 어린 백성”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니, 어느 정도 의사소통은 된다고 하더라도 역시 좀더 “일본사람 다운 표현”을 행하지는 못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존경어 표현이라든가 ----. 그래서, 1년이란 세월은 너무나 짧다고 말하게 됩니다. 만약 1년만 더 있을 수 있다면, 좀더 능숙하게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 방법은 없습니다. 그나마 그 전과 같은 상태는 아니고 일본 사람 만나는 일에나, 학회 발표하는 일에나 “큰 두려움은 없다”는 것으로 소득을 삼아야 할 것 같습니다.

200자 × 350매. 우선 우리말로 쓴 논문. 이를 다시 축약하여 일본어로 번역하여, 불교대학 불교학회에서 나오는 논문집에 투고하였습니다. 우리말 논문은 한국에 가서 발표할 수 있으나, 분량이 많아서 수록해줄 논문집이 나올지 그것이 걱정입니다.

이들에 대해서는 앞서 언급한 바 있습니다. 『기타』와 관련하여서는 금년 “일본인도학불교학회”(9월 6일 ～ 7일, 교토 불교대학)에서 발표할 논문으로 「아르쥬나의 회의에 보이는 의미」를 일본어로 썼습니다. 그러니까, 일본어로 논문을 2편 썼습니다. (그 외에도 제 논문 「저자의 부재와 불교해석학」, 「전통적 불교학의 방법론에 나타난 현대적 성격」의 맺음말을 일본어로 번역해 보았습니다. 물론, 두 분 일어 선생님을 포함하여 여러 분들의 “감수”가 있었습니다.) 또한 『천수경』에 대한 논문을 쓰면서 그 동안 발표한 관련 논문을 모두 조금씩 수정․보완하는 작업을 했습니다만(현재 200자 × 1700매 정도), 아직 단행본으로 묶기에는 연구가 미진한 부분이 있음을 깨달을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결국, 제가 작년 겨울부터 가장 역점을 두었던 글쓰기 분야의 두 가지 테마는, 나름대로 일정한 성과를 얻기는 하였지만 아직 미완성일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앞의 논문은 『기타』 해석에 있어서의 방법론을 논한 것으로서 새로운 논문입니다. 뒤의 논문은 이미 발표한 「힌두교 전통에 비춰본 불교의 孝문제」라는 논문을 완역한 것입니다만, 둘 다 아직 미완성입니다. 앞의 것은 내용적으로 더 보완할 필요가 있고, 뒤의 것은 번역 용어의 용례 확인이나 인용문들의 번역된 사례 확인 등이 필요한 상태입니다. 그 어느 것도 미완이지만, 장차 더 완성하여 영어권 학회에서 발표하기를 희망해 봅니다. 이외에도 논문 초록의 번역 등을 해봤습니다만, 이 모든 영역작업에는 초역 → 감수→ 수정입력의 과정을 거치도록 하였습니다. 이때 감수는 앤디라는 캐나다인을 아르바이트로 고용하였습니다.

<유식삼십송>이나 『반야심경』은 범본이나 한역의 제본과 대조를 하여서 노트를 만들어 본 것입니다만, 『반야심경』의 티벳어 역본에는 “藏 B”본이 하나 더 있는데 그것은 또 다음으로 미뤄야 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제 공부의 거의 전부입니다. “인생은 미완성”이라는 노래도 있지만, 모두가 미완성입니다. 그렇지만, 그렇기 때문에 미래의 완성을 그리게 됩니다. 비록 지금은 미완성이지만, 미래의 완성으로 흘러가고(流), 현재의 미완성과 미래의 완성 사이에는 서로 통(通)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현재의 미완성은 하나의 부분(分)일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유통분은 유! 통! 분!입니다. 그 완성을 향하여 다시 정진을 다짐해 봅니다.

이제 제 교토생활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공부 이외의 생활이라는 측면에서도 참으로 행복했는데요, 저의 행복을 지탱해 준 여러 요소 중에서 두 가지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첫째는 교토 그 자체입니다. 교토는 지형이 분지인데, 그 사방을 돌아가는 산이 낮고(제가 여성적이라서 그런지 높은 산보다는 낮은 산으로 둘러쳐진 것이 마음을 안정시켜 주는 것같습니다.) 또 가모가와라고 하는 좋은 강이 흘러갑니다. 기숙사가 가모가와에 가까이 있어서, 가모가와를 산책하는 즐거움을 알게 되었습니다. 한국에서부터 자연을 즐기고 함께 할 줄 알았더라면 하는 아쉬움도 있었습니다. 「遲進兒」라는 제목의 시는 가모가와가 저에게 준 선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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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에만 경이 있는 줄 알았던 시절, 오직 목표를 향해서 현재를 마냥 희생해가던 시절, 무슨 번민 그리 많아 잠 못 이루던 불면의 시절, 그 “바보같은” 시절을 이름하여 저는 “교토 이전”이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지 않은 시절을 “교토 이후”라고 부르고자 합니다. 나중에 제 인생을 평가하여, 만약 “교토 이전”과 “교토 이후”로 나눌 수 있게 된다면 저는 성공한 인생을 살았던 것이라 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만큼 교토에서 돌아간 이후에도 교토에서와 같이 사는 것(여기서 말한 것처럼 사는 것)은 제게 던져진 숙제라 할 것입니다.

둘째 여기서 만났던 사람들입니다. 특히 우리의 유학생들, 스님들입니다. 나로 하여금 교토로 오게 한 인연을 심게 한 강종원, “산스크리트를 공부하고 싶다”고 하여 “범어 스터디”(1월 ～8월, 초급 범어와 『반야심경』)까지 했던 불탑 전공의 김춘호와 김수현, 정토세계에 대한 확신을 갖고 있는 장성림, 또 「교토통신」에 깊은 관심을 가지면서 일본불교와 한국불교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던 원익선 원불교 교무님, 자기 공부를 들고 와서, 고맙게도, 의논해 주신 여러 스님들, 일본어 수업을 함께 들은 교환학생들, 또 여러 가지로 의지가 된 김재권․송경숙 부부 ----. 여기 교토의 유학생들은 이렇게 서로 함께 살았습니다. 무엇보다도 고마웠던 것은 어떤 불협화음도 없이 모두가 서로 사랑하고 서로 화합하였다는 점입니다. 하나의 아름다운 불국토(佛國土)처럼. 다만, 저로서는 내내 미안한 것이 학문적인 영역에서는 그래도 이야기할 만한 벗이 되었는지 모르지만 그 영역을 떠나서는 유학생활에 별로 보탬이 못 되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그러나, 유학하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보다 더 큰 축복이 없으니 어쩌겠습니까. 용기와 희망을 가져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1년은 너무나 아쉬운 시간입니다. 1년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일임은 물론 잘 알고 있지만 말입니다. 무엇보다 아쉬운 것은 일본의 학계에서 발표를 할 수 있었다면 하는 점입니다. 그러나, 일본의 학회는 가입 자체가 어렵습니다.(한 대학의 이사를 통해서 가입해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경우는 자유가입이 아닌 것이지요.) 그러니, 1년 안에 가입하고, 말을 배우고, 일어로 논문을 쓰고, 발표를 신청하고, 발표까지 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거의 불가능합니다. 다행히 “인도학불교학회”에서 발표하게 되어서, 9월 4일～7일에 다시 교토를 찾을 수 있는 것이 고마울 뿐입니다. 이제 교토는 제게 “제3의 고향”이고, 불교대학은 “제2의 모교”입니다. 앞으로 인연이 이어지리라 믿습니다.

2003년 8월 16일

김호성(동국대 인도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