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릇 공부하는 이는 이르고자 하는 도(道)의 고갱이에 집중해야지, 유행이나 명성에 휘둘리면 안 된다. 책을 고르는 것도, 공부의 스승을 정하는 것도 다르지 않다. 유행이나 명성은 맥없이 흘러가거나 거품이 인 경우가 왕왕 있거니와, 이를 구별해낼 안목이 없다면 크게 그르칠 일이 없다고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간화선의 시조라 할 수 있는 대혜종고, 즉 대혜보각선사(大慧普覺禪師)의 글(書)인 <서장(書狀)>은 예로부터 지금까지 참으로 여러 식자들에 의해 해설되고 번역되어온 책이거니와, 그 분량이나 수준에서도 천차만별이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 가운데에는 고명한 분들의 해설도 있었고, 이름이 덜 알려진 이들의 번역도 있었으나 반드시 명성과 내용이 부합하는 것은 아니었던 것 또한 부인하기 어렵다. 대혜종고의 <서장>에 대한 일별에 만족하는 이에게는 어떤 책이라도 큰 상관이 없겠으나, 진실로 공부에 교본을 삼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올바른 선택이 중요하지 않을 수 없다.

크게보기최근 주로 묵직한 책을 펴내는 불교인문학 서적 전문출판사인 정우서적에서 <서장>이라는 책이 출간됐다. 책을 쓴 이의 이름이 생소하고 생경한데다가 책의 분량 또한 거의 912페이지에 달해 선뜻 손에 잡히지 않는 책이다. 이 책의 역주를 담당한 이는 동방불교대학에서 후학을 기르고 있는 일휴 스님이다. 일반인에게는 널리 알려지지 않은 분이지만, 운주사를 설립해 불서유통의 선구적 역할을 담당했던 분이라면 혹 아시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다.

<서장>은 대혜종고와 당시 재가자들 사이의 선 수행에 관한 편지 65편을 모아놓은 것인데, 그 내용이 알차고 불법의 대의를 잘 담고 있어 한국 선수행의 지침이 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앞서 결코 명성이나 유행에 의해 공부하는 지침이 되는 책을 고르지 말라고 강조한 연유는 이 책의 역주자가 비록 한국 불문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분이라는 이유로 외면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의미에서다.

먼저 일휴 스님이 역주한 이 <서장>은 미려하고 섬세한 번역을 해냈다는 평가를 할 수 있겠다.

“설령 금생에 요달하지 못할지라도 내생에 태어나면 목전경계를 바로 깨달아 그대로 받아쓰기에 힘들이지도 않고, 악업에 정신이 팔리지도 않고, 임종 때에는 업을 바꿀 수 있을 것인데 하물며 일념이 상응함에 있어서이겠습니까? 하루하루 다른 일을 생각하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바람직하지 않으니 오직 ‘간시궐’만 생각하십시오. ‘언제쯤 깨닫게 될까?’하는 자문은 하지 마십시오. 그저 사뭇 비오니이다. -답여사인거인(3) 중에서

두 번째 두드러짐은 ‘자세하고 풍부한 주석’이다. [황면노자(黃面老子)]를 예로 들어보자. 개인교수를 받는 듯이 자세하고 친절한 주석이 일품이다.

불교 유입 무렵인 남북조 시대에는 도가의 노자가 인민에게 널리 인지되어 있기에 생경한 ‘부처’의 대명사로 쓰인 명칭이다. 유가에 대하여는 황면부자(夫子)의 호칭도 쓰였다. 홍명집에 진(晋)나라 종병(宗炳)이 쓴 명불론이 보인다. 금선(仙)이나 축토대선(竺土大僊)은 신선가(神仙家)에 대한 전성어(轉成語)이며, 114쪽 답중시랑천유에도 염가노자(閻家子)의 어휘가 구사되었다.

세 번째 빼어난 점은 ‘와전과 오해의 고증’을 철저히 한 것, 네 번째 장점은 다양한 문법용례를 제시하고 있고, 구결과 음을 달아 놓아 초보자라도 소리 내어 읽다보면 서장 원문의 맛을 즐길 수 있도록 배려한 것 등을 들 수 있다.

이 책을 처음 펼쳐보노라니, 문득 역주자의 내공이 눈에 들어온다. 과문한 입장이나, 공부를 제대로 하고자 하는 이들의 선택을 받기에 충분하다고 평하고 싶다. 특히 역주자가 이 책의 말미에 달아 놓은 발문시게(跋文詩偈) ‘음고로쌍경(吟古路雙徑, 그 옛길 쌍경을 읊다)’ 7언10구가 눈에 들어와 소개한다.

春蘭秋菊歷歷時/南橘北枳亦如斯/誰何狗口主人漢/達磨西來隻履歸/被毛戴角實妙處/黙照看話無參差/從容頌古正覺路/碧巖雲門普覺時/水牯牛路宏智去/咄哉放一大慧兒
봄철의 난초 가을철의 국화 역력한 시절/회남의 귤 회북의 탱자 또한 그와 같은데/누구이뇨? 개 짓듯 떠들어대는 이/달마대사 서천에서 왔다가 신 한 짝 메고 갔다고/털 나고 뿔 나는 처지 실로 현묘한 자리라서/묵조도 간화도 서로 어긋남이 없고녀/종용암 송고처가 정각의 노정이요/벽암의 운문암은 보각의 시절인연/수고우로에 굉지선사 가노라니/애달프고녀! 한 수 늦추느니, 대혜 선사라.

*역주자 일휴스님은?
1972년 동국대학교 불교학과에 입학한 이래 1976년 봄 범어사에서 한산화엄 스님을 은사로 득도했고, 1979년 동국대를 졸업한 후 별도로 한문학을 공부했고,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원 연구과정을 수료했다. 2003년 6월 이래 법희연구원 원장, 2005년 3월 성북동 약사암에 반야도량 경산강원(京山講院)을 개원하고 강주로 부임하였으며, 2013년 3월 동방불교대학(역경학과) 교수로 후학을 지도하고 있다.
편역서로 <초발심자경문>, <신행요집>(공저), <염불왕생문>(공저), <역주 치문경훈>(공저), <신심명·증도가> 등이 있으며, <불타석가모니>(전3권), <화엄경>(전10권) 등을 만화로 펴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