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에도 참 좋은 절이 많다. 백양사에서부터 송광사 선암사가 있는 조계산은 물론이고 대흥사와 일지암이 있는 해남 두륜산과 땅끝 마을의 미황사와 백련암 그리고 여수 향일암등등. 송광사 입구 이승에서 저승 갈 때 영혼을 씻어 보낸다는 세영각(洗靈閣) 앞에서는 단시 한편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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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일암 일원 (사진=문화재청)

대흥사에서는 서산대사가 입적하실 때 말씀이 대흥사 서산대사 기념박물관에 있다. <팔십년전 거시아 팔십년후 아시거-八十年前 渠是我 八十年後 我是我>* 라는 이 말씀이 두륜산 명찰 대흥사와 동백에 어울린다. 졸시 <대흥사 동백>전문이다.

진하고/ 힘 있고/ 청정하여//

네 속에/ 내가 기어든다/ 네 속에/ 내가 파고든다//

드디어/ 검붉은 피를/ 토해 냈구나//

80년 전에는 저것이 나이더니/ 80년 후에는 내가 저것이고녀*//

드디어/ 네가 나 되었구나/ 드디어/ 너와 내가 없구나/ 나와 네가 없구나

동해안에 자주 갔던 절은 역시 낙산사다. 낙산사는 소나무 숲 특히 아름드리 적송이 장관이다. 낙산사가 불탈 때 얼마나 가슴 아팠는지 이루 말 할 수 없었다. 그 후 불 탄 그루터기에서 솟아난 새 순을 보고 그야말로 생명의 환희를 느끼기도 한다.

눈비 맞고/ 이슬 받고/ 바람 마셔/ 수수백년//

세파에 시달려도 하나 흔들릴 것 같지 않은/ 홍조 하나 띠우고//

시간의 풍화 잊고/ 저렇게 하늘을 떠받친다/ 낙산사부처 한 나무

<졸시: 낙산사 적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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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산사 풍경 (사진=한국불교문화사업단)

서울은 역시 도심의 조계사다. 이런 저런 일로 불교역사문화박물관을 들릴 때면 조계사에 들려 삼배한 연후 일을 본다. 2천년대 초 조계사 수리 때 툭 잘려나간 회화나무를 보고 감회를 읊은 시가 <회화나무 그늘 아래>다.

춘추가 얼마십니까/ 여쭤도/ 이파리로 미소 짓고//

혼자 외롭지 않으세요/ 물어도/ 손사래만 치신다//

오른 팔 잘리고도 괜찮습니까/ 걱정해도/ 왼팔까지 내미신다

국내의 거의 대부분 절의 입구 진입로나 계곡 따라 난 길이 언제 걸어도 자연 힐링의 길이다. 설악산 백담사 계곡길이며 법주사에서 복천암에 이르는 계곡길은 명품중 명품이다. 그리고 양산 통도사의 적송길과 대흥사에 이르는 동백숲길은 백미중 백미.

그런데 계곡하면 역시 설악산 천불동 계곡, 이 긴 계곡을 수십 번 오르내리며 겨우 졸시 한편을 건진다. 이 처럼 나는 몸속에서 돌고 돌아 숙성 발효가 되지 않으면 단 한 구절도 어려우니 친구들이 한 수 읊어보라는 주문엔 묵묵부답일 수 밖에.

千의 부처를 만나러

설악 천불동(千佛洞)을 올랐으나

一佛도 보지 못한 채 내려오는

날 붙잡고 계곡물 속삭이네

Let It Be Let It Be

不爭不爭 不爭不爭(부쟁부쟁 부쟁부쟁)

그 소리 들으니

萬에 萬의 부처가

상선약수(上善若水)라 화답하네

<졸시: 천불동 계곡 全文>

백담사는 만해축전에 참여하면 회주로 계셨던 한국 시조의 대산맥 오현 스님을 뵙게 되고 기분 좋은 꾸지람도 듣게 된다. 만해축전 저녁 공연 비보이를 보며 읊은 시가 <뿌리>다.

