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그림자 같은 절이 있다. 1,300여 년 세월을 온전히 부처님의 그림자 품고 살아온 절이 있다. 해가 뜨는 날이면 어김없이 연못에 모습을 드러내는 부처님을 모시고 사는 절. 정갈한 법당과 고즈넉한 후원, 그곳을 거니는 비구니 스님들 발끝이 나비처럼 사뿐사뿐한, 그런 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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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영사는 20년째 출, 재가자가 함께 안거를 회향하는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불영사 주지 일운 스님을 필두로 포행을 하고 있는 재가 수행자들의 모습.

불기2557년 하안거 해제를 하루 앞둔 8월 20일, 울진에 위치한 천축산 불영사를 찾았다. 여느 안거 중인 사찰답지 않게 경내에는 우바새 우바이들이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특히 대웅보전을 마주보고 있는 설법전이 그랬다. 잿빛 수행복을 입은 재가자들의 목에는 저마다 ‘묵언수행’ ‘오후불식’ 등 정진을 알리는 표찰이 걸려있었다.

면벽한 채 지그시 내려뜬 눈에 어린 간절함은 스님들의 그것과 다를 바 없었다. 장군죽비를 어깨에 걸친 비구니 스님이 유발 수행자들 사이를 소리 없이 걷고, 분연히 일어난 망상 한 줄기를 알아차려 경계의 죽비를 내리치려 하면, 그곳의 누구든 몹시 고분고분했다.

불영사는 해제 3일 전부터 재가신도들이 정진에 동참하도록 허용하고, 안거가 끝나는 날 모든 대중이 함께 회향하는 전통을 가지고 있다. 그 3일 동안 도량 전체는 일체 묵언이다. 부처님 시대에 그러했다는 이 같은 수행전통을 불영사는 20년째 이어오고 있다. 사전 모집인원은 1백 명이지만 늘 그 수를 넘겨 올해에도 1백 명 이상의 재가대중이 정진을 함께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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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백여 명 남짓한 재가 수행자들은 해제 3일 전부터 설법전에서 수행을 한다.

설법전에서 청운당을 가로지르면 나지막한 담으로 둘러싸인 선원이 모습을 드러낸다. 현재 불영사 주지인 일운 스님이 기존 선원의 협소함을 안타깝게 생각해 1995년 불사하고 이름붙인, ‘천축선원’이다. 좀처럼 일반에 공개되는 일이 없는 비구니 선원이지만, 불영사는 올 하안거 해제를 맞아 특별히 선원의 모습을 기자단에 공개했다.

너른 앞마당을 두고 몇 개의 돌계단을 올라가면 흰 고무신이 가지런히 놓인 큰방이 있다. 올 하안거에 방부를 들인 스님은 모두 20명. 고요하게 삼매에 든 비구니 스님들의 얼굴에서 과연 무엇을 읽어야 하는 것인지, 온 마음이 망상과 분별로 가득 찬 기자로서는 가늠하기 어려운 일이다.

입추를 지나 맹렬한 기세를 한풀 누그러뜨린 햇살이 열어놓은 문지방 너머로 쏟아졌다. 가까이 불영계곡의 청명한 기운을 담은 바람이 수좌들의 옷깃을 스치고 지나는 모습을 가만 바라보다, 대쪽 같은 죽비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스님들은 기민하게 몸을 움직여 마당으로 나섰다. 포행이었다. 차례로 열을 맞춰, 적당한 간격을 유지하면서, 그러나 큰 보폭으로 마당을 누비는 모습은 시간이 멈춘 듯 좌선하던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퍽 활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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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축선원 납자들이 화두참구에 골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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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른 마당을 포행하는 비구니 스님들의 모습이 퍽 활발발하다.

천축선원은 선풍을 진작하는 선 수행 도량임과 동시에 ‘율’을 강조하는 엄격한 수행도량이기도 하다. 주지 일운 스님의 은사가 한국불교 최초의 비구니 율사였던 묘엄 스님인 영향도 있을 법하고, 일운 스님이 유학생활을 거친 대만이 율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나라였기 때문이기도 한 탓이다.

일운 스님은 "쓰레기통에 음식을 담으면 먹지 않는 것처럼, 계율을 지키지 않고는 승려라고 할 수 없다"며 "율을 지킴으로 인해서 마음의 안정과 평화를 얻고 수행이 더욱 깊어질 수 있다"고 말한다.

율에 기반 한 선방의 생활리듬은 단순하고 명쾌하다. 새벽 3시에 기상해 예불과 좌선, 대중공양을 하고 도량청소를 마치면 새벽어스름이 물러간다. 오전 8시부터 10시까지 정진을 하고 사시 마지를 올린다. 점심 대중공양 후에는 울력을 하고, 오후 1시부터 4시는 다시 정진. 오후 6시부터 9시까지 또 정진이다. 하루에 10시간의 정진을 하고, 용맹정진을 할 때는 12시간 이상도 예사이다. TV나 산문 출입은 물론이거니와 개인 휴대전화도 사용할 수 없다. 이처럼 치열한 안거가 21일, 회향식과 천도재를 끝으로 마무리된다.

혹자는 도인이 나오기 힘들다는 세상이라고 한다. 철마다 2천여 명 남짓한 수좌들이 화두에 골몰하는데 이렇다 할 도인을 만나기는 힘들다고 말이다. 이에 천축선원 납자는 이렇게 되묻는다. 도를 안다는 것이 이론적이고 논리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이냐고. 천축선원 수행자들이 알고 있는 단 한 가지 진실은, 지금 이 순간을 살고 지금 이 순간을 알면 누구나 행복해질 수 있다는 믿음,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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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피어난 불영지(佛影池)에 천축산 부처님 그림자가 빼꼼 비친다.

1년 365일 공부가 그쳐서는 안 된다는 믿음으로 봄, 가을에도 1달 반씩 산철 안거를 실시하고는 쉼 없는 수행처, 천축선원. 이 아름다운 절에서 출재가를 넘어 모두가 도반으로 어우러져 정진하고 있는 모습을 두루 지켜보는 천축산 부처님 얼굴에 염화미소 한 조각 떠오를 것만 같다.