만해는 몰랐으리라

뿌리도 없이, 아니

뿌리를 거부한 채

두 발 치켜들고 머리 처박고

우주를 빙빙 돌리는 저 선 머슴애들을

선 머슴애들 알기나 했으랴

뿌리를 찾아, 진정

뿌리박고 또 뿌리박고

두 발 굳건 머리 꼿꼿

하늘 모아 울부짖는 저 선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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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마을 만해선사 흉상. (사진=미디어붓다DB)

백담사는 축전 참여 도반들과 같이 한 템플스테이 프로그램 중 만다라그리기와 발표에 참여, 젊은 불자들과 뒤 섞여 함께 한 적이 있다. 그 참여기를 시로 그려본다. 졸시 <만다라 우주 블랙홀>에서:

만다라 우주 블랙홀

─ 우리 모두가 꿈꾸는 행복

- 들어가면서 ─ 스님의 노래

부처님은깨달으셨다/ 한잎우주의본질을그것을/ 한

장의그림으로나타낸게만다라/ 우주도유유상종/ 같은

것끼리끌어당기는힘이있는지/ 행복은행복을/ 기쁨을

구하는자는기쁨을노래한다

<아기 만다라>

시집도 그리그리 갔고 애들도 숭덩숭덩 낳고

자궁이 한껏 부풀어 그놈이 에미 뱃구레를 차 댈 때

세상 구경하러 나와 제 엄마 알아보고 화알짝 웃을 때

나비잠 재롱재롱 아장아장 커 갈 때

<중략>

<시골서 올라온 할머니>

내 어릴 때 자라던 초가집

지붕 위엔 머슴처럼 배때기 내놓고 자고 있는 하얀 박

그 아래 흐르는 졸졸 시냇물에 세수하는 달그림자

이웃과 개떡 하나라도 다정히 나눠 먹던 정

<첫애를 유산한 젊은 아기 엄마>

바라던 둘째는 순산

햇빛이 오색 무지개란 걸 그날 처음 알았지

크고 작은 어려움 강물처럼 굽이굽이 감돌지만

힘들어도 세상은 그런대로 살 만한 것

(중략)

<죽은 꽃 되살리기>

죽어 가는 화분의 꽃이라도 정성을 들이니까 살아나더라

‘죽긴 왜 죽어 죽기보다 사는 게 쉬운데’

힘들거든 길을 만들어라

원래 길이란 없는 것을 만들어 가는 것이니까

<혼자 배낭여행 즐기는 여자>

제 몸무게 50킬로 배낭 하나 짊어지고 인도 여행하

는 여자, 땀 지린 버스대합실에서 나가떨어져 넝마처

럼 자기도 하고, 란 한 조각에 카레 묻혀 허기 때우며

딱 50일만 여행에 젖어 보면 그게 바로 천국 가는 길

‘배낭 하나가 큰 아파트 한 채보다 더 행복하다니까요’

- 닫으면서 ─ 늦깎이 시인의 탄식

허 참 행복은 그렇게 엄청난 게 아니였군요

밤새 여기저기 굴러 떨어진

쌩쌩한 알밤을 주워 담던 어릴 적 그 기분,

앞마당에서 주어 담을 수 있는 감꽃 같은 것,

무지개 잡거나 화살 주우러

이 산 저 산 부산하게 쫓아다니지 않아도 되는,

내 옆에 언제나 있는 바로 당신,

일상(日常)

내가 꿈꾸는 일상은 소박하다. 좋은 일 맡은 직분에 땀 흐리고 선하게 사는 것. 말이 쉽지 이건 밥 먹고 싸고 졸리면 자는 것보다 더 어려운지 모른다. 꿈꾸는 소리인지 모른다. 시인은 꿈꾸는 사람, 다시 꿈을 꿔 본다.

<하늘에서 나를 내려다보면>

하루 24시간 그렇게 숨 가쁘게

땅바닥에 착 들러붙어 일개미로 살지라도

한번쯤은 하늘로 올라가

내가 사는 이 땅을 내려다볼지니

얼마나 열심히 지지고 볶고 사는지를

더구나 그렇게 사는 게 잘 사는 거라고

굳게굳게 신앙으로 믿고 살아가는지를

드물기는 해도

서로 손 내밀고 등 두드려 주며 사는 게

그게 복 받을 일이라고

눈시울 적실 일이라고 한번쯤 스스로를 일깨우며

너 때문에 살맛난다고

당신이 계셔 내가 행복하다고

마음에 묻어 둔 말 한마디

허리춤에 꼬깃꼬깃 숨겨 둔 헌 지폐

슬며시 끄집어내듯 속삭여 줄지니

아무리 찌지고 볶느라 네 손 잡아 본 일 없더라도

한번쯤은 하늘로 올라가 내 사는 세상

세월의 물굽이를 헤아려 볼지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